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정성국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윤휴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호 어르신! 이게 얼마 만입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물론 그동안 편지로 가끔 안부를 전하긴 했었지만 거대한 나라를 세운 정성국은 예전 개척촌 시절과 비교했을 때 복식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해 보였기에 윤휴는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며 정성국을 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엄밀히 따지자면 윤휴는 아들 윤의제를 도와 개척촌의 행정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원상이나 북미왕국 소속은 아니었다.
다만 정성국은 일단 한 나라의, 그것도 조선보다 더 거대한 국가의 주인이었기에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 윤휴였고 정성국은 그런 윤휴를 보고 급히 윤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어휴. 이러지 마세요. 그 정도도 북미왕국에선 과례입니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윤휴를 집무실 한쪽의 차 탁자에 앉히고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하면서 윤휴를 보고 투덜댔다.
"제가 뒤늦게 이주 선단을 통해 백호 어르신이 북미왕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얼마나 당황하였는지 아십니까?"
윤휴는 아들 윤의제와 함께 원상의 대방인 이천호가 마련해 준 배편을 통해 바다에서 천급 함선으로 갈아타고 포로나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포로나이를 둘러본 후 다시 배에 올라타 결국 새김포에 도착했고.
다만 윤휴가 북미왕국에 방문한 것은 특별한 일 때문은 아니었고 윤휴 역시 행정청 관리에게 단순히 북미왕국을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다고 이야기했기에 일반적인 절차에 따라 뒤늦게 정성국에게 보고가 올라갔고.
나중에야 윤휴와 윤의제가 새김포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안 정성국은 왜 아직도 윤휴와 윤의제가 새한성에 도착하지 않았나 싶어 호위대까지 움직였을 정도였다.
윤휴는 자신을 급히 찾던 호위대에 이러한 사정을 대충 들었기에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북미왕국의 전하께서 이 사람을 이리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원두를 갈던 정성국은 윤휴의 반응에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지금껏 북미왕국의 발전에 백호 어르신의 공이 무척 크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의 10년 만에 벗을 만났는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벗이라..."
비록 나이 차는 있었지만, 정성국과는 정말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여러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윤휴 역시 정성국을 친한 벗이라 생각했기에 윤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성국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윤휴를 보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조선이 아닌 북미왕국입니다. 이곳도 분명 어느 정도 예의를 차라긴 하지만 그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 예전처럼 편히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여긴 사관도 없으니 저나 백호 어르신을 책할 사람도 없어요."
"하하하."
그 말에 윤휴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윤휴의 반응에 정성국은 웃으며 다시 커피를 내렸고 잠시 후 정성국이 커피가 담긴 찻잔을 건네주자 윤휴는 무척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 후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어. 그러고 보면 전하께서 다도에 이리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 기물들도 전하께서 직접 고안하셨다면서요?"
윤휴가 뒤편에 있는 여러 기구를 가리키면서 묻자 정성국은 그저 전생의 여러 기구를 그대로 카피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멋쩍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하하하. 뭐 어쩌다 보니...그보다 이건 서양의 다과입니다. 함께 드시지요."
시녀가 가져온 카스텔라를 윤휴에게 건네자 윤휴는 조심스럽게 한입 먹고 입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달콤한 맛에 감탄했다.
"허어...참으로 달군요. 꿀은 아닌 것 같고...역시 설탕이 들어갔겠지요?
"그렇습니다. 설탕과 우유가 듬뿍 들어갔지요. 덕분에 맛있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지요."
조선에선 우유도 귀한 편이었고 설탕 역시 원상을 통해 유통되긴 했지만, 가격은 꽤 비싼 편이었다.
이에 윤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어. 참으로 호사스러운 다과로군요."
그 말에 정성국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조선에서야 그럴지 몰라도 이곳에선 아니지요. 그러니 사치한다고 책망하진 마세요."
"아. 그렇긴 하겠군요. 이곳의 물산은 워낙 풍부하니..."
