270화
“그보다 전하. 잉글랜드인들의 땅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행정청장의 물음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
“음?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일단은 다른 원주민 부족이 경작하는 땅으로 간주하라고.”
정성국의 대답에 행정청장은 그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북미 동해안 지역의 실태가 올라오고 있는데...생각보다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큰 편이라...”
북미 동해안 지역에서 보고가 올라왔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관심을 드러냈다.
“아. 그래? 어느 정도인가?”
“일단 자세한 보고서가 올라온 버지니아 지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예전 이곳을 관리하던 회사가 자신의 돈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에게 이곳에 정착하면 개인당 50에이커에 해당하는 땅의 권리를 보장했답니다. 아. 이 50에이커는 우리 기준으로는 약 20헥타르 정도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저들이 소유한 땅이 넓었던 탓이다.
현재 개척단에서 개척한 논밭을 배정받아 일하는 북미왕국 백성들이 경작하는 땅이 보통 5헥타르 정도였다.
물론 이 북미대륙은 넓은 편이었고 가능하다면 농민들에게 많은 땅을 경작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기계의 도움 없이 성인 남성 1명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기껏해야 1, 2헥타르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조선과는 다르게 풍족히 먹고살 만했다.
수리시설도 완비해놓았고 구아노까지 제공해주는 터라 조선과 비교해도 수확량이 월등히 좋았던 탓이다.
그 때문에 세금으로 4할이나 가져가도 계산상으로는 2헥타르면 게으름 피우지 않는다면 한 가정을 건사하는 데는 큰 문제 없을 정도였고.
거기에 조선과는 달리 자식에게 땅을 물려주거나 쪼개줄 이유도 없었다.
조선에서야 자영농이라 하더라도 자식들도 가정을 꾸려야 하는 만큼 먹고 살기 위해선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땅을 물려주거나 자식들에게 쪼개줘야 했지만, 북미왕국에선 상황이 전혀 달랐다.
자식들이 장성해 개척촌에서 잠시 일하면 나라에서 새로운 땅을 내어 줄 테니까.
그래서 굳이 많은 땅을 배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농민들에게 2헥타르 정도만 배정해 줄 생각이었고.
다만 워낙 양질의 땅에 눈이 뒤집힌 농민들이 제발 더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해달라며 하소연하기도 했고 이미 증기기관이 실용화된 상황이었기에 곧 트랙터를 비롯한 정성국이 기억하는 각종 농기계가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농민 1명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늘어날 거라는 예측 하에 조금 더 배정해 주었고.
그리고 정성국의 예상대로 트랙터의 초창기 모델인 경운차가 나오고 이를 활용해 점차 1인 경작 면적이 늘어나는 추세였고.
이 때문에 농가마다 추가로 땅을 더 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논의도 오가는 상황이었다.
헌데 잉글랜드인 개인당 배정된 땅이 20헥타르라니 이건 너무 넓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이들은 전통 방식으로 농업에 종사할테니 말이다.
물론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
북미왕국 백성들에게 배정한 5헥타르는 그저 작물을 재배하는 논밭의 면적이지만 잉글랜드인의 경우는 이 20헥타르에 집, 축사, 가축을 풀어놓을 목초지, 임야 등이 모두 포함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실제 작물을 경작하는 면적은 훨씬 적었다.
그리고 개척 초기 단계인 만큼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이주민이 많지 않았고, 이주민을 끌어모으기 위해 저런 넓은 땅을 제공한 것도 있었다.
물론 개인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의 넓이엔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노동력을 제공할 흑인 노예나 백인 계약 노동자들도 있었으니.
“문제는 대지주들이 경작하던 땅입니다. 개인이 사람을 고용해 이주하면 고용인 1명당 50에이커를 추가로 보장한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고용인이 있으면 1명당 50에이커, 즉 20헥타르를 추가로 보장한다니.
“잠깐만. 그러면...”
정성국을 비롯해 청장들이 놀란 표정을 짓자 행정청장은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덕분에 돈이 있던 자들은 추가로 백인을 왕창 고용해 데리고 오면서 땅을 늘렸고...덕분에 수만 에이커의 땅을 보유하고 있는 대지주들도 있습니다.”
정성국은 그 말을 듣고 후에 미국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젓다가 문득 든 의문에 행정청장에게 물었다.
“허이구. 그건 좀...잠깐만. 대지주들이 남아있긴 해?”
“대부분은 떠났습니다만 남아있는 대지주들도 몇 있습니다. 또한, 작년에 대지주들이 식민지를 떠나면서 자신 소유의 땅을 무척 값싸게 팔아넘긴 모양입니다.”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샀다고? 분명 모든 땅은 북미왕국의 소유라고 이야기했었는데?”
“혹시나 해서 산 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북미왕국은 기존의 땅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기에 당연히 땅을 잃어버리게 될 대지주들은 그 전에 자산을 정리하고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헌데 몇몇 대지주들은 남았고, 그런 뉘앙스를 풍겼는데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땅을 싼값에 샀다는 말에 정성국은 농민들의 땅 욕심은 인종을 불문하고 공통이구나 싶어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거 참...”
그러면서 정성국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북미 동해안 지역까지 구아노를 보낼 수도 없고 개척단을 보내 수리시설을 완비하거나 밭을 제대로 개간해줄 수도 없어서 일단은 그냥 인정해줄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고심을 끝낸 정성국이 행정청장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 상황이면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 같네.”
행정청장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성국의 말에 반색했다.
“허면...”
“개인당 10헥타르씩만 보장해줘. 어차피 솔직히 그 정도만 해도 부유하게 살 수 있을 테니.”
