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정신없이 흘러갔던 1671년의 마지막 날에 정성국은 정평국을 집무실로 불렀다.
“준비는 다 끝났냐?”
정성국의 물음에 피로가 가득해 보이는 얼굴을 한 정평국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뭐야. 그런 애매한 대답은.”
정성국이 타박하자 정평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축제야 간간이 열긴 했지만...솔직히 축제라고 해봐야 휴일을 지정하고 행정청이나 관리청에서 고기와 술을 나눠주는 것뿐이었잖아요. 헌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니까 준비한다고 준비하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는 소리죠.”
“하긴...아무튼 믿는다.”
속 편한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피곤이 가득한 눈길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양심이 찔린 정성국은 슬쩍 고개를 돌렸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한숨을 내쉰 정평국은 입을 열었다.
“그보다...형님은 이 행사를 매년 여실 겁니까?”
“응. 명색이 새해 명절인데 너무 심심하잖아?”
“그럼 호위대도 좀 늘리시지요. 아니면 새한성에 경비대를 대거 배치하던지요. 솔직히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궁 가까이에서 이런 행사를 연다는 것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불손한 무리가 접근할 수도 있을 테고.”
새한성의 치안은 호위대가 맡고 있었다.
평시에는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번처럼 사람이 무척이나 붐비는 경우는 이를 호위대가 감당할 수 없어 새김포에 배치된 경비대마저 대거 새한성으로 이동한 상황이었고.
하지만 정평국이 보기엔 그래도 부족하다는 판단이었고 이에 정성국도 동의했다.
“그래야지. 나중 일은 또 어찌 될지 모르니. 병력에 여유가 생기면 호위대와 새김포에 배치된 경비대의 숫자도 늘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
* * *
돌쇠는 처음으로 방문한 새한성의 풍경에 반쯤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어이쿠.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나?”
“그러게 말이오. 이거 왕도 사람들은 죄다 나온 모양이구려.”
“김 씨 말을 듣기를 잘 했네. 애들을 다 데리고 나왔으면 애를 잃어버려도 찾지를 못하겠어. 왕도가 넓고 사람이 많다곤 들었지만...”
그러면서 돌쇠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잔뜩 들뜬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장남 천석이가 다른 데로 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을 꼭 잡았다.
이에 삼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 거리 자체가 무척이나 널찍했다.
그리고 그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돌쇠가 새해를 축하하는 행사가 왕도에서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애들에게 왕도를 보여줄 겸 모두 데려가겠다고 하자 2년 전 조선을 떠나 북미왕국에 정착해 새한성도 몇 번 다녀왔었다는 김 씨가 극구 만류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기에.
그때 돌쇠의 손을 꼭 잡고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천석이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국왕 전하께서 새해를 즐겁게 보내라는 의미로 백성들에게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곳이 바로 저긴가 봐요!”
돌쇠는 그런 천석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허허. 그러냐? 그럼 우리도 빨리 줄을 서야겠는데...우리 천석이는 뭘 먹고 싶으냐?”
무척이나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기에 천석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꿀꺽.”
그때 한 아이가 고소한 향이 풍기는 물고기 모양의 노란 빵을 한 입 깨물자 빵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팥고물을 보고 천석이가 군침을 삼켰다.
그런 천석이의 반응에 돌쇠가 크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하. 저 빵이 먹고 싶은 게로구나. 일단 저기로 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천석이가 화들짝 놀라며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아니에요! 아버지와 삼돌 아저씨가 먼저 드실 음식을...”
거리의 서쪽은 식사 대용의 음식을, 거리의 동쪽엔 다과나 군것질거리를 나눠주고 있었기에 천석이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자 삼돌이는 자신들을 먼저 생각하는 천석이가 기특해 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다. 이 기회에 저런 간식거리도 먹어 보는 거지.”
이에 돌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 어차피 고기가 먹기 힘든 것도 아니고. 가자. 이왕 온 김에 군것질거리로 배터지게 먹어 보자.”
* * *
개똥이는 창문을 통해 한창 떠들썩 한 거리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와...이번엔 저 노점상들 때문에 왕도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왕도 전체가 떠들썩해서 그런가? 이거 명절 분위기가 제대로 나는데요?”
