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개척촌이 개항장으로 바뀐 후로 윤휴는 개항장의 일엔 손을 떼고 정성국이 보낸 북미왕국에서 번역한 서양 여러 나라의 법전과 법체계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정성국이 보낸 서적을 모두 훑어본 이후 결정을 내리고 이천호 대방을 만나러 집에서 나섰다.
이천호는 권유 이후 서적을 보겠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윤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에 곧바로 윤휴를 환영했고.
윤휴는 이천호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북미왕국으로 가야겠네.”
“예? 북미왕국으로 가시겠다고요?”
이천호는 윤휴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윤휴는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네. 전하께서 보내주신 서양 여러 나라의 법체계는 무척이나 흥미롭더군. 그래서 북미왕국의 법을 제정하는 연구에 참여할 생각이고. 하지만 북미왕국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데 북미왕국의 국법을 제정하는 일에 관여할 수야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네.”
윤휴의 말에 이천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그 문젠 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만...”
이에 윤휴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물론 전하께선 상관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네만...내가 생각하기에 북미왕국을 한번 방문해 봐야 할 것 같네.”
그러한 윤휴의 대답에 이천호는 윤휴가 이미 결정을 내렸기에 그의 뜻을 꺾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음...방문이라면 잠시 다녀오시겠다는 뜻입니까?”
“일단 그럴 생각이지만 상황을 봐서 체류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
이에 이천호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예전이었다면 북미왕국을 방문하기가 쉬웠을 겁니다. 그냥 조용히 다녀오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어르신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제 북미왕국과 개항장의 존재가 알려졌고 이 개항장의 선착장 인근에도 조선 관리들이 존재하는 이상 쉽지는 않습니다.”
윤휴는 이천호의 엄살에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열었다.
“흥. 설마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니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거지. 분명 꼼수가 있을 테지?”
그 말에 이천호는 크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하하하. 뭐 그야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분명 조선에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가는 것은 엄연히 중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 시대에 외국 여행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상인들이야 밀무역을 하느라 법도 따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는 예외로 둔다 하더라도 말이다.
“두 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이천호는 일단 공식적인 방법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언젠가 조선에서 북미왕국으로 보낼 사절단의 일행으로 끼어드는 겁니다.”
조선은 북미왕국과 조약을 맺었고 이번에 또 도움을 받았다.
그런 만큼 조선에서는 상황이 나아지면 북미왕국에 사절단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이건 이번에 알린 북미왕국의 정보를 조선 조정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관계없이 일단 북미왕국에 도움을 받았기에 조선의 체면과 도리 때문에라도 사절단을 적어도 한번은 보내야 했다.
그리고 공식적인 사절단은 규모가 무척 컸고 또 합법적으로 외국을 다녀올 수 있는 만큼 상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도 이 사절단에 끼어 외국을 다녀오곤 했다.
그리고 윤휴 역시 인맥을 통한다면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왕국에 방문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이에 윤휴는 고개를 저었다.
“아. 나도 그 생각은 해 보았지만...당장 조선의 사정에서 북미왕국에 사절단을 보내긴 어렵지 않겠나? 잘 해야 내년 이후에나 가능할 테지. 그리고 듣자니 북미왕국의 정보를 알렸다면서? 그럼 조정에서 논의가 길어질 수도 있고.”
윤휴의 의견에 이천호 역시 동의했다.
이 방법은 공식적으로 북미왕국을 다녀올 수 있었기에 안전했지만 언제 사절단을 보낼지는 몰랐으니.
“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북미왕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다면 당연히 사절단의 일정에 맞춰야 하는 만큼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지식인들도 북경 이외의 도시에 방문하지는 못했었고 말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지 않았던 이천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비공식적인 방법을 이야기했다.
“예. 그렇지요. 그리고 다른 방법은 뭐...밀항입니다.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바다에서 배를 옮겨탄 뒤 북미왕국으로 가시면 되겠지요. 그리고 훗날 조선에 돌아와서 표류했다고 알리면 될 테고요.”
“역시 그 방법뿐인가...”
