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그래? 이주 선단이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대방 어르신."
원상의 이천호 대방은 자신의 심복인 김명규 행수의 말에 그를 쳐다보고 확인했다.
"이번이 마지막 이주 선단이던가?"
"그렇습니다."
김명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천호는 시선을 돌려 유리창을 통해 개항장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최근 개항장으로 유입되던 유민들이 줄어들었다지?"
"그렇습니다. 더불어 아직 개항장 외곽에서 머물던 유민들도 조금씩 빠지는 추세고요."
한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항장으로 몰려들었던 유민들도 점차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벼를 수확할 시기가 되었고 올해는 큰 이상 기후는 없었기에 이름도 생소한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계속 천막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유민들도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이천호는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야. 더 많은 유민을 보낼 수 있었는데."
김명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 선단의 한계가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북미왕국에도 그리고 유민들에게도 조선에 남기보다는 이주하는 것이 서로에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많은 유민을 이주시키려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으니까.
"하긴 그렇지. 그럼 한양의 감 도방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고...마지막으로 유민들을 가득 태워 포로나이로 보내게."
포로나이에도 유민들이 가득했기에 개항장의 유민들을 더는 받지 않겠다 선언했던 포로나이였다.
포로나이의 상황을 짐작했기에 원상에서도 동의했고.
해서 초반에는 개항장에서 출발하는 이주 선단은 유민들을 태우지 않고 출발해 포로나이의 유민들을 태워 본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일부 유민들을 북미왕국 본토가 아닌 아이누 섬 인근에 이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천호는 포로나이에 연락해 이주 선단에 유민들을 태워 보낼 테니 이들은 본국이 아닌 아이누 섬 인근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어떤가 설득했다.
유민들이 넘쳐나고 조선 조정에서도 눈감아줄 때 최대한 이주시켜 북미왕국 백성의 수를 늘리자는 이천호의 의견에 포로나이도 동의했고 다시 이주 선단은 개항장에서 유민들을 태우고 포로나이로 이동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김명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미 준비를 다 해둔 상태이니 식량을 모두 내리는 데로 유민들을 태우겠습니다."
"음..."
* * *
감성우는 원상에서 연락을 받고 곧바로 정태화의 사랑방으로 찾아가 만남을 청했다.
마침 궁에서 퇴청한 정태화는 자신을 찾아온 감성우를 곧바로 불러들였고.
그리고 정태화는 감성우가 전해 준 소식에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북미왕국의 배들이 다시 개항장에 도착했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정태화가 말을 흐리자 감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예. 이번에 도착한 배에 실린 식량이 마지막이라더군요."
북미왕국이 약속한 60만 석에 달하는 식량 지원이 결국 끝났다는 말에 정태화는 감회가 새로운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되었군. 허허허. 그래도 북미왕국 덕분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어. 아니었다면 분명 사달이 났을 테지."
"그랬겠지요."
분명 정태화의 말처럼 올해 북미왕국이 추가로 식량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다시 대기근이 발생할뻔했다.
이미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조선 조정에서 비축해두었던 식량 대부분을 풀었기에 더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금상도 조정 대신들도 걱정이 크던 상황이었다.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2달 정도는 백성들이 알아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추가로 식량을 지원해준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으니.
비록 북미왕국이 지원하기로 한 60만 석 전부가 보리 수확 전에 지원된 것은 아니었지만 절반 이상은 보리 수확 전에 지원되어 간신히 백성들의 아사를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작년에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식량을 지원한 북미왕국에 무척이나 좋은 감정을 품던 정태화는 그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과 건국된 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러한 강대하고 물산이 풍부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에 처음엔 속내가 조금 복잡하긴 했다.
하지만 그 북미왕국 덕분에 조선의 피해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고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었기에 조선에 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북미왕국이었기에 오히려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조선을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에 복잡한 마음을 털어냈다.
더불어 유철에게 당시의 상황이 어쩔 수 없어 이야기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투로시노의 사과를 전해 듣기도 했고.
이에 북미왕국을 언급하며 밝은 표정을 짓는 정태화를 보고 감성우는 안도했다.
정태화는 원상과 북미왕국의 우호적인 인사였지만 북미왕국의 정보를 알게 된 후로 북미왕국을 언급할 때 복잡한 속내와 살짝 불편한 기색이 보인 탓에 내심 긴장했었는데 오늘 북미왕국을 언급하며 예전과 같은 밝은 표정을 보아하니 북미왕국을 경계하진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때 감성우의 귓가에 정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북미왕국도 고맙긴 하지만 자네들 원상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갑작스러운 정태화의 칭찬에 감성우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는 감성우를 보고 정태화는 실소하며 말했다.
"그 감자라는 작물을 들여온 것이 바로 원상이라지?"
정태화의 질문에 감성우는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그렇습니다."
이에 정태화는 무척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자네들이 적극적으로 감자란 작물을 퍼트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작년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을 거야. 북미왕국이 지원해준 식량은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까."
계속되는 정태화의 칭찬에 오히려 감성우는 부담스러워 너스레를 떨었다.
"설마 그랬겠습니까. 그나마 올해는 작년처럼 기상 이변이 심하지는 않았으니...어떻게든 다른 구황작물이라도 채취해 버텼겠지요."
하지만 정태화는 그런 감성우의 겸손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지 슬쩍 웃었다.
"허허허. 아니야. 더는 풀 식량도 없었기에 감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큰 사달이 났을 거야."
보리 수확 이전까지는 어떻게 북미왕국에서 지원한 식량과 백성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에서 풀떼기라도 캐와 먹으며 버티긴 했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던 보리농사는 역시나 흉작이었고 보리싹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아 이를 예상했음에도 이에 매달릴 수밖에 없던 농민과 조정 대신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올해는 이상 기후가 심하지는 않아 벼농사는 흉작은 면할 것으로 보였지만 식량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다시 벼를 수확할 때까지 버텨야 했으니 말이다.