이에 젊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작년에만 하더라도 무척 조용했는데...”
젊은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가 맞장구쳤다.
“아. 명절이라면서 쉬기는 했지만...그게 다였지. 그래서 말이 새해 명절이지 그냥 휴일에 불과했고. 헌데 올해는 전혀 다르네.”
중년 사내의 말에 노인이 술잔을 꺾은 후 대화에 끼어들었다.
“크으...술맛 좋다. 뭐 오늘도 명절이라기보단 가끔 벌이는 축제 같은 느낌이긴 한데...나쁠 것 없나?”
그런 노인의 말에 개똥이가 웃으며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떠들썩하고 흥겨우니 된 거 아닙니까. 그보다 전하께선 정말 통이 크시다니까요. 저 음식들이 모두 공짜라니.”
개똥이의 말에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이의 일행들은 지금까지 거리 서쪽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제공하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이런 흥겨운 분위기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긴 싫어서 주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기에 생소한 음식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입이 호강했어. 아주.”
“암. 암. 저 서양인들이 먹는다는 음식들이 참 생소하긴 한데...맛은 괜찮았지.”
중년 사내의 말에 노인은 다시 술을 한잔 걸치면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특히 그 뭐냐. 중간에 먹었던 그 부드러운 빵 사이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손으로 편히 잡고 먹었던 그 음식! 그거 맛도 맛이고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던데?”
노인의 말에 개똥이도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그거! 확실히 괜찮기는 했어요. 처음엔 토마토가 들어가서 좀 그랬는데...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 거 같더라고요? 거기에 만들기도 쉬워 보이지 않아요?
이에 젊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되짚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뭐 빵이야 빵집에서 사면 그만이고 그 외엔 토마토, 양파, 고기 적당히 구워 올리면 그만이니...”
“근데 고기가 중요한 거 아닌가? 그냥 고기 같지는 않던데...”
그렇게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노인이 다시 술을 한잔 마시며 탄식했다.
“아...이럴 때 술이 무료로 풀었으면 더욱 흥겨웠을 텐데 왜 술은 공짜가 아닐까.”
이번 새해를 맞아 다른 지역에서는 새해 명절이라며 고기와 술을 풀었지만, 새한성에서는 왕실에서 직접 음식을 조리해 나눠주는 이러한 행사를 열었다.
다만 새한성에서만큼은 술은 풀지 않았고.
이에 노인은 투덜댔지만, 오히려 중년 사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술에 취해 사고 칠까 봐 그런 거겠지. 뭐 이해는 해.”
중년 사내의 말에 개똥이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술을 마시는 노인을 보고 한소리 했다.
“그렇지요. 오늘 축제를 연단 소리에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이 많이 온 것 같으니...이들이 모두 술에 취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 아재도 좀 적당히 마셔요.”
“이런 기쁜 날은 취해야지. 참...내가 젊었을 때는 배부르게 먹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 말에 개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신 국왕 전하께서 만수무강하셨으면 좋겠고...아재도 이렇게 살기 좋은 곳에서 오래 살아야죠. 그러니 술 좀 적당히 마셔요. 전하께서 술은 가볍게 한두 잔 정도만 마시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셨다잖아요. 그 외에는 차를 마시고.”
“끙...알았어. 마지막으로 이거 한 잔만.”
* * *
1672년 새해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며칠이 지난 후 정성국은 청장들을 회의실로 불러들여 회의를 열었다.
“그래. 흑인들의 이주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고?”
행정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이 반색하자 행정청장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예상외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이 순순히 흑인 노예를 넘겨주었습니다. 덕분에 새진주와 북미 동해안 지역을 오가며 물자를 수송하던 4함대가 새진주로 돌아갈 때 흑인들을 한가득 태워 캐롤라이나 지역에 내려놓는 중입니다.”
행정청장의 자세한 설명에 정성국도 조금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그건 좀 예상외로군. 값을 쳐준다 해도 노동력이 사라지는 상황이라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자들이 어느 정도는 반발할 거라고 보았는데...”