처음에는 북미왕국 백성들처럼 개인당 5헥타르만 보장해줄까 싶었지만, 저들이 이야기하는 땅에는 그들이 사는 집까지 포함되어있는 만큼 실제 경작 면적은 적어 보이기도 했고 수리시설의 미비와 제대로 된 비료의 부재로 생산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더 인심을 쓴 정성국이었다.
행정청장 역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문제는 남아있는 대지주들과 땅을 산 사람들인데...”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행정청장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각지에 경비대가 주둔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대지주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년에 땅을 산 사람들보다는 땅이 없는 계약 노동자들이나 그 출신들이 더 많은 만큼 오히려 북미왕국의 정책에 환영하겠지요.”
이에 군사청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하지만 정성국은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흐음...물론 그렇긴 한데 너무 저들을 억압하는 느낌이라...”
“그렇다고 저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 넓은 땅을 인정할 수야 없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렇지. 그러니 10헥타르 이상은 싸게 사들이자고.”
“아...흑인 노예들의 경우처럼 말씀이십니까?”
“그래. 최소한의 손해를 보전해주잔 소릴세. 적당히 현물로 지급해주면 되겠지.”
정성국의 말에 행정청장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쁘진 않지만...그러자면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분명 정성국의 말대로 하면 저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가뜩이나 북미 동해안 지역을 개발하는데 많은 자원이 소모되는 상황이라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남아있는 대지주들은 수만 에이커를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판이니 아무리 값싸게 사들인다 해도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갈 테고.
그러한 행정청장의 지적에 정성국은 머리를 긁적였다.
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선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답이긴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잉글랜드인들에게 주는 것은 땅의 소유권이 아닌 단순한 경작권뿐이었고 당대에 한정했기에 이 방법을 쓸 수도 없었던 정성국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이건 말 그대로 최소한의 손해를 보전해주는 의미로 사들이는 것인 만큼 최대 400헥타르까지만 보상해주도록 하지.”
“저들의 기준으론 1000에이커 정도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땅 문제를 매듭지은 정성국은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군사청장.”
“말씀하시지요.”
“예정대로 올해까지 북미 동해안에 배치해야 하는 병사들의 모집에는 문제없지?”
정성국의 물음에 군사청장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올해 말까지 총 9천의 새로운 병사들이 훈련을 끝내고 북미 동해안 지역에 배치될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시원스러운 군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올해 말까지 북미 동해안 지역에만 1만 8천의 병사가 배치되는 셈인가?”
“엄밀히 따지면 플로리다 지역 역시 북미 동해안 지역에 해당하니 산 아구스틴 인근에 배치된 3천 명을 더해야 합니다. 거기에 탐사대까지 더하면 2만 6천의 병사가 배치되는 셈입니다.”
군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휘유. 많긴 하군.”
새한성에 배치된 호위대를 제외하면 북미 서해안에 배치된 병사는 고작 2천 명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북미 동해안 지역에 배치된 병사는 과하게 많긴 했다.
물론 북미 서해안은 마땅한 적이 없기에 굳이 많은 병력을 배치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성국의 감탄에 군사청장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하지만 덕분에 만약의 사태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그보다 뉴펀들랜드 섬에 분함대와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프랑스의 반응은 없나? 세인트존스 근처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한 지역이 있다고 들었는데?”
뉴펀들랜드 섬의 가장 동쪽에 자리한 항구인 세인트존스 항은 잉글랜드가 만든 선착장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이주민을 보내 정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다만 이 선착장은 대구를 잡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온 잉글랜드 어부들의 쉼터가 되었고.
그리고 이번에 잉글랜드가 뉴펀들랜드 섬에 대한 권리까지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잉글랜드가 이용하던 세인트존스 항에 분함대와 경비대를 배치한 것이다.
다만 잉글랜드에서 미리 이야기한 대로 이 뉴펀들랜드 섬은 잉글랜드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긴 좀 애매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인트존스에서 직선거리로 약 100km쯤 떨어진 곳에 프랑스가 최근 건설한 플라센티아라는 정착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분함대가 뉴펀들랜드 섬 해안가를 정찰하면서 발견했는데 이곳의 위치가 분함대가 배치된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쪽에 있다더군요. 그리고 그때의 조우로 분명 프랑스도 우리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아챘을 텐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답니다. 가까운 만큼 한 번쯤 방문할 만한데 말이지요.”
분명 프랑스의 입장에선 북미왕국이 껄끄러울 터였다.
북미왕국은 아카풀코 조약 이후 이 북미대륙 전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잉글랜드 역시 이 북미대륙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잉글랜드가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프랑스는 조용히 뉴펀들랜드 섬에 정착지를 건설해 세를 불리고 있는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뉴펀들랜드 섬에 진출한 상황이었으니 북미 식민지를 생각하면 뉴펀들랜드 섬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프랑스로선 분명 무언가 반응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헌데도 아무런 접촉이 없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대체 프랑스가 무슨 생각인가 싶어 고심했다.
“그래? 흐음...”
그런 정성국을 보고 군사청장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아마 본국에서 별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일단 눈치를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 뉴펀들랜드 섬은 식민지 총독부로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이긴 합니다만...그렇다고 식민지 총독부의 힘만으로는 우리 북미왕국에 대항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일단은 두고 보도록 하세. 우리가 먼저 저들과 접촉해 이곳을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성국의 말에 군사청장이 슬쩍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다만 분함대에 알려 뉴펀들랜드 섬 인근의 정찰을 더욱 강화하라고 하겠습니다.”
분함대의 순찰을 강화해 프랑스를 압박해 협상장으로 불러내겠다는 뜻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압박하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