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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63화 (263/850)

263화

정성국은 예정도 없이 갑작스럽게 방문한 조용한 곰의 상기된 표정을 보고 혹시나 싶었다.

이미 10월 중순이 넘었고 조용한 곰이 저런 표정을 지으며 나타날 일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정성국의 예상대로 빠르게 정성국에게 다가와 숨을 고른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전하. 새진주에서 급보가 올라왔습니다.”

“오! 드디어?!”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정식으로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제 북미 동해안 지역은 우리 북미왕국의 영역이 되었다는 웅크린 늑대의 연락입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들고 왔던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넸고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고 빠르게 읽어본 후 정식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이미 역사가 바뀌었지만, 전생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에게 미국은 정말로 대단한 국가였고 그렇기에 이 북미 동해안에 건설된 잉글랜드의 식민지는 당장은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정성국이 보기엔 그 어떤 나라보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식민지는 해체되었으며 이곳의 영토는 공식적으로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곳에 남은 주민들은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셈이라 더는 그 미국이 탄생할 수 없는 셈이었으니 정성국은 묘한 감흥에 빠졌다.

하지만 바로 앞에 조용한 곰이 있었기에 정성국은 표정을 관리하며 이번 협상을 주도한 외무청에 공을 돌렸다.

“하하하. 뭐 이번 건은 외무청의 공이 컸지. 그보다 조약 일자가 조금 앞당겨졌네? 원래는 10월 초에 하기로 한 것 아니던가? 어쩐지 예상보다 조금 이르게 소식이 전해졌다 했더니만...”

보고서 중간에 첨부된 웅크린 늑대가 서명한 조약문 원본에 적힌 날짜를 보고 정성국이 말하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아마 웅크린 늑대는 굳이 시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어차피 잉글랜드의 사절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새진주에 왔는데 굳이 조약 체결을 미룰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하긴. 뭐...”

조용한 곰의 말에 수긍한 정성국은 계속 보고서를 넘겼다.

그리고 요약된 북미 동해안 지역의 정보들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 이건 좀 의외인데? 원래 북미 동해안에 거주하던 잉글랜드인이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고?”

웅크린 늑대가 클레멘트에게 받은 자료에 따르면 조약을 맺기 전 북미 동해안 지역에 건설되어 있던 9개의 식민지의 인구는 약 9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는 정성국의 예상보다 적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미국이 독립했을 1780년경의 인구가 대략 250만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물론 이는 계속해서 식민지의 영역이 확장되고 식민지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계속 이주민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고려해서 정성국은 현 북미 동해안 지역에 사는 잉글랜드인을 대략 10만에서 15만 정도로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정성국의 반응에 공감한 조용한 곰은 입을 열었다.

“예. 저희의 예상보다도 적었습니다. 웅크린 늑대의 보고로는 잉글랜드 본국에서는 북미왕국의 존재를 파악한 이후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주를 제한했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요즈음엔 이주민이 거의 없었답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야 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수긍했다.

북미왕국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었고 그 5년간 이주민을 제한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다만 인구가 생각보다 적어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리고 보고서 밑에 적힌 숫자를 보고 정성국은 탄식했다.

“허. 남은 인원이 고작 3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라니.”

이 북미 동해안의 원주민들이 많다면야 큰 상관은 없겠지만 서양인들이 이 신대륙에 정착한 이후로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의 수는 전염병과 분쟁으로 인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북미 동해안 지역의 발전은 잉글랜드인의 역할이 꽤 중요했는데 남아있는 잉글랜드인이 고작 3만 명이라는 보고에는 조금 낙담할 수밖에 없는 정성국이었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강압적으로 나가지 말 걸 그랬나? 적당히 정보도 좀 풀고? 너무 잉글랜드인이 많은 것도 부담스러워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추었더니만...’

그리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살짝 당황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예상보다 적어서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는 것은 한층 수월할 것 같습니다.”

정성국은 그런 조용한 곰의 대답에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털어버리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보고서의 상세한 수치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흐음...다른 지역은 대부분 주민의 절반 정도가 이주한 셈인데...버지니아만 텅 비어버린 셈이군.”

“예. 그렇습니다. 우리 북미왕국에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진 않았습니다만...이들은 이미 북미왕국에 대항하려 했기에 제임스타운 외곽에 탐사대가 주둔한 것에 지레 겁먹고 떠난 듯 보입니다. 탐사대의 보고 내용도 비슷하고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혀를 찼다.

“쯧쯧. 아깝네.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 이 두 곳이 가장 사람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매사추세츠가 북부의 중심지였다면 버지니아는 남부의 중심지나 다름없었다.

