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한참 의용병들을 통제하는 데 여념이 없던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는 북미왕국의 기병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일단...우리를 공격할 의사는 없는 걸까?"
저들은 기병이었고 곧바로 자신들을 향해 돌격했다면 자신들은 아마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몰살당할 뻔했다.
강에 건넌다면 살 수는 있겠지만 저 넓은 폭의 제임스 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고.
헌데 저들은 자신들을 발견한 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으니 안도하면서도 저들의 의도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베이크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베이크는 저들이 준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일단 최소한의 방비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베이크는 소리쳤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보다 아직도 대열을 갖추지 못한 거야?"
베이크의 말을 듣고 갈색 머리의 청년이 다가와 말했다.
"거의 다 됐어. 베이크.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
"어어!"
"북미왕국의 기병들이 움직인다!"
그때 의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베이크와 일당들은 의용병들을 통제하다 말고 급히 시선을 북미왕국의 기병들에게 옮겼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자신들을 보고 대기했던 북미왕국의 기병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면서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변경해 일자로 죽 늘어선 북미왕국의 기병들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꽤 있었기에 마치 막대처럼 보였고 이를 창으로 생각한 한 의용병이 소리쳤다.
"일자로 늘어섰어! 설마 창을 들고 돌격할 셈인가?"
북미왕국 기병들의 움직임에 잔뜩 긴장하던 의용병들은 그 말에 다시 혼란에 빠졌다.
"맙소사!"
"으악!"
이에 베이크 일당과 의용병 지휘부는 급히 의용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러는 사이 북미왕국의 기병들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아직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지만, 북미왕국 기병들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베이크는 입술을 깨문 후 소리쳤다.
"젠장. 일단 사격 준비해! 사격 준비!"
다행히도 베이크의 명령에 베이크 일당과 의용병 지휘부는 벌벌 떠는 의용병들을 다그쳐 사격을 준비하게 했다.
그나마 북미왕국의 기병들은 꽤 떨어져 있었기에 저들이 돌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방금 사격한 대로 행동하라면서.
더불어 퇴로가 없으니 제대로 사격해서 저들을 무찌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첫 실전의 긴장감과 죽 늘어선 북미왕국 기병들의 위압감에 손을 벌벌 떠느라 화약을 총구에 제대로 집어넣지도 못하던 의용병들은 곧 하나둘 발사 준비를 끝냈다.
"아직 발사하지 마! 우리가 명령을 내리면 일제히 발사하는 거다! 절대 마음대로 발사하지 마!"
의용병 지휘부가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치고 있었기에 의용병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빨리 지휘부의 사격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북미왕국의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베이크는 주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직이야! 기다려! 50야드! 50야드가 되면 사격 명령을 내릴 거야! 한 번에 최대한 많은 기병을 맞춰야 해! 조금만 기다려!"
베이크의 말을 듣고 베이크 일당과 의용병 지휘부는 이를 전달하면서 의용병들에게 계속 소리 지르며 함부로 발사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때였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탕!'
멀리서 들려오는, 하지만 아까 자신들이 훈련 당시 경험했던 소음과는 차원이 다른 총성에 의용병들은 기겁했다.
"헉!"
"뭐야!"
"저들이 쏜 거야?"
의용병들을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베이크 일당과 의용병 지휘부마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북미왕국의 기병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창이 아니었어?"
"일반 기병이 아니다! 용기병이야!"
"맙소사!“
북미왕국의 기병들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자 의용병들은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기병들은 의용병들에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탕!'
채 10초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평원을 가득 메우는 총성에 의용병들은 당황을 넘어 혼란에 빠졌다.
"헉!"
"어...어떻게?"
"교대로 발사한 건가?"
두 번째 사격 후 베이크는 무척 당황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미왕국 기병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멀리서 북미왕국의 기병들은 사격 후 일제히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 조작하는 듯하다가 다시 수천 명이 일제히 총구를 하늘로 올렸다.
그리고.