이 시기 갑작스러운 풍랑과 항해 기술의 미비로 인해 가끔 표류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은 바다에 수장되었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다시 조선으로 귀환했고 이 경우엔 죄를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오히려 자신들이 방문하지 못한 곳을 방문했기에 표류자에게 귀환하는 여정을 상세히 물어 기록하였고 말이다.
그런 만큼 이런 방법을 통해 북미왕국을 다녀온다면 나중에 윤휴가 북미왕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생긴다는 의미였기에 윤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자네가 준비해 줄 수 있겠는가?”
정성국이 북미왕국만의 법을 제정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이천호도 잘 알았기에 윤휴를 보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혹시나 해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어르신께서도 주변에 북미왕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마시지요.”
그런 이천호의 말에 윤휴는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미 주변엔 오랫동안 일했으니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겸 조선 팔도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올 생각이라고 말해 두었으니.”
“허어...”
이미 자리를 비워도 의심하지 않게 사전 준비 작업을 다 해두었다는 사실에 이천호가 놀랐을 때 윤휴가 덧붙였다.
“그리고 첫째와 둘째에게만 알렸네. 첫째는 나와 함께 북미왕국으로 가고 둘째가 이곳에 남아 집안을 관리하기로 했고.”
윤의제는 정성국과 친분도 있었고 가끔 서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북미왕국에 방문하고 싶어했기에 이 기회에 윤의제도 데려가 견문을 넓혀줄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 준비해 두도록 하지요. 곧 천급 이주 선단이 출항하니 그 전에 바다로 나가 바다에서 배를 옮겨 타고 포로나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북미왕국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제가 북미왕국에도 이야기는 해 두겠습니다.”
“알겠네. 잘 부탁함세.”
* * *
식량을 싣고 온 천급 이주 선단이 식량을 모두 내려놓고 개항장을 떠난 후 수송 선단이 개항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유철을 열심히 투로시노를 따라다니며 북미왕국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투로시노는 외무청의 지침에 따라 대답할 수 있는 부분만 대답해주었고.
그러다 수송 선단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곧바로 선착장으로 나왔다.
대화를 나누던 중 보고를 받았기에 함께 나온 유철은 수십 척이 넘는 북미왕국 특유의 거대하면서도 돛 없는 배가 바다를 메운 광경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허어. 장관이로군요.”
“그렇지요?”
투로시노 역시 수십 척의 선박이 일제히 열을 맞추어 다가오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흐뭇해하고 있을 때 유철이 질문을 던졌다.
“저 배들이 모두 식량을 싣고 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원래는 북미왕국 근해를 오가며 물자를 운송하던 선박들인데 조선의 사정을 알게 된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최대한 차출해 보낸 거지요.”
적당히 생색을 내는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대단하다는 듯 감탄했다.
“허어...”
“다만 저 선박에 실린 식량들까지는 개항장의 창고에서 보관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원상에서 배를 동원해 옮기고는 있지만 부족한 상황이라...”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이미 장계를 올렸으니 조운선이 도착할 겁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수송 선단이 잘 도착한 것을 확인했으니 전 슬슬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떠나겠다는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벌써 말입니까?”
무척 아쉬워하는 유철을 보고 그동안 수많은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투로시노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하하. 이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수야 없으니까요. 말씀드렸지만 제가 아시아 지역의 외교 업무를 모두 관리해야 하다 보니...”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자신 역시 최대한 빨리 한양으로 돌아가 자세한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아.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한양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지금쯤 장계가 도착했을 테니 조정에서도 북미왕국에 대해 궁금한 점이 참으로 많을 테니까요.”
“하하하. 그러시지요.”
* * *
천막 밖이 무척 소란스러운 눈치였기에 삼돌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으로 나가려는데 천막이 열리며 돌쇠가 들어와 소리쳤다.
“삼돌아!”
삼돌이는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돌쇠 아재? 뭔 일이오?”
돌쇠는 삼돌이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일으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빨리 나와봐. 우리가 타고 갈 배가 도착했단다.”
그 말에 삼돌이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참말이오?”
“그래.”
