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이미 잉글랜드에서 공고했던 날짜가 지난 후 다시 북미왕국의 선박이 보인다는 소리에 뉴욕의 주민들은 다들 선착장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기묘한 선박들이 천천히 선착장에 정박하는 모습을 본 큰 키의 중년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전엔 정박하지 않고 주변 해역만 탐사하고 그냥 떠나더니...”
그 말에 함께 술을 마시다 선착장으로 나온 새치가 가득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뭐 그때까지야 잉글랜드의 식민지였으니까. 지금은 온전히 북미왕국의 땅이 되었고. 그리고 그때 저들이 함대를 끌고 올라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꽤 시끄러웠을 테니 뭐...”
“하긴...”
이 뉴욕 식민지의 주민들 역시 버지니아의 소식을 듣고 동요하긴 했었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던 자들도 있었고.
물론 그런 자들은 북미왕국의 함대를 목격한 후 조용히 입을 닫고 잉글랜드의 배를 타고 서인도 제도로 떠났지만 말이다.
“그보다 이제는 저들이 어떤 식으로 이곳을 통치할지 알 수 있으려나?”
“그러게. 알려진 거라곤 이 모든 땅이 원칙적으로는 북미왕국의 소유라는 것과 당분간 외국 선박은 이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방문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니...어? 저기 봐. 북미왕국 사람들이다.”
북미왕국의 선박들이 선착장에 정박한 후 마침내 북미왕국인이 선착장에 내리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큰 키의 중년 사내는 선착장에서 내려 주변을 확보하는 북미왕국인들을 보며 말했다.
“음...전에도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고 느낀 거긴 한데...확실히 저들은 인디언들과는 좀 다르네.”
그 말에 새치가 가득한 사내가 잠시 눈을 찌푸리며 북미왕국인을 바라보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다들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을 보면...복식도 그렇고.”
“인디언들의 전통 복식과는 거리가 멀고...오히려 우리들의 복식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아?”
“어? 듣고 보니 그런데?”
큰 키의 중년 사내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피부나 눈동자 색은 인디언들과 비슷해도 복식은 인디언들보다는 오히려 자신들과 비슷했기에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한 새치가 가득한 사내였다.
다만 북미왕국은 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유럽과는 교류가 없었기에 자체적으로 문화가 발전하면서 일어난 신기한 우연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넘긴 새치가 가득한 사내는 오와 열을 맞추어 대열을 이루고 움직이는 북미왕국인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보다...통일된 복장에 들고 있는 머스킷까지...아무래도 북미왕국의 병사들 같지?”
“그러네. 허. 북미왕국의 군사력이 대단하다더니...잉글랜드는 이곳에 주둔군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었잖아?”
잉글랜드는 식민지의 방어는 일단 식민지 주민들에게 맡겼지 북미왕국처럼 병사들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가 보내는 병사라고 해 봐야 본국에서 임명한 총독과 총독부를 지키는 병사들이 다였달까.
헌데 북미왕국은 딱 봐도 수백 명의 병사가 배에서 내리고 있었으니 큰 키의 중년 사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잉글랜드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잉글랜드는 이곳에 병사를 파견하려면 대서양을 건너야 했지만, 북미왕국은 일단 같은 대륙이니 잉글랜드보다야 부담은 덜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담긴 새치가 가득한 사내의 말에 큰 키의 중년 사내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저들을 보니 이곳에만 병사를 배치하진 않았을 것 같고...결국, 북미왕국은 이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을 완벽히 장악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남은 이상 우리도 이젠 북미왕국의 백성이라지만...북미왕국 관리들이 보기엔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외지인이자 이주민에 불과할 테니까. 거기에 남쪽의 멍청이들이 사고를 치기도 했었고. 다만 저렇게 많은 병사를 보낼 줄은 몰랐는데...”
“젠장. 그놈들 때문에 우리까지 피해를 보게 생겼으니. 쯧.”
큰 키의 중년 사내가 버지니아 주민들에게 투덜거리자 새치가 가득한 사내도 이에 공감하면서 선착장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북미왕국 병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병사들이 절도가 있고 눈빛이 예리한 게 정예병인 것 같으니 저들이 우리를 탄압한다 해도 함부로 덤비기도 어려워 보이고...역시 떠났어야 했나?”