두 지역 모두 초창기에 식민지가 건설되었기에 역사도 깊었고 그 때문에 이 두 식민지의 주민이 전체 식민지 인구의 4할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조약 전 2만이 넘는 주민 수를 자랑하던 버지니아가 조약 후엔 인구가 고작 천명 남짓으로 추정되었으니 버지니아 지역은 거의 텅 비어버렸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이에 아쉬워 투덜대는 정성국이었고 조용한 곰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버지니아 주민들은 북미왕국에 대항하려 행동한 자들인지라...괜히 저들이 남았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성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세...어차피 무장을 해제한 상태고 이미 2함대와 탐사대의 무력시위를 보고 기가 잔뜩 죽은 상황이었다면서? 그런 주민들이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 같은데...뭐 이미 떠난 자들이니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보다 생각보다 잉글랜드인의 수가 적어서 아무래도 외무청이 고생해야 할 것 같아.”

이미 떠난 잉글랜드인을 아쉬워 해봐야 그들이 돌아오진 않을 테니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고 그 대안은 북미 동해안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원주민밖에 없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이에 조용한 곰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꽤 많은 외무청 관리들이 새진주에 도착해 있고 경비대와 함께 각 지역으로 이동해 주변 원주민과 접촉할 예정이니까요. 다만...생각외로 원주민의 수가 많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메타코멧은 새진주에 도착해 외무청 관리의 도움으로 새진주 곳곳을 돌아다녔다.

조선소에서 자신이 타고 왔던 거대한 배를 건조하는 모습도 보았고 외곽의 훈련소에서 땀을 흘려가며 훈련에 매진해 병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감명 깊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원래부터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아닌 자신처럼 이 지역의 원주민에 불과했고 북미왕국에 합류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메타코멧은 왐파노아그 족 역시 북미왕국에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메타코멧이 서양인들의 복식과 관습을 받아들였던 것도 서양인들의 문물을 받아들여 왐파노아그 족을 바로 이렇게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었기에 굳이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자신이 북미왕국 배에 올라탄 후 자신의 곁에 붙어 여러 이야기를 해주던 이 외무청 관리도 사실은 조그마한 부족의 추장이었고 북미왕국에 합류한 후 교육을 받아 이렇게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로 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후 메타코멧은 웅크린 늑대와 만나 북미왕국으로의 합류 의사를 밝혔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과 우호적인 부족을 설득해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키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주변 부족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까지 털어놓았고.

이 내용은 외무청을 통해 조용한 곰에게 보고되었는데 최소한 북미 동해안 북부 지역의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의 예상보다 더 인구가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는 북미 동해안 남부 지역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조용한 곰이 이를 언급하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 더욱 많은 원주민 부족들을 북미왕국에 합류시켜야 해.”

“알겠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조금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그리고...다른 지역보다 북쪽에 자리한 원주민 부족들과의 접촉을 더욱 신경 썼으면 하네.”

갑작스러운 정성국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조용한 곰은 이내 북부 지역에 있는 세력을 떠올리며 말했다.

“음? 아...프랑스 때문입니까?”

이에 정성국은 살짝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프랑스 문제도 있긴 하네만...그보다는 우리에게 호의적인 메타코멧과 왐파노아그 부족 때문이네.”

“예? 그게 무슨...”

조용한 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정성국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메타코멧과 왐파노아그 부족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이들이 우리에게 호의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의 적은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겠나?”

정성국이 알기로는 왐파노아그 족을 비롯해 그들과 친한 부족은 대부분 알곤킨 어를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 알곤킨 어를 사용하는 부족과 전통적으로 적대해온 자들이 바로 이로쿼이 연맹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필립왕 전쟁에서 잉글랜드를 도와 왐파노아그 족을 공격했던 원주민 부족 중 하나가 바로 이로쿼이 연맹의 하나인 모호크 족이기도 했고.

그리고 이 이로쿼이 연맹이 7년 전쟁에서 잉글랜드를 도운 이유도 알곤킨 어를 사용하는 주변 부족들이 대부분 프랑스와 동맹이었기에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동맹 부족과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잘못했다간 이로쿼이 연맹이 북미왕국을 위협으로 생각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북미 동해안 지역의 인구가 적은 판국에 이로쿼이 연맹과 싸우고 싶지 않은 정성국이었다.

이런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하긴. 원주민들은 부족 간의 다툼이 좀 있는 편이었지요. 그리고 외무청을 통해 올라온 보고에는 분명 왐파노아그 족과 우호적인 부족도 다수 존재하지만, 이들과는 적대적인 부족도 몇 있었으니 전하의 걱정이 기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접촉해 협상으로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네. 뭐 어차피 당분간 내륙으로 진출할 생각은 없으니 굳이 왐파노아그 족과 적대적인 부족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킬 필요까지야 없네만...”

어차피 이로쿼이 연맹은 오대호 인근의 내륙 부족이었고 아직 북미왕국은 그곳까지 진출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오대호 인근의 여러 자원, 특히 풍부한 철광석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급한 것은 아니었고 당장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급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이들이 프랑스에 붙기라도 하면 골치 아팠기에 이것만은 막으라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저들과 접촉해 현 상황을 설명하고 저들이 우리를 적대하는 것은 막아보겠습니다.”

“음.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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