'타타타타타타타타탕!'
그제야 저들이 장전이 비상식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확인한 베이크는 오히려 맥이 탁 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 * *
김봉길과 이정운은 탐사대가 보인다는 보고에 급히 갑판 위로 나왔다.
처음 탐사대가 무장한 식민지 주민들을 향해 달려들 때만 해도 혹시 충돌할까 봐 긴장했던 둘이었지만 곧 탐사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안도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도 북미왕국의 함대와 탐사대를 저들에게 보여주고 설득할 생각이었잖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저들에게 사람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정운의 말에 김봉길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게 낫겠지? 저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탐사대의 접근을 경계하며 대열을 정비하고 있으니 계속 대치할 테고..."
'타타타타타타타타탕!'
"응?"
갑작스러운 총성에 대화를 나누던 김봉길과 이정운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본 후 급히 망원경을 들어 탐사대와 무장한 식민지 주민들 쪽을 살폈다.
"뭐야! 저들이 먼저 쏜 건가?"
이정운은 식민지 주민들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들 진형에선 화약 연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탐사대가 먼저 발사한 것 같습니다."
이에 김봉길은 살짝 안색을 흐리고 망원경을 탐사대 쪽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이정호는 현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렇기에 잉글랜드를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는데 먼저 공격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타타타타타타타타탕!'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김봉길과 이정운은 탐사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아...다행히 총구를 하늘로 올리고 사격하는군."
김봉길의 중얼거림에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네요. 저들이 대열을 정비하자 이정호 탐사대장은 저들의 전의를 꺾기 위해 무력시위를 감행한 모양입니다."
"어휴. 깜짝 놀랐네."
김봉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멀리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탕!'
이를 보고 김봉길을 혀를 찼다.
"허...우리가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도 충분할 텐데..."
계속해서 망원경을 통해 탐사대를 관찰하던 이정운이 입을 열었다.
"음...저게 끝인가 보네요."
"그렇군. 흐음...역시. 저들의 분위기는 제대로 꺾인 모양이야. 탐사대가 사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대열을 정비하며 사격 준비를 했는데 말이지."
망원경을 통해 무장한 식민지 주민들을 살피던 김봉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를 듣고 이정운 역시 망원경을 돌려 무장한 식민지 주민들을 살펴보았다.
처음 총성이 울릴 때만 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제대로 사격 자세를 잡고 있던 식민지 주민들은 이젠 총구를 거의 내리고 전의를 잃은 모습이었다.
"확실히...저들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던 지휘관들의 움직임도 없네요."
이정운의 말처럼 어떻게든 식민지 주민들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던 지휘관들도 그저 멍하니 탐사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과 혼란만이 가득한 식민지 주민들을 보고 김봉길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명령했다.
"좋아. 뭐 원래 계획은 협상 후 무력시위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저기 잉글랜드 선박에 타고 있는 클레멘트에게 외무청 관리를 보내 현 상황을 설명하고 저들이 설득하도록 권하게. 우리가 가는 것보다야...저들이 가는 것이 낫겠지."
"알겠습니다."
* * *
북미왕국 용기병들의 일제 사격 이후 의용병들은 경악과 혼란, 그리고 공포에 질렸었다.
하지만 북미왕국 용기병들은 일제 사격이 끝난 이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기했고 덕분에 의용병들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말...정말이었어."
한 남성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노인이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북미왕국은...정말로 화약 무기로 무장한 군대였던 거야.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그러게. 거기에 장전도 무척 빨랐고. 대체 얼마나 훈련을 받았길래...”
이들에겐 머스킷이 최신 무기였기에 그만큼 북미왕국 병사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훈련받는다 해도 저렇게 빨리 재장전이 가능한 건가? 그것도 말 위에서?”
“그러니 엄청난 정예병이라는 소리겠지.”
그 말을 끝으로 의용병들은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어쩌지?"
"저들과 싸우는 건..."
