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더위가 한풀 꺾여 다행이라고 생각할 무렵 군사청장이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정성국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전하. 새진주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정성국은 서류를 확인하다가 군사청장의 보고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음? 그래? 2함대의 보고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버지니아의 주민들이 북미왕국에 대항하려 버지니아 총독부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는 소식과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2함대와 탐사대가 버지니아로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정성국은 군사청장에게 보고서를 받아들면서도 슬쩍 군사청장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군사청장의 얼굴은 밝은 편이었기에 정성국은 안심하고 천천히 김봉길이 작성한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아...다행히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한 모양이군.”
“예. 참으로 다행이지요.”
군사청장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세한 상황이 담긴 보고서를 확인하며 정성국은 버지니아 주민들의 행동이 안타까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탐사대의 무력시위에 저항 의사를 접었다라...이럴 거면 대체 왜...”
그 말에 군사청장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저들은 정말로 우리가 원시적인 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굳게 믿었나 봅니다.”
“그런가 보군. 만 오천 발의 탄환으로 굴복한 셈인가.”
“싸게 먹힌 셈이지요.”
군사청장의 대꾸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호 탐사대장의 명령은 당시 상황에서 아주 효과적이었고 덕분에 양측 모두 큰 피해 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성국은 김봉길의 보고서를 계속 확인하다가 2함대가 뉴펀들랜드 섬에 도착해 주변 상황을 파악한 내용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흠...뉴펀들랜드 섬의 시설이 무척 열악하다라...”
뉴펀들랜드 섬은 제대로 된 주민 없는 만큼 당분간은 군사청의 관리해야 했기에 군사청장이 급히 입을 열었다.
“기지뿐만 아니라 조업을 하기 위해 드나드는 서양인들이 이용하는 시설까지 생각하면 분함대의 병사들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김봉길 함대 사령관과 이정운 함대 부사령관의 공통된 판단입니다. 해서 김봉길 함대 사령관이 새진주의 개발청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라더군요.”
그 말에 정성국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뭐...그런 상황이라면 새진주의 개발청에서도 지원해주겠지. 다만 생각보다 많은 물자가 소모될 것 같으니 개발청장과 관리청장에게 언질은 해두게.”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던 정성국은 2함대가 남하하던 도중 왐파노아그 족의 추장인 메타코멧이 2함대에 접촉했다는 부분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허. 왐파노아그 족의 추장이라...어라?”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군사청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정성국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아!”
하지만 군사청장의 의아한 표정에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닐세.”
그러면서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왐파노아그 부족이면 바로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그 부족이잖아? 그럼 이 메타코멧이 바로 그 필립왕이구나. 왐파노아그 족의 마지막 추장인...’
보고서에 적힌 대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플리머스에 정착한 잉글랜드인들은 굶어 죽을 판이었고 이때 왐파노아그 부족이 도와주어 전멸할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왐파노아그 족이 옥수수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최초로 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잉글랜드인들은 이 기념할만한 첫 수확에 감사하며 조촐한 축제를 열고 자신들을 도와준 왐파노아그 족을 초대했다.
이에 왐파노아그 족은 야생 칠면조, 사슴 등을 잡아 함께 나눠 먹으며 축제를 즐겼고.
그것이 바로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정착을 도와준 왐파노아그 족을 50년이 지난 후 멸족시켜 버렸고 말이다.
아무튼, 정착 초기에 왐파노아그 족은 잉글랜드인과 우호적으로 지냈고 메타코멧의 경우도 처음엔 서양의 복식과 관습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기에 유럽인들은 메타코멧을 필립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기억한 정성국은 김봉길이 첨부한 메타코멧의 이야기를 유심히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아직 왐파노아그 족은 괜찮구나. 다행이네. 북미왕국의 등장으로 역사가 틀어질까 걱정했는데.’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4년 후인 1675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언이 피살당하면서 잉글랜드인들은 이를 메타코멧의 부하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사형을 선고한다.