북미왕국이 지원하기로 한 식량이 조금 남았지만, 그것으로 벼를 수확할 시기인 가을까지 별다른 피해 없이 버티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생각지도 못한 작물이 있었으니 바로 감자였다.
작년의 경우 여러 이상 기후로 인해 감자 농사는 완전히 망했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보리는 작년 겨울에 심었기에 작년 겨울의 이상 기후로 인해 피해를 보았지만 감자는 올봄에 심었고 올해는 작년처럼 심각한 이상 기후는 발생하지 않았기에 별 탈 없이 자라 꽤 많은 감자를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많은 조선 백성들이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조정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 감자를 처음 조선에 들여온 것이 원상이라는 것과 올해 원상에서 막대한 씨감자를 다시 구해와 조선 팔도의 백성들에게 뿌렸다는 사실까지 뒤늦게 파악한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원상을 무척이나 기특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상이 이 감자라는 작물을 외국에서 들여왔다는 것과 올해 조선 팔도에 나누어 준 씨감자 역시 외국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에 조정 대신들은 해상 무역과 상업도 어느 정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조인 고려는 상업을 농업과 함께 중시했었지만 고려 말 발달한 상업으로 인해 밀무역, 사무역으로 인해 부가 쏠리기 시작하며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사치 풍조가 만연해 여러 사회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은 그러한 폐단을 극복하겠다는 명분으로 건국된 나라였기에 상업을 의도적으로 천시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조선의 근본인 농업이 흔들리면 별다른 대책도 없이 조선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체감한 것이다.
물론 농업을 더욱 발달시키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농업의 경우는 날씨에 의존도가 높은 편인데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초와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가 잦았고 덕분에 작황도 좋지 못해 자잘한 기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정태화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농업과 하늘만 믿을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문제라면 상업을 키우려 해도 상인들은 이득만 탐하는 존재라 함부로 믿기는 어려운 자들이라는 점인데 최소한 원상은 조선 상황이 좋지 못하자 보유한 식량을 풀고 밀무역을 통해 알게 된 북미왕국과 접촉해 결국 지원을 끌어내고 이번엔 감자라는 작물을 들여와 기근을 막은 셈이니 최소한 원상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며 원상을 무척이나 칭찬하는 정태화를 보고 오히려 감성우는 곤란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원상이 그동안 조선 조정을 속이거나 숨긴 것이 많았기에 지금처럼 조정 대신들이 주목할수록 오히려 곤란했던 것이다.
더불어 아직 조선에서 상인에 대한 인식은 썩 좋지 않은 탓에 원상이 좋은 평가를 받을수록 다른 상인과 양반들도 원상을 시기할 수밖에 없었고.
"음..."
감성우가 정태화의 칭찬에 곤혹스러운 눈치이자 이를 눈치챈 정태화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그렇게 몸을 사릴 필요는 없어. 비록 몇몇 소인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자네들을 못마땅해하고 음해하려 할 수야 있네만 조정 대신들뿐만 아니라 금상께서도 자네들을 좋게 보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걸세."
하지만 감성우는 정태화의 말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예? 주상 전하께서도 말입니까?"
그런 감성우의 반응을 정태화는 그저 금상을 언급한 것에 놀란 것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번 사태에서 자네들의 공적은 분명 대단하니까. 이 때문에 원상의 대방을 궁으로 불러 치하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었고."
조선에서 상인은 무척 천한 존재였다.
그런 상인을 궁으로 불러들여 금상이 직접 치하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원상은 무수한 견제를 받을 것이 뻔했기에 감성우는 식은땀까지 흘렸다.
"어..."
그때 정태화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대하는 대신들도 조금 있고 내 생각도 이 일로 조정에서 의견이 갈려 일이 커지면 오히려 자네들이 불편할 것 같아 적당히 무마하기는 했네만..."
분명 조정 대신들은 다시 이런 일을 닥칠 것을 대비해 상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것엔 동의했다.
더불어 믿을 수 있는 원상을 밀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조정 대신들조차 원상의 대방이 입궐시켜 금상이 직접 만나겠다는 이야기에는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심 아쉬웠던 정태화였지만 오히려 감성우는 안도하며 정태화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영상 대감."
그런 감성우의 반응에 정태화는 혀를 찼다.
"쯧쯧. 오히려 입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에 감성우는 절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옵니다. 천한 상인이 어찌 입궐할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입궐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그로 인해 원상이 흔들릴 우려도 있으니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감성우의 말을 듣고 정태화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철이 돌아와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알린 후 여러 대신은 앞다투어 유철에게 북미왕국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북미왕국은 건국된 지 고작 10년 만에 엄청난 영토를 자랑하는 대국이 된 셈이었고 조선에 우호적이었으니 북미왕국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대신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리고 정태화 역시 북미왕국에 우호적이었기에 궁금한 것이 많았고.
유철은 정태화가 북미왕국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가 파악한 여러 정보를 들려주었다.
정태화 역시 예전 제물포를 찾아온 투로시노를 통해 북미왕국이 상업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유철이 알려 준 정보는 놀라웠다.
국영 상단까지 존재할 정도로 상업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급격한 발전에는 농업과 상업과 공업을 모두 중시하기에 가능했다는 유철의 말에 정태화는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조선 역시 북미왕국처럼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공업도 조금이나마 발전시켜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감성우의 대답에 상인과 장인을 천시하는 조선의 상황을 깨달은 정태화는 가슴이 답답해져 창호지에서 유리로 바꾼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