삼돌이는 돌쇠와 함께 천막에서 나와 조선인들이 가득 몰려있는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먼발치서 보이는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를 보고 입을 쫙 벌리며 감탄했다.
“허어...우리가 이곳까지 타고 온 배도 무척 거대했는데...저건 그보다 더 크네.”
삼돌이의 감탄에 돌쇠는 신이 나는지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여. 그리고 내가 들은 게 있는데 저 배가 더 좋단다.”
“그게 참이오?”
삼돌이가 놀라자 돌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는 커다랄수록 좋단다. 특히 먼 바다를 나갈수록 말이야.”
“허. 코앞에서 이주 선단을 놓쳐 아쉬웠는데 그나마 다행이구려.”
삼돌이와 돌쇠 가족은 겨울의 찬바람을 버티면서 물어물어 개항장에 도착했었다.
다행히 원상에서는 천막과 식량을 나눠주었고.
그리고 보부상에게 들었던 대로 원상에서는 북미왕국으로 떠날 유민들을 모집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개항장의 관리에게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개항장의 관리는 삼돌이와 돌쇠 가족을 개항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받았던 천막을 다시 회수했을 때는 불안했지만 목욕탕이란 곳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일 수 있었고 나오자마자 몸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한다면서 침을 맞고 새로운 옷을 받았으며 천막이 아닌 조그마한 방을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개항장 안쪽에서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개항장 안쪽에서 제공하는 식량은 바깥보다는 조금 더 나았고.
그렇게 개항장으로 오느라 지친 몸을 회복했을 때쯤 돛이 없는 거대한 배를 타고 이 아이누 섬이라는 곳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날이 풀리면 본토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배에서 이미 알려주었기에 이곳에서 잠시 쉬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불행하게도 삼돌이와 돌쇠의 가족들이 포로나이에 도착했을 때는 포로나이의 숙소 건물이 가득 차 다시 천막생활을 해야 했다.
그나마 먹을 것은 풍족하게 나눠주었고 이 천막생활을 하는 사람들부터 본국으로 가는 배를 탄다는 소리에 버텼고.
날이 풀리며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가 본국으로 간다며 천막에 있는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지만, 불행히 삼돌이와 돌쇠의 순번은 뒤쪽이었기에 처음 떠나는 20척이 넘는 이주 선단에는 아쉽게 타지 못했다.
헌데 이번에 도착한 배는 자신들이 놓친 배보다 더 좋다는 돌쇠의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렇지. 다만 정말 선생님의 말씀처럼 북미왕국 본토가 풍요로울까? 이곳도 지내기엔 썩 나쁘지 않잖아?”
이제 막 자신들이 타고 갈 배가 도착했는데 불안해하는 돌쇠를 보고 삼돌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곳은 섬이고 또 북미왕국 본토와 멀리 떨어진 외곽이잖소. 그러니 본토로 가는 게 맞다고 보오.”
“음...”
이미 이들은 본토로의 이주가 결정되어 있었기에 여러 교육을 받는 중이었고 그 때문에 기본적인 내용을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돌쇠였다.
“그리고 돌쇠 아재는 자식들도 생각해야지. 특히 첫째인 천석이는 아주 똑똑하지 않소. 안 그렇소?”
삼돌이의 말에 돌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며 가슴을 펴고 말했다.
“암. 암. 천석이 녀석은 하루 만에 제 이름 석 자를 쓰더만. 그리고 벌써 글을 다 배우고 선생님이 주신 책을 몇 번씩 읽고 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돌쇠의 반응에 삼돌이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소. 그러니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본토로 이주해야 하지 않겠소. 그 똑똑한 천석이라면 우리 같이 농부가 아닌 다른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정말...그럴까?”
돌쇠가 고개를 갸웃하자 삼돌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를 가르쳐주는 선생이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소. 북미왕국은 국왕 전하 아래로 모두 평등하고 기회는 열려있다고 말이오.”
그러니 항상 공부하라면서 여러 가지를 알려주던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을 떠올리고 돌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래. 가자. 가. 본토로 가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답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