당연히 메타코멧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메타코멧은 약 40년 전 비슷한 흐름으로 일이 진행되어 이를 빌미로 피쿼트 족을 야간 기습에 몰살시키고 땅을 차지한 잉글랜드인들의 전적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주변 부족들과 함께 대규모 전쟁을 벌였고 이것이 바로 필립왕 전쟁이다.
초기엔 게릴라 전술로 재미를 보았지만 계속해서 밀린 잉글랜드인들이 왐파노아그 족과 적대적인 부족을 설득해 전쟁에 끌어들이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결국 인디언 연맹은 패배한다.
이 패배로 잉글랜드인에 협력한 몇몇 부족 외엔 거의 학살당하고 아이와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나가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의 원주민 수는 약 70프로 가까이 급감하고.
정성국은 이 필립왕 전쟁을 뉴잉글랜드 지역의 마지막 대규모 인디언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북미왕국의 등장으로 변수가 발생해 앞당겨질까 걱정했는데 보고서를 확인하니 오히려 원주민들에겐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잉글랜드인이 정착한 지역은 다 비슷하군. 여기 적힌 내용 말고도 전에 외무청에서 알게 된 버지니아 지역의 포우하탄 족도 비슷한 방식으로 몰락한 것 같은데...”
이에 군사청장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라 좀 그렇지요.”
“그나마 이 메타코멧 추장 덕분에 오히려 북쪽의 원주민들의 북미왕국 합류는 생각보다 빠를 것 같군.”
보고서에는 메타코멧이 북미왕국에 무척 우호적이라는 것과 메타코멧이 주변 원주민 부족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쓰여 있었기에 정성국이 말하자 군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세한 보고는 외무청을 통해 따로 올라오리라 생각합니다만...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성국은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다가 중얼거렸다.
“흐음...목사가 왕이나 다름없다라...”
“예. 전 그 부분이 조금 걸립니다만...”
정성국의 중얼거림에 군사청장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정성국은 내용을 다 살펴본 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엔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보네. 분명 목사들의 영향력은 크지만...그렇다고 목사들의 명령으로 북쪽의 식민지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 북미왕국에 대항하진 않을 거야. 그러고 보면 웅크린 늑대나 김봉길이 판단을 잘 했어. 올라간 김에 북미 동해안의 해안가를 따라 올라가며 미리 북미왕국의 국력을 과시한 셈이니 말이야.”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오히려 군사청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으음...그렇게 판단하십니까? 하지만 전하께선 예전에 서양인들은 종교 때문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기도 했다고...”
“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온 자들은 좀 다르다고 보네. 분명 이들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으니 우리에 맞서 싸울 수도 있어 보이지만...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본국에 남아 투쟁할 때 도피한 셈 아닌가.”
“아...?”
“그러니 북미왕국의 함대를 목격하고...또 북미왕국의 경비대가 주둔하면 별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을걸세. 아니. 어쩌면 2함대를 목격한 후 다시 떠날지도 모르겠군.”
정성국의 말에 군사청장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까요?”
정성국은 별말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도 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경우는 목사들의 영향력이 무척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초기엔 신정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엄격한 교리에 지치거나 머리가 깨인 주민들은 목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게 이즈음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본 것이다.
더불어 한 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목사들이 감히 북미왕국에 대항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목사들이 다 떠나는 게 편하긴 하지만...뭐 남는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법을 따라야 하니 큰 문제는 없겠지. 이들이 걸려 이 지역에 더 많은 경비대를 배치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마지막 보고서를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아. 이번에 창설될 4함대의 모항은 결국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정한 모양이군.”
북미 동해안을 실제 확인한 이정운은 고민 끝에 결국 새로 창설될 4함대의 모항을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인근으로 정했다.
4함대의 규모는 큰 편이었고 정성국은 의도적으로 2, 4함대의 규모를 키울 생각이었기에 기지를 건설할 인부를 모집하는 일이나 물자 보급 문제 때문에 보스턴 인근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김봉길 사령관의 보고를 살펴보니 버지니아의 지형도 무척 좋다더군요. 거대한 만도 존재하고. 하지만 4함대의 주 임무와 분함대의 지원을 생각하면 너무 남쪽이라 결국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전생의 세계 최대의 해군 기지였던 노퍽 해군 기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 괜히 그 지역에 해군 기지를 세운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겠지. 훗날에는 오히려 2, 4함대를 통합해서 이 버지니아에 모항을 두는 것도 나쁘지야 않겠지만...그건 너무 먼 미래의 일일 테고. 당장은 이 매사추세츠도 나쁘진 않아. 아무튼, 걱정하던 문제는 잘 풀렸으니 빨리 조약을 체결했으면 좋겠군. 이미 처음 배치되는 경비대는 새진주에 가 있지?”
