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개항장에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 참판 유철을 개항장으로 보냈다.
그동안 비축해두었던 식량을 작년 겨울부터 진휼소에서 풀었기에 슬슬 식량이 부족해 진휼소를 닫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작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수확한 식량이 거의 없는 백성들이 과연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의문이라 어떻게 해서든 식량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그런 시기에 정태화가 원상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고 개항장에서 올라온 장계에도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추가로 식량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유철에게 협상 권한까지 주어가며 개항장으로 보냈다.
당장 급한 상황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북미왕국의 요구를 들어주고 다시 식량을 받아오라는 뜻이었다.
물론 아이누 섬에 비축한 식량 대부분을 가져왔기에 추가로 가져올 수 있는 식량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그것만 해도 현 조선 입장에선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이에 유철과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은 말을 타고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고 마침내 개항장이 눈앞에 보이자 유철뿐만 아니라 다른 예조의 관리들도 개항장의 풍경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그동안 개항장으로 말을 타고 이동하느라 힘들었던 것도 모두 잊은 채 탄성을 터트렸다.
“허...저건...”
“장관이네요.”
“그렇군. 저런 거대한 포구라니.”
개척촌이 개항장이 되면서, 그리고 개항장 주변의 땅이 모두 북미왕국의 소유가 되면서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 북미왕국은 원상을 통해 개항장의 선착장을 추가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유민들이 몰려들었기에 일손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무척이나 넓은 선착장을 보고 유철이 중얼거리자 다른 예조의 관리들도 선착장에 시선을 고정하다 인급 전선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아. 저기 북미왕국의 배가 보이네요.”
“흐음. 제물포에서 봤었던 배들이로군.”
제물포에서 보았던 북미왕국 특유의 돛이 없는 배 4척이 정박해있는 것을 확인한 유철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들이...꽤 이색적이군요.”
개항장에 가까워지며 예조 정랑이 개항장의 건물들을 확인하고 중얼거리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허...개항장의 풍경이 무척 독특하다는 소리가 자자한 이유를 알겠어. 조선의 건물이라고 보기엔 조금...”
그동안 보아왔던 조선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었기에 유철이 말을 흐렸다.
“그렇지요. 대부분 건물이 벽돌로 지어진 것 같군요. 허. 저 건물들에 빼곡히 붙어 있는 건 유리창 아닙니까?”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가까워지자 개항장의 모든 건물에 유리창이 달려 있다는 것을 확인한 유철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렇군. 허. 한양에서도 북촌이나 가야 유리창을 단 기와집을 볼 수 있거늘...”
원상이 유리창을 한양에 유통하긴 했지만 비싼 값 덕분에 어지간히 재력에 자신 있는 양반이 아닌 다음에는 감히 유리창을 사용하지 못했다.
헌데 이곳엔 보이는 건물 대부분에 유리창이 달려 있으니 한양에서 온 유철과 관리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 저 개항장 안쪽의 모든 건물에는 유리창을 달아두었네요. 원상이 대단한 건지 북미왕국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개항장이 원래 원상의 본거지라는 것은 관리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조 정랑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이를 듣고 유철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개항장을 구경하는 관리들에게 말했다.
“으음...개항장의 구경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빠르게 움직이세. 더 늦기 전에 북미왕국의 사절단부터 만나 상황을 파악해야 하니 말일세.”
유철의 말에 정신을 차린 관리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참판 영감.”
* * *
유철은 개항장에 도착해 의관을 정제하고 곧바로 기다리고 있던 투로시노를 만났다.
투로시노는 유철이 들어오자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철에게 인사했다.
“아. 예조 참판 아니십니까.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반년만인가요?”
유철 역시 투로시노와 북미왕국을 좋게 평가했기에 밝게 웃으면서 잠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영상 대감께서는 공께서 다시 사절단의 총 책임자로 개항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상 대감께서는 나이가 있으신지라...”
유철이 말을 흐리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귀국의 수도에서 이곳은 꽤 멀지요. 거기에 육로로 이동해야 하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온 것이지요. 해서 영상 대감께서는 공을 만나지 못해 무척 아쉬워하셨습니다. 아. 이건 영상 대감께서 보내신 서찰입니다.”
유철이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투로시노에게 전해주자 투로시노는 반가운 기색으로 서찰을 받아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나중에 읽어보지요.”
“그러시지요. 그보다 장계를 통해 북미왕국에서 추가로 식량을 지원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맞습니까?”
적당히 분위기가 풀렸다고 생각한 유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투로시노는 자세를 바라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오.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금 조선 사정이 썩 좋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번엔 제가 어느 정도 협상 권한을 가지고 왔으니 바로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장 조선의 상황이 급한 만큼 곧바로 협상에 들어가자는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유철이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투로시노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번 식량 지원은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지원될 겁니다.”
“예?”
“그리고 이번에 지원되는 식량의 양도 저번과 비슷한 60만석 가량이고요.”
“헉?!”
투로시노가 처음 무상으로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유철은 내심 낙담했다.
협상도 하지 않고 무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하니 이번에 지원하는 식량의 양이 무척 적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투로시노가 이전처럼 60만 석의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밝히자 유철은 무척이나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진담...이십니까?”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었기에 유철이 이를 믿지 못하고 다시 묻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식 협상에서 농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그렇긴...한데...”