한 청년의 말에 옆에 있던 노인이 그 말을 끊었다.
"저런 잘 훈련받은 군대와 평지에서 싸우자고? 다 죽잔 소리야?"
노인의 말에 주변의 의용병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들은 제대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의용병일 뿐이었다.
이들이 북미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나선 것도 베이크의 주장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상식으로는 인디언이 화약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이들은 북미왕국의 전사들과 전투를 치른다 한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일제히 머스킷을 발사하면 그 폭음과 연기에 저들은 혼비백산해서 그대로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저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제대로 훈련받은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보다 더 화약 무기에 익숙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저들과 싸운다?
그것도 평지에서?
그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 의용병들이었다.
그때 다른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항복하면 결국 우리가 무장을 해제해야 하잖아? 인디언들을 믿을 수 있을까?"
"음..."
예전 잉글랜드인들은 전쟁을 벌이던 인디언 수백을 협상장으로 불러 독이 담긴 술을 대접해 독살한 전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때 이 지역의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던 포우하탄 족은 몰락해버렸고.
이를 기억하는 노인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자 그 불안감은 다른 의용병들에게도 퍼져나갔다.
그때 한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들도 이곳의 원주민들이긴 하지만...같은 부족은 아니니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요? 정말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달려와 죽였겠죠."
청년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음..."
의용병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눌 때 의용병들을 통솔하던 베이크 일당과 의용병 지휘부들은 모두 베이크에게 몰려갔다.
"베이크. 어쩌지?"
"..."
갈색 머리 청년의 질문에도 베이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북미왕국의 용기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베이크 일당의 안색은 어두워졌고 의용병 지휘부 중 한 명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베이크. 뭐라고 말 좀 해봐."
"일단..."
베이크가 입을 열자 베이크 일당뿐만 아니라 의용병 지휘부도 모두 집중했다.
현 상황을 보면 북미왕국은 정말로 소문대로 화약 무기로 무장했고 이는 베이크의 주장은 모두 틀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를 거론하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앞으로의 일이 더욱 중요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중했다.
"일단 기다리자."
"응?"
베이크의 말에 다들 당황하자 베이크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들은...당장 우리를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어?"
"그렇잖아. 저들은 우릴 쓸어버릴 기회가 있었어. 우리가 제대로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그대로 공격했다면 우리는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쓸려나갔겠지."
베이크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렇긴 해. 갑자기 멈춰서 대열을 갖출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수긍하자 베이크는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가 대열을 정비하고 저들과 맞서 싸우려고 하자 일제 사격을 통해 무력을 과시한 거고. 즉 저들은 당장 우리를 공격하고 죽일 마음은 없는 거 같아."
베이크의 대답에 검은 머리의 중년 남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항복하길 바라는 건가?"
그 말에 베이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럼...항복 해야 해?"
베이크의 대답에 주변은 웅성댔지만, 갈색 머리 청년이 질문을 던지자 다시 조용해졌다.
이에 베이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베이크는 정말로 북미왕국의 소문을 허무맹랑하다고 여겼다.
물론 본국이 북미왕국에 식민지 전체를 팔아넘긴 것을 보면 무언가는 있겠지만 그 무언가가 소문처럼 화약 무기나 강력한 군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 앞에서 정렬해 대기하고 있는 북미왕국 용기병들과 뒤쪽의 강가에 죽 늘어선 거대한 북미왕국의 배를 목격하니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절감했다.
베이크는 자신과 식민지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에 나선 거였지 이들을 죽이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안에는 불안감이 잔뜩 내포돼있었기에 바로 결정을 내렸다.
"내가 틀렸어. 내 생각과는 달리 저들은 화약 무기에 익숙한 군대나 다름없어. 저들을 상대로 이런 평지에서 전투를 벌인다면...너무 많은 피를 흘릴 거야. 그러니...일단 기다리자. 저들이 사람을 보낼 때까지."
씁쓸히 웃으며 답한 베이크의 말이 끝나자 공터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