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유철을 따라 개항장을 방문했던 예조 관리들은 북미왕국의 배들이 보인다는 소리에 하나둘 눈치를 보면서 슬쩍 일어나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착장에 서서 점차 다가오는 배를 보고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우와...저건 대체...”
“허...정말 장관이군요.”
한 관리의 중얼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예전 제물포에서 북미왕국의 선단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돛이 없어 움직이는 만큼 신기하다는 인상이 조금 더 강했고 원상에게도 비슷한 크기의 배가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조약을 맺은 이후 북미왕국에서 지급 함선을 이용해 조선 팔도로 식량을 옮겼을 때는 한양에 있던 이들은 지급 함선을 보지 못했었고.
그런 관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천급 함선들의 위용은 가히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북미왕국의 선박이 다가오자 혹시 부딪칠까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조선 특유의 배들과 비교하니 더더욱.
“북미왕국의 배는 돛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군요.”
북미왕국의 배는 돛도 노도 없이 움직였기에 이 소문이 들리자 조선의 선비들은 도대체 원리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했었다.
헌데 눈앞에 보이는 북미왕국의 배에는 커다란 돛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기에 한 관리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이를 듣고 예조 정랑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배가 워낙 크지 않나. 그러니 돛을 달았겠지. 그리고 저것으로 볼 때 북미왕국 특유의 선박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주변 관리들은 예조 정랑의 의견에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한 관리가 점점 선착장으로 다가왔기에 더욱 거대해 보이는 북미왕국의 선박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돛도 거대해서 그런지 참으로 웅장하군요.”
“그렇습니다. 보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한 관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예조 정랑이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몇 척이지?”
“음...10척이로군요.”
옆의 관리가 빠르게 세어 대답하자 예조 정랑이 감탄했다.
“허어. 참판 영감께서 처음으로 10만 석 가량을 가져온다고 들었는데...10척? 그럼 저 한 척에 1만 석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란 말인가? 배가 거대해 짐작은 했지만...허어.”
예조 정랑의 감탄에 다른 관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가장 큰 조운선이 식량을 가득 실어도 1000석이 한계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확실히 대단했으니까.
이에 한 관리가 살짝 기대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북미왕국은. 나중에 우리도 저러한 대선을 건조해서 현재의 조운선을 대신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 배는 거대한 바다를 건널 정도로 튼튼하니 파손될 염려도 없을 테고...”
그 말에 예조 정랑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조운선만 해도 잘만 관리하면 파손될 우려는 없지.”
“크흠.”
이 시대의 쌀은 재물이나 다름없었고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조운선의 운영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재물을 탐내는 부패한 무리는 존재했고 특히 조운선의 침몰은 주로 탈세나 횡령이라는 것은 대부분 짐작하고 있었다.
식량을 운송하다 조운선이 갑작스러운 풍랑에 휩쓸려 침몰해서 결국 식량을 망실했다는 것만큼 횡령하기 쉬운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조운선을 건조하는 것도 부담되어 결국 포기했는데 저런 거대한 대선을 건조하는 것은 조금...”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서 조운선을 직접 운용하였으나 임란 이후 조운선의 건조와 유지 비용의 부담으로 국가에서 조운선을 운용하는 것은 거의 포기하고 민간에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국가에서 저런 대선을 건조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예조 정랑의 반응에 현 조선의 상황을 떠올린 관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요.”
* * *
“어? 개척촌에 와 계셨습니까?”
이번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총 책임자인 이대수는 선착장에서 투로시노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에 투로시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이주 선단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예. 조선에 식량 지원을 알리기 위해서 왔지요.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던 모양이군요.”
다행이라는 감정이 담긴 투로시노의 말에 이대수는 과한 걱정이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시기에 출항해서 조금 걱정스럽긴 했는데 해류도 바람도 적당해 항해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중간에 바람이 도와주지 않아 평소보다는 조금 늦어지긴 했습니다만...”
그 말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일정을 물었다.
“그렇군요. 이곳에서 조금 쉰 후 바로 포로나이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요. 식량을 다 내려놓고 유민들을 실은 후에 말이지요.”
이대수의 말에 투로시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예정은 그랬군요. 그럼 이곳에 식량만 내려놓고 바로 출발하시지요.”
“예? 유민들은요?”
이대수가 천급 함선이 도착하자마자 식량을 옮기는 조선 유민들을 바라보며 질문하자 투로시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 말고 포로나이에도 유민이 바글바글합니다.”
“허. 그래요?”
겨우내 새김포에서 지내다가 날이 풀리자 곧바로 개항장을 향해 항해한 이대수였기에 아직 포로나이의 사정을 몰라 질문하자 투로시노가 바로 대답했다.
“예. 포로나이에서 본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유민만 3만가량이니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유민을 태우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될 겁니다.”
그 말에 이대수는 오히려 반겼다.
그 이야기는 배에 실린 식량만 다 내려놓으면 곧바로 가족들이 있는 포로나이로 떠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하하하. 잘 되었네요. 하루빨리 포로나이로 가고 싶어하는 선원들이 많았는데...”
평소에는 주로 바다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이었지만 북방항로가 닫히는 겨울에는 포로나이에서 가족들과 지냈다.
하지만 올해는 본국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기에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말하자 그 사정을 짐작한 투로시노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리 긴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이대수는 애써 표정을 밝게 고치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겨울내내 본국을 돌아다니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까요. 그리고 전하께서도 가족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특별 수당을 지급하기도 했으니 선원들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잠시 가족의 얼굴만 볼 수 있으면 되지요.”