이미 9천의 경비대가 새진주로 이동한 상황이었기에 군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약이 체결되면 곧바로 창설되는 4함대에 의해 각 식민지로 이동하기로 되어있습니다.”
“다행이군. 당분간만 고생해주게.”
“물론입니다.”
* * *
버지니아의 주민들을 서인도 제도로 이주시키는 데 전념했던 클레멘트가 9월 말에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새진주를 방문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이미 새진주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조약을 체결하면 잉글랜드에 넘겨 줘야 하는 물품들을 보여주었고.
이를 확인한 클레멘트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값비싼 북미왕국 산 도자기와 모피 등이 들어있는 나무 상자가 가득했으니 말이다.
“이 창고에 있는 것이 전부...?”
“그렇습니다. 조약을 체결하면 이 창고에 있는 물품들은 모두 귀국의 것이죠.”
“허어...”
클레멘트는 감탄하며 창고를 둘러보았고 웅크린 늑대는 그런 클레멘트에게 물품을 정리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물량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알겠습니다.”
클레멘트는 창고까지 함께 온 선원들에게 눈짓했고 선원들은 창고에 가득한 나무 상자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는 황홀한 표정으로 견본품으로 꺼낸 도자기를 바라보던 클레멘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보다 그쪽도 넘겨주실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에 정신을 차린 클레멘트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 웅크린 늑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 물론 가져왔습니다. 이건 대략적으로 식민지 상황을 정리해 요약한 문서입니다. 자세한 서류들은 조약 체결 후 드리지요.”
웅크린 늑대는 서류에 적힌 수를 확인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생각보다 식민지에 살던 잉글랜드인이 많지는 않았군요?”
클레멘트가 건네준 서류에는 원래 각 식민지에 거주하던 주민의 수와 이주 작업이 끝난 후 남아있는 잉글랜드인의 수가 대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헌데 북미왕국이 예상한 것보다 적었기에 웅크린 늑대가 말하자 협상 당시 이곳의 인구가 무척 많다고, 아무리 북미왕국이래도 이곳을 장악하려면 고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클레멘트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하하하. 그 정도면 많은 편이죠. 그리고 제대로 확장하려고 이주민을 대규모로 보내려는 시점에서 귀국의 존재와 아카풀코 조약이 알려져서요. 그 때문에 아국은 귀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이주를 제한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생각외로 잉글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떠났고요.”
의외로 북미왕국은 이곳에 정착한 잉글랜드인을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려는 뜻을 밝혔기에 이를 얼버무릴 수 없었던 클레멘트는 웅크린 늑대를 보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일이 식민지 전체에 퍼지면서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주에 적극적이지 않던 주민들은 그동안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잘 되었지요. 그들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크니까요.”
“흐음...”
그때 창고를 확인하던 잉글랜드 선원들이 클레멘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래? 수량은 맞나?”
“일단 여기에 적힌 상자의 수는 맞습니다. 다만 모든 상자를 열어본 것은 아닙니다만...”
선원의 말에 클레멘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럴 필요까진 없네. 북미왕국에서 장난할 이유가 없지.”
그 말에는 선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처럼 부유한 국가가 뭐가 아쉽다고 장난을 치겠는가 싶어서.
클레멘트는 그때까지 미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웅크린 늑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된 거 오늘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왠지 모르게 웅크린 늑대는 식민지에 남기로 한 잉글랜드인의 수가 적어 불만인 듯 보였기에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클레멘트였다.
그러한 클레멘트의 제안에 웅크린 늑대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조약을 파투낼 수야 없는 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어차피 조약문이야 다 작성해두었고 서명만 하면 그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