이들은 네덜란드 출신의 이주민으로 네덜란드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했을 때 이곳으로 이주한 자들이었다.
그러다 잉글랜드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잉글랜드의 식민지 주민이 되었고.
그렇기에 이들은 이 지역이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이야기에도 굳이 이곳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북미왕국은 이곳에 총독과 그를 호위할 병사만 보내서 적당한 이익을 취하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잉글랜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새치가 가득한 사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큰 키의 중년 사내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배는 떠났으니 이미 늦었지 뭐. 그저 저들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길 바랄 수밖에.”
“쩝...”
* * *
매사추세츠의 한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잭은 갑자기 선술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제이콥을 보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봐! 잭!”
“응? 제이콥? 왜? 무슨 일 있어?”
제이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선착장 근처에 북미왕국의 관리가 포고문을 붙였대!”
며칠 전 이곳 매사추세츠에도 북미왕국의 군함들이 선착장에 도착해 병사와 물자들을 하역하기 시작했다.
이에 잭과 제이콥은 선착장 근처까지 나가 그 광경을 구경했었고.
그리고 곧 북미왕국의 관리들이 주민들에게 북미왕국이 이곳을 어떻게 통치할지 이야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북미왕국의 관리와 병사들은 일단 보스턴 외곽의 공터에 자신들의 주둔지를 건설하는 데에 전념했고.
이 때문에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진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이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그렇기에 잭뿐만 아니라 선술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다른 자들도 제이콥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제이콥을 바라보았다.
“헉! 정말? 자세한 내용은?”
제이콥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공고 붙었다는 소식에 바로 온 거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보자!”
“알았어.”
잭은 자리를 박차고 달렸고 선술집에 있던 자들도 술잔을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잭은 제이콥과 함께 선착장으로 달리다가 선착장 주변 인파를 확인하고 멈추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러게. 그리고 분위기가 좀 묘한데?”
확실히 제이콥의 말대로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묘했다.
북미왕국의 포고문이 붙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중심부는 고함이 들리는 등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환호했으며 누구는 울상을 하고 인파를 비집고 선착장 주변에서 나와 외곽으로 달려나가는 등 확실히 분위기가 묘했기에 잭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그러한 광경을 보고 한쪽에서 혀를 차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혹시 북미왕국이 내건 포고문의 내용을 아십니까?”
담배를 피우던 노인은 잭의 말에 살짝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세...나도 포고문을 보기보단 저 앞쪽에서 들려온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라 정확하진 않은데...”
“그거라도 좋으니 괜찮으시면 말씀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인파를 뚫고 다가가긴 쉽지 않아 보여서요.”
잭이 다시 한번 부탁하고 잭의 뒤에 있던 제이콥마저 부탁하자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네. 잉글랜드 관리들이 써놓은 포고문과 거의 비슷했지.”
노인의 말에 잭은 갸우뚱했다.
정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면 이런 분위기가 나올 리 없었으니까.
“그래요? 헌데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다만 몇 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었거든. 이건 좀 의외인데...북미왕국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음? 그럼 다들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데 분위기가 좀...”
이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주민 중 상당수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만큼 오히려 북미왕국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분위기는 훨씬 좋았어야 했다.
“그게...북미왕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오히려 선교를 제한하는 법들이 있어서...”
그러면서 노인은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잭과 제이콥은 이를 집중해서 듣고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잭이 중얼거렸다.
“아...종교의 자유가 말 그대로 개인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자유일 뿐이지 교단에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군요.”
“그렇지. 다만 몇몇 독실한 청교도들이나 목사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과 거의 흡사한 내용이라 오히려 반기고. 몇몇 목사들은 종교 건물 밖에서 선교하지 못하니 제약이 너무 심하다며 이건 말만 종교의 자유라고 불평을 토해내고...목사들의 반응에 따라 주민들도 이에 동조하는 판국이라...”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제이콥이 말했다.
“그래서 포고문 근처가 저렇게 소란스러운 거군요?”
“그렇지.”
몇몇 목사들은 자신의 의지 없이 아기일 때 세례를 받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려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기에 이런 북미왕국의 방침은 오히려 환영할 만했다.