물론 북미왕국에서 노예를 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저들이 노예를 산 가격 전부를 보전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꽤 반발할 수도 있다고 보았고.
이에 행정청장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버지니아의 일도 있고 근처에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요.”
잉글랜드인들이 경비대를 두려워한다는 말에는 잠시 혀를 찼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이들이 정착할 지역의 개발은?”
이에 개발청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미 새진주에 대기하고 있던 개발청의 장인들 일부가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이동해 새롭게 개척단에 소속된 흑인들을 이용해 그들이 거주할 지역을 건설 중이고요. 그 후엔 강을 따라 주변에 밭을 개간할 예정이고요.”
흑인들이 주로 정착할 지역은 전생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인근이었다.
원래였다면 1670년에 이곳에 찰스타운이라는 마을이 들어섰겠지만, 북미왕국의 존재 때문에 비어있는 상태였고 당장은 해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정성국이 이곳을 캐롤라이나 지역의 거점 도시로 낙점했다.
그리고 순조롭게 항구 도시를 개발 중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개발청장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음...물자는 부족하지 않고?”
“뭐 전부터 에스파냐에 이야기해두기도 했고 새진주에 워낙 많은 물자를 쌓아둔 상태라 이곳을 개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곳에 온 뒤로 수많은 도시를 건설한 개발청장이 별반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정성국은 무척이나 믿음직해 보이는 개발청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젠 새로운 지역을 개발하는 일도 익숙해졌을 테니...다만 캐롤라이나 지역에 갑작스럽게 흑인들이 몰려들었고 이들 대부분이 당장은 천막생활을 하는 중이니 혹시라도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위생에 더욱 신경 쓰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전하.””
개발청장과 행정청장이 동시에 대답하자 정성국은 행정청장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면 행정청장. 우두 접종은 어떻게 되어가나?”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들은 서양인과 가까이 지내면서 계속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 만큼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진출한 후 가장 먼저 신경 쓴 것이 바로 원주민들에게 우두 접종을 하는 것이었고.
“일단 북미왕국에 합류한 원주민들 위주로 접종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중얼거렸다.
“뭐...차별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나...알았네. 다만 원주민들의 접종이 끝나는 대로 잉글랜드인들에게도 꼭 접종하도록 하게.”
잉글랜드인들도 이젠 북미왕국의 백성이기에 그렇게 명령하는 정성국에게 행정청장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계속해서 원주민 부족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할 것이라 예상되는 만큼 당분간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겠지. 그보다 메타코멧에 의해 매사추세츠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 상당수가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다른 지역은 어떤가?”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도 북미왕국에 호의적인 편입니다. 아무래도 이들은 그동안 잉글랜드인들에게 땅을 뺏기고 몰락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외무청 관리들이 각 부족을 방문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하니 당연히 호의적일 수밖에요.”
“그래?”
처음에 몇몇 부족의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을 조금 미심쩍게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의 영역 확장이 멈췄고 덕분에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잘못하면 잉글랜드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 들어서는 셈이었으니까.
거기에 북미왕국은 이 대륙 전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또한, 원주민들은 잉글랜드인을 곱게 볼 수 없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남아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었으니 불안한 표정으로 북미왕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이 외무청 관리들을 보내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잉글랜드처럼 무력을 동원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내쫓거나 공격해 강제로 노예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하고 이제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잉글랜드인이 문제를 일으키면 이야기해달라고, 그러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니 이미 세력이 축소될 대로 축소된 원주민 부족들은 다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을 설명한 조용한 곰이 계속 이야기했다.
“일단은 그렇게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저들을 설득해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킬 생각입니다. 그리고 메타코멧처럼 우호적인 부족의 추장들의 새진주 방문도 권해볼 생각이고요.”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입 아프게 설득하는 것보다야 한번 새진주를 방문해본다면 생각이 바뀌겠지. 그보다 전에 이야기했던 이로쿼이 연맹과의 관계는...”
“최근 이로쿼이 연맹에 외무청 관리를 보냈다는 소식은 올라왔습니다만...그게 다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외무청 관리가 이로쿼이 연맹과 대화를 나누고 있겠죠.”
“알겠네.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보고해 주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