“하지만...”
“정말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배려로 기차도 타보았고 말이지요. 기차를 탄 경험도 무척 신기했지만, 다시 새한성에 도착했을 때 전하께서 직접 마중 나오셔서 선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셨지요.”
정성국이 선원들을 직접 마중 나갔다는 소리에 투로시노는 궁금한 얼굴로 급히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에 이대수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목격한 본국의 발전에는 분명 수많은 물자와 이주민을 운송한 너희들의 지분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셨지요.”
과연 정성국다운 말이었기에 투로시노는 감탄했다.
“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원 중에 휴식이 짧아 아쉬워하는 녀석은 있을지언정 불만을 품을 녀석은 한 녀석도 없을 테니까요.”
이대수의 듬직한 대답에 투로시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올해만 조금 고생해 주세요.”
* * *
감성우는 정태화가 급히 찾는다는 소식에 잔뜩 긴장했다.
뒤늦게 개항장에서 이천호의 단단히 봉인된 서찰아 도착했는데 이번에 본국에서 정보를 일부 풀었다는 소식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상세히 담긴 서찰이었다.
직접 정태화를 만나야 하는 감성우는 울상이었지만 이미 본국에서 정한 일인데 어쩌겠는가.
감성우는 단단히 준비하고 정태화의 사랑방으로 향했다.
감성우가 사랑방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정태화는 급히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이에 감성우는 혼신을 다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예엣?!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무척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태화를 바라보는 감성우를 유심히 바라본 정태화는 곧 탄식했다.
“허어...원상에서도 몰랐다는 소리인가?”
개항장에서 유철이 올린 장계가 조정에 도착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니.
원상을 통해 얻게 된 세계 지도와 예전 투로시노가 제물포에 방문해 정태화에게 한 이야기가 조정 대신들이게 퍼지면서 한양의 선비들은 북미왕국과 서양의 여러 제국에 관한 호기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투로시노가 정태화에게 전해준 이야기에서 서양의 여러 나라의 행동이 썩 좋진 않았고 그에 비해 북미왕국은 거대한 국가임에도 조선에 우호적이었고 조선이 어려울 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식량을 지원해 주었기에, 그리고 최근 다시 북미왕국이 식량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다들 과연 대국의 배포는 다르다면서 감탄하기도 했고.
헌데 이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는 유철의 장계에 이연과 조정 대신들은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그들이 그동안의 여러 정보와 예물들로 인해 머릿속에 그린 북미왕국은 강력한 대국이자 문명국이었는데 유철의 장계를 읽어보니 상충하는 부분이 많았던 탓이다.
거기에 부족이라니.
이는 마치 예전 북방의 야인들이나 사용할 단어가 아닌가 싶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혼란스러워하며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하고 식량 지원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자 정태화가 일단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유철이 나름 세세하게 적긴 했지만, 장계만으로 모든 사정을 파악하기엔 어려웠기에 유철을 불러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로 하고 그 전엔 일단 식량을 옮기는 문제에 집중하자면서.
그런 정태화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기에 다들 동의했다.
다행히 북미왕국에서 무상으로 무려 60만 석의 식량을 지원했기에 조정 대신들은 안도하며 최대한 빠르게 상단들의 조운선을 이용해 식량을 옮기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바로 유철을 부르기로 했고.
그렇게 일이 마무리된 뒤 정태화는 퇴청해 감성우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정태화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감성우에게 간단한 사실만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를 듣고 감성우는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맙소사...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니...그게 참입니까? 그 커다란 나라가 세워진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요?”
감성우조차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한 정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건국된 지 10년 정도 되었다더군.”
“허어...”
정태화의 대답에도 감성우는 멍한 표정을 짓자 정태화는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감성우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정말 몰랐나? 저들은 조선말을 사용한다던데...?”
정태화의 말에 감성우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흐렸다.
“조선말까지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조선말의 습득이 무척 빠르다는 보고는 있었는데...”
이에 정태화는 감성우를 다그쳤다.
“그 부분을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정태화의 반응에 감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자세히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처음에 원상이 아이누 섬에 방문했을 때는 왜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이누 섬의 위치가 위치였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정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감성우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항구의 주민들은 주로 자신들의 고유어인 아이누어를 사용했고요.”
그곳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의 도움을 받아 왜국에 독립했다고 들었는데 자신들만의 언어까지 있는 줄은 몰랐기에 정태화는 중얼거렸다.
“아이누어라...”
“그러다 원상을 통해 조선의 유민들 일부가 건너가면서 몇몇 아이누인들이 조선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굳이 왜어로 의사소통할 필요 없이 아이누인들이 조선말을 사용했고요.”
“그래?”
그때 감성우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그러고보면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유민들이 정착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누 섬은 반대였으니까요.”
정태화가 생각하기에도 소수의 이주민이 다수인 원주민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맞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허면 지금 그 아이누 섬에서 사용하는 말은 조선말인가?”
이에 감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음...제가 알기로 포로나이 항에서는 조선말과 아이누어를 혼용해서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 외에는 아이누말을 주로 사용하고요. 해서 원상에선 포로나이 항에 조선 유민들이 늘어나자 생긴 현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만...”
결국, 원상과 감성우도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는 것과 같았기에 유철이 돌아올 때까지 일단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한 정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