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12월 중순쯤에 다시 새진주에서 북미 동해안 지역 전반의 보고서가 취합되어 올라왔고 이 보고서를 확인한 행정청장은 곧바로 정성국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음? 몇 명이라고?”
“대략 1만 명 남짓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1만 명이라...”
정성국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북미 동해안 지역 각지에 파견된 행정청 관리들이 파악한 흑인 노예의 수는 대략 1만 남짓.
전생에서 미국이 독립할 시기인 약 90년 후에 흑인의 수가 60만 명에 가까웠던 것을 고려하면 예상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쩝...전생의 미국 독립 당시 백인 인구와 현생의 실제 거주했던 백인의 비율을 고려해보면 못해도 2만은 넘게 있을 줄 알았더니만...고작 1만 남짓이라니.’
정성국의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흑인 노예의 수가 적은 것은 바로 이 시기엔 흑인 노예의 노동력보다는 유럽에서 데리고 온 기간제 계약 고용인의 노동력을 더 높게 평가해 이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다 1676년에 베이컨이 반란을 일으키며 버지니아 총독과 대립하다 제임스타운을 불태워버렸고.
이 사건 이후로 농장주들은 베이컨의 지지자였던 불만이 많은 백인 기간제 계약 고용인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것보다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것이 사회적인 안정에 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흑인 노예를 대거 사들이면서 흑인 노예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리고 남부 지역 가운데 캐롤라이나는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제대로 개발되지도 않은 상황이었고.
덕분에 정성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흑인 노예의 인구가 적었다.
이러한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흑인들이 많다고 알려진 남부 지역 가운데 캐롤라이나는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제대로 개발되지 못해 정착한 인구도 적었고 이곳의 흑인 노예의 수도 고작 200명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바뀌어서 예상보다 흑인 노예의 수가 적은 거라고 판단한 정성국은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조금 적은 감은 있지만...뭐 나쁘지 않군.”
이에 행정청장은 조금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캐롤라이나 지역에 있던 잉글랜드인이 버지니아 지역으로 떠나는 상황이라 이 지역의 발전은 오로지 원주민과 흑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들을 모두 캐롤라이나로 이주시킨다면 캐롤라이나의 발전이 한층 수월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이들을 잘 정착시키면...아. 그러고 보니 이들의 성비는 어떻던가?”
정성국의 질문에 행정청장은 조금 안색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월등히 많습니다.”
“역시 그런가. 흐음...”
아무래도 농장일을 하려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나았다.
그나마 대규모로 노예를 부리던 대지주들의 경우는 집안일을 해줄 하녀가 필요했기에 여성 노예를 구하곤 했지만 아무래도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이에 정성국은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캐롤라이나 지역의 개발은 전적으로 흑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당연히 북미왕국으로선 이들이 캐롤라이나에 잘 정착할 수 있게 신경 써야 했고.
성비가 심하게 불균형하다면 여러 문제가 불거질 것이 뻔했기에 이 문제에도 개입해야 했다.
그리고 해답은 뻔했다.
노예 상인과 접촉해 여성 흑인 노예들을 사들이는 것.
하지만 정성국은 이를 선택하지 않고 고민하기 시작하자 정성국의 속마음을 눈치챈 행정청장이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노예 상인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원주민의 성비도 비슷한 상황이라 흑인들의 순조로운 정착과 인구의 증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노예 상인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끙...”
어차피 캐롤라이나 지역의 원주민 인구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이들의 성비 역시 비슷한 편이었기에 원주민 여성과 흑인 남성을 짝지어줄 수도 없었다.
이를 지적하는 행정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생각해보면 캐롤라이나 지역은 원주민과 흑인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주민 여성을 두고 원주민 남성과 흑인 남성이 다툴 수도 있겠구나. 하아...젠장.’
정성국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더욱 고심이 깊어진 얼굴을 하자 행정청장이 계속 정성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처지에서도 다른 곳에 가서 가혹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야 북미왕국에 와서 노예에 해방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행정청장을 보며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네. 노예를 들여와 해방해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만든다면 당장 인력이 부족한 우리 북미왕국에도 좋고 노예 개인의 처지에도 나쁠 것은 없겠지. 다만 중간에서 노예 상인들이 돈을 버는 것이 고까워서 그렇네. 그리고 우리가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하면 노예무역이 더 활성화될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정성국이 마침내 입을 열자 행정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행정청장이 보기엔 이건 과한 걱정이었다.
성비는 9:1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흑인 여성이 모두 짝을 이룬다고 했을 때 노예 상인에게 사들여야 하는 흑인 여성 노예는 8천 명 정도였고 외무청을 통해 파악한 여러 정보를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이 그 정도의 노예를 사들인다 하더라도 노예무역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외무청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예무역은 이미 무척이나 활성화되어있다고 합니다. 특히 서인도 제도와 남미 쪽이 심하다고 들었고요.”
“아마 그럴걸세.”
그나마 북미 동해안 지역의 흑인 노예들의 처우는 남미와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남미의 브라질이나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서인도 제도의 경우는 흑인 노예를 일종의 소모품으로 생각했다.
최대한 적게 먹이면서 최대한 많은 일을 시키다 노예가 이를 버티지 못하고 죽으면 새로운 노예를 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달까.
그렇기에 이 지역에서의 노예 거래는 이미 활발한 편이었고.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노예를 사든 사지 않든 이 지역의 노예무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행정청장의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노예들은 이미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노예로 잡혀있는 상태로 어딘가로 팔린다고 들었으니...우리가 저들을 사들이지 않으면 노예들은 다른 지역으로 팔려가 가혹한 생활을 하다 죽겠지요. 그러니...”