다만 모든 목사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고 종교 건물 밖에선 선교할 수 없다는 말에 자신들의 영향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고.
하지만 잭이나 제이콥은 독실한 신자도 아니었기에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급히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다른 내용은 또 없습니까? 땅에 관련된 얘기라던가...”
“아. 그 부분은 잉글랜드 관리들이 붙였던 포고문대로네. 원칙적으로 이 대륙의 땅은 모두 북미왕국의 소유라고. 그렇기에 우리에겐 땅에 대한 소유권은 없고 다만 경작권만 있다고 하더군.”
노인의 말에 잭과 제이콥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포고문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했었으니까.
“경작권이라...뭐 모든 땅이 북미왕국의 소유라는 말에 짐작은 했지만...쩝. 그럼 북미왕국이 우리의 지주가 되는 셈인데 소작료나 세금은 얼마나 내야 한답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기존의 땅을 이용할 수는 있는 거랍니까? 또 경작권만 준다면 집이나 이런 문제는...”
잭이 계속 묻기 시작하자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잭의 말을 막았다.
“아. 그건 나도 모르지. 자세한 사항은 북미왕국 관리들이 이곳의 실상을 확인하고 다시 공지할 거라고만 쓰여 있다던데?”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는 말에 실망한 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끙...그래요? 그 외에는요?”
“아. 그리고 북미왕국에선 북미왕국의 국왕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더군.”
“그건...”
잭이 놀란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북미왕국에선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지.”
노인의 말에 잭과 제이콥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이콥은 다행이라고 안도했고 잭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하. 이거 봐. 혹시 모르니 안 사길 잘했지?”
“허. 그렇네. 샀으면 손해 볼 뻔했네.”
이곳 매사추세츠에 흑인 노예는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들은 본국이 북미왕국에 식민지를 팔아넘겼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산을 정리하면서 이 흑인 노예들도 팔았고.
헌데 북미왕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며 당분간 외국 선박은 이곳에 방문하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당분간 인력 수급이 어려울 거라 예상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흑인 노예를 사려고 했고 덕분에 대지주들은 흑인 노예를 팔아 쏠쏠한 이득을 챙기고 떠날 수 있었다.
제이콥 역시 식민지 주민들이 빠져나가고 빈 농장을 차지할 생각이었기에 비싼 값을 주고 흑인 노예를 사려 했지만, 이를 듣고 잭은 혹시 모른다면서 이를 만류했기에 사지 않았고 덕분에 손해를 면할 수 있었기에 무척 안도한 표정이었다.
노인은 잭과 제이콥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끌끌 거리며 부연설명을 했다.
“그나마 북미왕국은 최소한의 융통성은 있는 듯 보이네. 무조건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령하기보다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면 노예를 데리고 북미왕국 병사들의 주둔지로 오라고 쓰여 있다더군. 북미왕국에서 노예를 사들여 해방하겠다면서. 뭐 그래 봐야 손해겠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겠어. 다만 이 예산이 풍족하지 않다면서 나중엔 어음 따위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말에 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렇군요. 어쩐지 이곳에 올 때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외곽으로 달려가던 농장주들이 몇 보이긴 했는데 그 때문이었군요.”
“그 외에는 중요한 이야기는 딱히 없었네. 위생과 청결을 신경 쓰라던가 등등의 말이 있지만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서 할 말이 끝났다는 뜻으로 새 담배를 입에 무는 노인이었고 제이콥은 잭을 보면서 말했다.
“대략적인 포고문인가 본데?”
“그러게. 다행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병사가 외곽에 주둔한 상황이라 조금 강압적으로 통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종교 문제도 그렇고 노예 문제도 그렇고 북미왕국은 의외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느낌이야.”
잭의 말에 제이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지. 확실히...”
“그러니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고되지 않았지만 땅 문제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무조건 우리가 경작하던 땅에서 내쫓진 않을 것 같아.”
잭의 말에 제이콥은 조금은 불안감이 가신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리고 잭은 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는데 덕분에 저 인파를 비집고 들어갈 이유는 없어졌네요. 설명하느라 고생하셨으니 목이라도 축일 겸 주점에 가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저희가 사지요.”
“크흠. 뭐 그렇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