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266화 (266/850)

266화

아무르는 외무청 관리를 따라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이동할 때만 해도 아무르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이곳에서 지낸 며칠은 아무르 인생에 있어서 정말 행복한 시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무르는 흑인 노예였고 아무르의 첫 주인은 노예를 가혹하게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본국이 이 땅을 북미왕국에 팔아넘겼다는 소문이 들리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갈 뜻을 내비치며 아무르를 다른 주인에게 팔았다.

그렇게 맞이한 두 번째 주인은 첫 번째 주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한 농부였고 이 두 번째 주인은 아무르를 산 비용이 생각나서인지 꽤 가혹하게 대했다.

그렇기에 아무르는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온종일 일해야 했다.

덕분에 항상 피로한 상태였고 아무르 역시 예전과는 달리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갑자기 두 번째 주인이 집으로 달려와 아무르를 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니 곧 아무르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했고 두 번째 주인의 명령에 따라 도착한 곳은 생소한 복식을 한 병사들의 주둔지였다.

아무르 역시 북미왕국에 대한 소문은 들었기에 이들이 소문의 북미왕국 병사들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두 번째 주인이 자신을 왜 이곳에 데리고 온 건지는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인의 표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후 북미왕국의 관리는 아무르를 확인한 후 두 번째 주인에게 주머니를 건넸고 그제야 아무르는 자신이 다시 팔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르는 이 세 번째 주인이 부디 관대하기만을 바랐고.

하지만 아무르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세 번째 주인은 북미왕국의 관리가 아니었다.

북미왕국의 관리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러 흑인 노예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하기를 북미왕국에선 국왕 전하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하며 그렇기에 자신들은 이제 자유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아무르를 비롯한 흑인 노예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반응에 북미왕국의 관리는 차차 실감이 날 거라면서 새로 정착할 곳으로 떠나기 전까지 조금은 쉬라고 말했다.

그리고 외무청 관리의 말처럼 아무르를 비롯한 흑인들은 이 북미왕국 병사들의 주둔지에서 편히 쉬고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들이 이젠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에는 누리지 못한 휴식을 만끽하며 새로 이주할 지역에서도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선착장에 북미왕국의 배가 도착했고 아무르와 다른 흑인들이 거대한 배를 보고 놀라고 있을 때 외무청 관리가 다가와 이제는 남쪽으로 떠날 시간이라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이에 아무르와 흑인들은 외무청 관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처음에는 나름 들뜬 분위기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선착장에 가까워지고 멀리서만 보던 거대한 배가 가까워지자 아무르를 비롯한 흑인들은 모두 예전 생각이 떠올랐는지 분위기가 가라앉고 발걸음이 무거워지며 이동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빠르게 걷던 외무청 관리는 자신을 따라오던 흑인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발걸음을 돌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흑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맨 앞에 있던 아무르에게 대체 무슨 문제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에 아무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정말 저 배에 타야 하는 겁니까?”

잔뜩 겁에 질린 아무르의 표정을 확인한 외무청 관리는 그제야 왜 흑인들이 이렇게 겁에 질린 것인지를 눈치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무르를 비롯한 흑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이 흑인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이 땅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들이 이곳에 올 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대충 들었으니까.

처음 그 내용을 들었을 때는 외무청 관리는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노예 상인들은 흑인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움직이지도 못하게 구속한 후 마치 장작처럼 층별로 ‘적재’했고 그 상태로 가끔 물이나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면서 항해했다고 한다.

그런 항해를 경험했으니 흑인들이 이처럼 배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외무청 관리가 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네. 하지만 그렇게 겁에 질릴 필요는 없네. 저건 자네들이 타고 온 노예선이 아니야. 그리고 자네들도 이젠 노예가 아니고. 그러니 자네들이 이곳에 온 것처럼 쇠사슬에 묶여 움직이지 못한 채로 이동할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게.”

외무청 관리의 장담에 잔뜩 겁에 질렸던 아무르와 흑인들의 안색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물론 저건 군함이라 좀 불편하기는 할 거야. 하지만 자네들이 경험했다는 그 노예선 따위와는 전혀 다를 테니 걱정하지는 말게.”

물론 선원들이 지내는 객실을 내어줄 수는 없으니 결국 이들은 지금은 비어 있는 창고에서 머물러야 하겠지만 충분한 공간이 있는 만큼 지내기에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군함인 만큼 이동이 어느 정도 통제되기는 하겠지만 하루에 한 번은 선원들의 통제하에 갑판에 나와 햇볕을 쬘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러한 설명에 아무르와 흑인들의 안색은 점차 펴지기 시작했다.

“음...”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자네들은 이 배를 타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남쪽의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가는 거라고. 그 느린 노예선으로 한 달 넘게 대서양을 건너는 게 아니란 말일세. 기껏해야 3, 4일이면 도착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 말에 아무르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어? 정말 3, 4일이면 도착하는 겁니까?”

“그럼. 우리 북미왕국의 배는 무척 빠른 편이니까. 그리고 내가 자네들을 속여서 뭐 하겠나.”

“그...그렇긴 한데...”

외무청 관리의 말에 아무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르도 흑인들도 아직은 배에 오르는 것이 조금 거북한 표정이었기에 외무청 관리는 살짝 표정을 굳히고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이미 노예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 북미왕국은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하지만 지금껏 자네들을 노예로 부렸던 잉글랜드인들은 여전히 자네들을 노예로 생각할 걸세. 물론 우리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만큼 이를 드러내지야 못하겠지만 자네들을 대하는 태도가 당장 바뀌지는 않을 거야.”