엄밀히 조선이나 북미왕국에 유통되는 설탕 대부분은 하와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세세히 설명하기도 뭐했고 곧 플로리다 지역에서도 사탕수수를 재배할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최근 확장한 지역 중에 이 사탕수수를 재배하는데 딱 맞는 곳이 있어서요. 그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하면 가격은 더 내려갈 테고요. 그러면 언젠간 조선 백성들도 손쉽게 설탕을 사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어..."
한때는 왕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설탕이었기에 윤휴가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표정을 짓자 정성국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윤휴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윤휴는 새김포에서 꽤 머무른 것으로 알았기에.
"뭐 지금도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면 큰 부담 없이 설탕이 들어간 간식거리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습니다. 새김포나 새한성에 이러한 먹거리를 파는 노점이나 상점도 꽤 있고요."
그 말에 윤휴는 생각나는 것이 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가끔 아이들이 몰려서 무언가를 사는 모습은 본 것 같은데 그곳이 간식거리를 파는 곳인가 보군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만 있다면 십중팔구는 그럴 겁니다. 어른들의 경우는 주로 찻집에서 커피와 함께 이러한 다과를 먹곤 하니까요."
"호오. 생각보다 이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다도 문화는 불교와 연관되어 있었고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사용했기에 자연스럽게 차를 대접하기보다는 술을 대접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차를 즐기는 사람은 있었지만 고려 시대에 곳곳에 존재하던 차를 파는 다점은 사라지고 주막으로 대체되었고.
헌데 이곳엔 찻집이 꽤 많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정성국의 말에 윤휴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렇지요. 조선인도 그렇지만 원주민들도 술을 너무 좋아하는지라...의도적으로 커피를 마시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듣고 윤휴는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것도 그렇군요. 고된 일을 하는 백성이라면 술기운이 필요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차가 좋지요."
"예. 뭐...관리나 연구원들은 잠을 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시는 편이지만 말이지요."
윤휴 역시 커피가 잠을 쫓는 데는 좋다는 것을 알기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곳도 개척촌처럼 일이 넘치는 모양이군요."
윤휴 역시 개척촌을 운영하면서 격무에 시달렸다는 것을 아는 정성국은 왠지 미안해서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당장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아무래도 업무과 가중될 수밖에 없지요. 그나마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앞으로는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학교라...그러고보면 이곳엔 꽤 여러 학교가 있는 듯하더군요."
윤휴는 아무래도 유학자였기에 후학을 양성하는 학교에 무척 관심이 많았기에 정성국은 웃으며 설명했다.
"그렇지요. 개척촌에서야 여러 눈치를 봐야 하는지라 학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없었지만, 이곳은 다르니까요. 거기에 개척촌과는 상황도 다르고. 하지만 본질적으론 비슷합니다. 개척촌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영특한 아이들만 따로 빼서 계속 가르친 것을 조금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개척촌에서는 정성국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영특하거나 정성국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만 꾸준히 가르쳤고 북미왕국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진 않았다.
정성국이야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의무 교육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르칠 선생이 턱없이 부족해 중학교부턴 몇 개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개척촌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기에 이를 듣고 윤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렇군요. 원상과 개척촌의 발전도 그들의 역할이 컸던 것을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은 더욱더 발전할 것 같군요."
이에 정성국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지금도 유럽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으니 이에 밀리지 않으려면 북미왕국도 더욱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국의 반응에 윤휴는 예전 생각이 나서 슬쩍 웃었다.
"확실히 전하께서는 유럽을 무척이나 신경을 쓰시는군요."
정성국은 예전에도 그랬고 이미 북미 대륙에 진출해 북미왕국을 세우고 유럽의 제국 중 하나인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유럽을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이에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윤휴였지만 정성국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저들의 기초 역량은 계속 축적되고 있으니까요. 무언가 계기가 생기면 급격하게 발전해나갈 겁니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만큼 활동 반경은 넓어질 수밖에 없으니 미리미리 역량을 키워나가야죠."