행정청장의 말에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어쩔 수 없군.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어.”
“허면...”
“새진주에 있는 웅크린 늑대에게 연락을 보내게. 일단은...흑인들의 성비를 맞추기 위해 여자 노예들을 구해보라고. 단 잘못하면 유럽에 북미왕국이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질 수 있으니 노예선을 새진주로 불러들이기보다는 서인도 제도를 돌아다니면서 선착장 근처에서 거래되는 노예를 사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
정성국은 훗날 외교적으로 유럽 각국을 압박해 이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금지하도록 권유할 생각이었다.
물론 말로만 해선 듣지 않을 테지만 정성국의 생각대로 2, 4함대의 규모가 커진다면 가까이 있는 에스파냐나 잉글랜드는 북미왕국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리고 2함대의 규모가 커지면 서인도 제도로 진출할 생각이었고 주변 해역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노예선을 공격한다면 결국 서인도 제도의 노예무역은 거의 근절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만큼 국가 차원에서 대놓고 노예를 구하는 것은 피하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행정청장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외무청에 따로 사람을 보내 전하께서 우려하시는 부분을 확실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정성국은 북미왕국을 돌아보겠다며 새한성을 떠났던 윤휴와 윤의제가 다시 새한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둘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정성국은 윤휴와 윤의제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참을 이색적인 북미대륙의 풍광에 대해 감탄하던 이야기 주제는 어느덧 그들이 탔던 기차로 바뀌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정성국이 윤휴의 말에 웃으며 되묻자 윤휴는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말...상식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지요. 그 거대한 쇳덩이를 타고 빠르게 움직인다니. 관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새한성에서 새나주까지의 거리가 한양에서 동래보다도 더 멀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이에 윤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이동하면 보통 14일 정도가 걸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동 수단이었다.
“그런 거리를 고작 이틀 만에 주파할 줄은...관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루 만에 오갈 수도 있다면서요?”
“그렇기야 하지요. 다만 실제 그렇게 기차를 갈아타며 이동하는 것도 무척 고된 일이라...”
정성국의 대답에 윤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직접 타보니 조금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했으니까.
“고되기는요. 그 거리를 직접 걸어가는 것보다 고되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기야 하지요.”
정성국이 멋쩍게 웃자 윤의제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관리의 도움을 받아 최근 건설하고 있다는 새나주-새진주 구간으로 물품을 운송하는 기차에 올라타고 실제 공사 현장을 가 보았는데 그게 또 장관이더군요.”
이에 윤휴가 커피를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암. 그 많은 사람이 합심해 거대한 교량을 건설하는 광경이란...”
“교량을 건설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전 오히려 철로를 빠르게 설치하는 것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일을 하는데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익숙하게 철로를 설치하고 마차를 타고 적당히 이동해 다시 설치하고...솔직히 대단하더군요.”
윤의제는 아버지와는 달리 철도를 설치하는 일꾼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 말에 윤휴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아. 확실히 그건 그랬지. 무척 숙련된 일꾼들 같았어.”
정성국은 그 말에 조금은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호오. 그렇습니까? 그래도 경험이 있다고 많이 능숙해진 모양이군요. 새한성-새나주 구간을 건설할 땐 꽤 엉망이었었는데.”
정성국의 말에 윤의제도 윤휴도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많은 일꾼이 일하는데도 크게 소란스럽지도 않고 능숙하게 움직여 빠르게 철도를 설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꽤 오랫동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성국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듯 보였기에.
“허허. 그렇습니까?”
“예. 뭐 처음이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덕분에 새한성-새나주 구간의 건설이 꽤 늦춰졌었지요.”
그러면서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새나주-새진주 구간에 투입한 것이 효과를 본 것 같다고 웃었다.
이에 윤휴는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나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헌데 전하.”
왠지 모르게 윤휴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자 정성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백호 어르신.”
윤휴는 자신을 보고 미소짓고 있는 정성국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조선 사람들도 저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정성국은 왜 윤휴가 이렇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한 것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일단 조선이 과연 저 철도를 원할지 모르겠군요.”
조선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유로 도로를 제대로 정비하고 확장하는 것도 꺼려하는 판국에 과연 철도를 원하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정성국의 말에 윤의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야 부정적일지 몰라도 조선 대신들이 기차를 한 번이라도 타본다면 당연히 원할 거로 생각합니다만...”
윤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렇지. 그리고 이미 조선은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특히 작년부터 북미왕국의 식량 덕분에 기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으니 북미왕국으로 사절단을 보내긴 할 겁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철도의 효용성을 확인한다면 당연히 원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면서 윤휴와 윤의제가 정성국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정성국은 슬쩍 웃으며 자기 생각을 밝혔다.
“솔직히 증기기관은 북미왕국의 핵심 기술이지만...정말 조선이 원한다면 이를 넘기지 못할 것도 없지요.”
“오! 그렇습니까?”
정성국의 말에 윤휴와 윤의제가 반색하자 정성국은 급히 덧붙였다.
“다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조선에 철도를 설치하려면 북미왕국에서 당연히 북미왕국의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가 이를 도와줘야 할 텐데 당장은 인력이 부족하거든요. 거기에 철도를 만들 강철의 생산량 문제도 있고.”
정성국의 말에도 윤휴는 정성국이 얼마나 이 증기기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이 조선을 버리지는 않겠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요. 허나 언젠가 조선에도 철도가 깔리고 조선 백성들이 기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하며 이 기차를 따라 물자가 손쉽게 오고 간다면 조선도 발전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 날이 참으로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