외무청 관리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몇몇 흑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에 외무청 관리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네들도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인지 우리가 이미 자네들은 노예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잔뜩 위축되어 있잖나. 잉글랜드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들은 노예로 살면서 가혹한 대우와 주인의 매질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북미왕국의 관리가 이제 너희들은 노예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들 곧바로 주인과 맞먹으려 들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자네들은 이곳을 떠나 잉글랜드인이 없는 곳으로 보내는 걸세. 이보게. 아무르.”

외무청 관리가 몇 번 이야기한 적 있는 아무르를 부르자 외무청 관리의 말을 경청하던 아무르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예. 말씀하시지요.”

“생각해보게. 자네는 이제 노예가 아니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야. 자연스럽게 자식도 생길 테고. 헌데 자네의 자식이 이곳에서 잉글랜드인들에게 노예처럼 대우받게 하고 싶은 건가?”

그 말에 아무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둔지에서 얼핏 본 이후로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한 여인을 떠올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절대 아닙니다!”

아무르의 대답과 이에 동조하는 다른 흑인들의 분위기에 외무청 관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럼 빨리 배에 올라타게.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유를 만끽하라고.”

“알겠습니다!”

아무르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옮겼고 다른 흑인들도 아무르를 따라 더는 두려움 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나치는 흑인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외무청 관리는 문득 북미왕국말로 중얼거렸다.

“뭐...노예 출신이었던 흑인들은 모두 개척단에 소속될 테니 당장 자유를 만끽하기보단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느라 정신없을 테지만...그게 다 자네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테니 고생하게나.”

* * *

“새진주에서 출발한 배가 런던에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그러면서 보좌관이 시종을 향해 손짓하자 시종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

찰스 2세는 우윳빛이 감도는 도자기와 화려한 모양의 금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기 세트를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 이건...이건...정말 아름답군.”

찰스 2세의 감탄에 보좌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처음 클레멘트가 가져온 저 다기 세트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었으니까.

“북미왕국에서 식민지 구매대금으로 보낸 물품 중 하나입니다. 북미왕국 도자기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고급 다기 세트라고 하더군요.”

찰스 2세는 보좌관의 설명에도 다기 세트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럴 테지. 그럴 거야. 저 유연한 곡선과 화려한 금박 장식을 보게. 이건 경지에 오른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야만 나올 수 있는 예술품의 극치야. 이걸 캐서린이 보면 무척 좋아하겠군.”

잉글랜드의 왕비인 캐서린이 차를 즐기고 도자기로 만든 다기 세트를 수집한다는 사실은 보좌관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찰스 2세의 중얼거림을 듣고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물품 중 이 정도 수준의 최고급 물품이 몇 점 더 있다고 알리자 찰스 2세는 활짝 웃으며 시종에게 다른 물품도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찰스 2세는 시종이 다른 도자기를 가져올 때까지 보좌관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은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

“예정대로 최고급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들은 모두 판매해 판매대금 일부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권을 갖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나누어 줄 예정입니다.”

그 말에 찰스 2세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막상 저걸 보니 최고급품이 아니라 해도 파는 것이 좀 아깝긴 한데...이미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러도록 하게.”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국왕 폐하.”

찰스 2세의 결정에 보좌관은 안도하면서 곧바로 클레멘트가 가지고 온 조약문을 찰스 2세에게 바쳤다.

“아. 이게 그 조약문인가?”

“그렇습니다.”

찰스 2세는 조약문을 슬쩍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 조약으로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만큼 설탕과 담배 등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서인도 제도로 국한된 셈인데...북아메리카 주민들의 이주는 어떻게 되었나?”

“6만 명 가까운 주민이 국왕 폐하께서 마련해주신 배를 타고 서인도 제도 전역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보좌관의 말에 찰스 2세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자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주한 덕분에 서인도 제도 각 섬의 개발이 더욱 빨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조약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해체했지만, 실질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찰스 2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땅의 크기나 확장성을 생각하면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땅이었기에 이를 북미왕국에 넘겨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은 조약이라고 생각한 찰스 2세는 조약문을 탁자에 내려놓고 보좌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조약으로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했는데...이 북미왕국을 어떻게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뜬금없는 찰스 2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보좌관은 찰스 2세의 뜻을 눈치채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설마 서인도 제도에서의 영역 확장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렇지. 다만 에스파냐와 서인도 제도에서 단독으로 싸우는 것은 좀 부담스러우니 북미왕국을 끌어들였으면 하는데...”

이에 보좌관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서인도 제도의 확장에 북미왕국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려울 듯 보입니다. 일단 북미왕국과 에스파냐의 관계는 나쁘지 않으니까요.”

“흠...저들은 멕시코 지역엔 관심이 없다던가?”

찰스 2세는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고 에스파냐를 공격해 북미왕국은 멕시코 지역을, 그리고 잉글랜드는 쿠바를 비롯한 서인도 제도의 여러 섬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듯싶었지만, 보좌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저들이 주장하는 북미 지역과 멕시코 지역은 문화적으로 조금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이번에 확보한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군.”

자신의 말에 찰스 2세가 수긍하긴 했지만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기에 보좌관은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미 프랑스와 밀약을 맺고 곧 네덜란드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하니 일단 그 문제는 조금 미뤄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도버에서 밀약을 맺었고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함께 개전하기로 이미 약속해둔 상태였다.

이것을 상기시키자 찰스 2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역시 당장은 어렵나. 알겠네. 그럼 일단 네덜란드와의 전쟁 이후에 고민해봐야겠군. 다만 클레멘트에게 이야기는 해 두게. 북미왕국을 우리 쪽으로 끌어 들여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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