"흐음···."
정성국의 대답에 윤휴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했고 이를 깨달은 정성국은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북미왕국이 계속해서 유럽의 서적들을 수입해 열심히 번역하고 있고 언젠간 그 책들이 개항장을 통해 조선에도 널리 퍼질 테니 조선도 조금씩 변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허허허."
그러면서 정성국과 윤휴는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서신으로만 연락했기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개척촌에 있을 때 친했던 윤의제는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며 혀를 차기도 했고.
그러다 윤휴가 북미왕국에 방문한 이유가 정성국이 원했던 대로 북미왕국의 법 제정을 돕겠다는 말에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더불어 개항장으로 법학자들을 보내겠다고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윤휴가 직접 북미왕국으로 온 것은 이곳에서 일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윤휴가 곧바로 이번에 온 것은 북미왕국을 파악하기 위한 방문이며 이곳에서 오래 체류하진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아쉬움을 나타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방문이라...뭐 저야 오랜만에 백호 어르신을 만날 수 있어 좋긴 합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지만 윤휴는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사람이 북미왕국의 법을 제정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지요."
이에 윤휴의 행적을 이해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곧바로 새한성으로 온 것이 아니라 새김포 주변을 돌아다니신 거군요?"
"아무래도 새김포는...생각보다 조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외형은 달라도 분위기는 예전 개척촌과 비슷하더군요. 해서 관리들에게 요청해 주변의 원주민 마을들에 방문했었습니다만..."
윤휴가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곳도 새김포와 분위기는 비슷하지요?"
"예. 그렇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웃으며 설명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몇몇 과목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새김포가 세워진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 만큼...그 주변 지역들도 예전 개척촌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라고 봐도 될 겁니다."
"으음..."
윤휴가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슬쩍 그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래서 백호 어르신께 부탁드린 겁니다. 물론 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면 안 된다지만...백호 어르신은 개척촌을 운영하면서 여러 문제를 맞닥뜨리고 또 잘 해결해 나갔으니 현실 감각도 없지 않고요."
정성국의 말에 윤휴는 민망한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주제를 돌렸다.
"허허허. 이천호 대방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요. 굳이 직접 북미왕국에 갈 필요는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도 왔느냐는 정성국의 표정에 윤휴는 정성국을 바라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만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긴 했습니다. 전하께서 그토록 세우고자 했던 나라를 말이지요."
윤휴가 둘러본 지역은 극히 일부였고 새김포나 새한성은 북미왕국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이긴 했지만 이를 통해 정성국이 어떤 나라를 세우려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북미왕국은 왕실 아래 백성들은 평등하고 기회가 열려 있어 능력과 의지만 존재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나라였다.
더불어 개척촌 시절의 정성국은 상업과 공업을 무척 중시해 조금 우려했는데 북미왕국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했지만 그렇다고 농업 역시 무척 중요시하고 개척단을 통해 논밭을 개간하고 이곳에서 막대한 식량을 수확했다.
덕분에 북미왕국은 풍요로웠고 안정적이었고 또 건국 초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역동적이었다.
개척촌 시절보다 백성들의 생활 수준은 더욱 높았고 조선 출신 유민들도 원주민들도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라를 고작 10년 만에 만든 정성국이 새삼 대단한 인재였다는 사실과 이런 인재가 조선을 떠났다는 것에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정성국은 조선이 아닌 이곳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뜻을 펼칠 수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런 정성국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윤휴는 참으로 대견하다는 눈길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런 윤휴의 시선에 정성국은 괜히 민망해져서 크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하하. 그럼 이왕 북미왕국에 오신 김에 북미왕국 곳곳을 돌아다녀 보세요. 새한성에 있는 법학자들과만 시간을 보내지 마시고. 그리고 오늘은 저녁 식사도 함께하지요. 숙소에 대기하고 있는 형도 불러서 말이지요.“
”허허허.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