현 조선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투로시노도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에서 60만 석의 식량을 추가로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조선으로서는 북미왕국이 요구하는 어지간한 조건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헌데 무상으로 지원해 주겠다니.
유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투로시노에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의 도움으로 우리 조선은...”
이에 투로시노는 급히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이번 식량 지원은 제 결정이 아닙니다.”
“그럼?”
유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아한 표정을 짓자 투로시노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손짓했다.
유철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투로시노는 입을 열었다.
“이번 식량의 무상 지원은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지요.”
그 말에 유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귀국의 국왕 전하께서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귀국의 사정이 뒤늦게 아이누 섬에 알려지고 저는 본국에 이를 알리려 했지만, 당시에는 그 이후 뱃길이 끊어졌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본국의 훈령을 받지 못하고 제 임의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이야기는 전에 투로시노가 제물포에 왔을 때도 이야기했었기에 유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예.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하지만 아이누 섬의 식량 창고에 비축된 식량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아이누 섬 인근의 북미왕국 백성들을 위한 식량이었기에 제 임의로 반출하면 본국에서 책망할 수 있었기에 전 명분이 필요했고요.”
유철은 반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답했다.
“그렇지요. 그래서 아국은 귀국과 조약을 맺은 것이고요.”
“예. 그리고 이번에 날이 풀리고 뱃길이 열리자마자 본국으로 귀국과 맺은 조약문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본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곧 본국에서 추가로 식량을 운송할 터이니 이를 조선에 무상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말에 유철은 북미왕국 국왕의 관대함에 탄식을 토해냈다.
“허어...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반응에 투로시노는 내심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분명 본국에선 귀국과 함부로 접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귀국에 그런 재난이 닥쳤다면 아국과 귀국의 인연이 있는 만큼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유철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북미왕국과 인연이 있다니.
작년에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던 나라가 아닌가.
하지만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조약을 맺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면서 이 기회에 정식으로 귀국과 교류를 하고 분명 작년에 조선에 큰 재난이 닥쳤다면 식량을 수확하기 전까지는 식량이 부족할 것이 확실하니 이번에 지원되는 식량은 무상으로 지원하라는 아국의 국왕 전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투로시노의 말이 끝나자 유철은 방금 투로시노가 한 말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음...귀국의 국왕 전하의 말씀은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헌데 아국과 귀국의 인연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질문에 투로시노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철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아. 전에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조선 출신이십니다.”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가 기겁했다.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니.
“...뭐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유철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 투로시노는 외무청에서 적당히 각색한 북미왕국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음...이걸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이 땅이 구형이라는 것은 잘 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 조선인들은 이 땅이 평평하고 그 가운데 중국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테오 리치에 의해 서양의 천문학이 명나라에 전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설(地球設)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젊은 시절 이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과 서양인들이 아시아로 가기 위해 거대한 바다를 넘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에 무척 감명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생각했었답니다. 정말 이 땅이 구형이라면 조선에서 동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서양인들이 말하는 신대륙에 당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원상을 통해 획득한 세계 지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고생 끝에 바다를 넘어 신대륙을 발견했지만...거친 항해 덕분에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배가 거의 가라앉기 직전이었다더군요.”
마치 재미난 기담 같은 투로시노의 이야기에 유철은 흥미를 나타냈다.
“그래서요?”
그런 반응에 투로시노는 슬쩍 웃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처음 도착한 지역에 사는 선주민들은 바다에서 나타난 이국인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복식이 다를 뿐이지 생김새는 별 차이 없었으니까요. 해서 전하께서는 선주민들의 도움으로 배를 수리하기 시작했고 결국 배를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만...전하께서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곳에 남아있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유철은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까? 왜 그러한 결정을?”
“배의 수리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러는 동안 선주민들과 어울리며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는데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서양인들이 이 신대륙을 정복하고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투로시노가 정태화에게 한 이야기는 당상관이라면 다 전해 들었기에 유철은 북미왕국의 국왕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이해하고 탄식했다.
“아...”
“예.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자신들이 떠나고 나면 이들은 언젠가 세력을 확장하는 서양인에 정복되어 노예가 될 것으로 생각하셨지요. 해서 전하께서 배에 오르지 않자 함께 바다를 건넜던 다른 조선인 선원들도 모두 남아있기로 했답니다. 그동안 원주민들과 친분이 깊어졌으니 말이지요.”
투로시노의 이야기에 유철은 신음을 흘리며 그들의 사정을 이해했다.
“흐음...”
“그렇게 전하께선 원주민들과 소통하시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리려 애를 쓰셨고 그 때문에 난립하던 여러 부족이 경각심을 갖고 언젠가 자신들의 지역으로 들이닥칠 침략자들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했습니다만...문제는 이들을 이끌 지도자였습니다. 이들 부족은 오랫동안 갈라져 맞서왔고 비슷한 규모였기에 서로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죠.”
투로시노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유철은 왜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인지 이해했다.
“아! 설마...”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원주민들은 긴 합의 끝에 자신들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려준 조선인을 왕으로 세우기로 정했습니다.”
북미왕국의 건국에 얽힌 이야기가 끝나자 이를 듣고 유철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
그런 유철을 보고 투로시노가 말했다.
“그렇게 북미왕국이 건국되었으니 북미왕국과 조선과의 인연은 무척 깊은 편이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