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투로시노는 부하에게 선착장에 쾌속선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일신의 집무실이 있는 3함대 사령부로 이동했다.
“사령관님. 쾌속선이 도착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마침 찾아가려 했는데 오셨군요.”
정일신은 허겁지겁 달려온 투로시노를 보자마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두툼한 편지 봉투를 투로시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투로시노가 정일신에게 봉인되어있는 두툼한 편지 봉투를 받아들며 묻자 정일신이 대답했다.
“쾌속선의 선장이 직접 저에게 전달한 문서들입니다. 전하의 편지와 외무청의 명령서라더군요.”
“그래요?”
정일신의 말에 투로시노는 곧바로 봉인을 뜯고 안에 들어 있는 정성국의 편지와 외무청의 명령서를 빠르게 확인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정일신이 묻자 투로시노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국에서 기존의 이주 선단 외에 따로 수송 선단을 조직해 식량을 보낸다더군요.”
그 말에 정일신은 이미 편지를 건네준 쾌속선의 함장에게 전해 들었기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예.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조용한 곰이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도 전에 혹시나 해서 전하께서 직접 준비하셨다더군요. 확실히 전하의 통찰력은 대단하달까요?”
정성국을 통찰력을 찬양하는 정일신의 말에 투로시노는 애써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아...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문제로 다시 조선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본국에서 식량 운송을 위해 수송 선단을 조직했을 정도니 생각보다 많은 식량이 도착할 테고 그런 만큼 당연히 투로시노가 조선과 협상해 무언가 이득을 취할 것으로 생각한 정일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거야 그렇겠지요. 그보다 이번엔 식량 지원을 대가로 전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아무것도요.”
“예?”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일신이 놀란 표정을 짓자 투로시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상으로 식량을 지원하라는군요. 그리고...조선 조정에 북미왕국의 정보를 일부 알리라고 하는군요.”
그 말에 정일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일부가 어디까지입니까? 설마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인이 개입되었다는 사실까지?”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까지 밝히라는 지침입니다.”
그 말에 정일신은 당황했다.
그 정도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푸는 셈이었으니까.
이에 정일신은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허어...정식으로 조선과 교류하기 시작한 이상 언젠가는 알려질 것으로 생각은 했지만 이건...”
정일신의 말에 투로시노 역시 동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투로시노도 그렇고 정일신도 그렇고 북미왕국의 정보를 조선에 알리는 것은 최대한 미룰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무리 조선과 조약을 맺었다고 한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선에서는 서양의 여러 나라처럼 북미왕국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의 내부 사정을 원상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했고 그 때문에 조선이 현재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과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식량을 지원해줬고 덕분에 대기근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건네준 예물을 통해 국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원상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영토는 저 대륙을 차지한 청나라와 견줄만했으니.
더불어 북미왕국이 아이누인들을 도와 왜국과 싸웠다는 것과 결국 왜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점까지 알게 되면서 북미왕국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에 최대한 정보를 차단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본국의 결정은 예상과는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이에 정일신과 투로시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집무실은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그러다 정일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전하께서 이번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하라고 한 것인지 알겠군요.”
이건 무상 지원이라기보단 조선의 혹시 모를 반발을 식량으로 무마하려는 뜻이 아니겠냐는 정일신의 말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식량으로 달래 보겠다는 느낌이랄까요?”
투로시노도 정일신의 생각에 동의하자 정일신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너무 급한 감이 없진 않은데...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말에 투로시노도 동의했다.
“그렇지요. 계속 북미왕국의 정보를 숨기려면 결국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 거짓말이 계속 쌓여 나갈 테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급한 것 같긴 한데 지금 바로 알리는 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입니다.”
투로시노가 제물포에서 조선 관리들과 협상할 때에도 조선의 상황이 급박하고 자신 역시 풍랑에 발이 묶여 낭비한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빠르게 협상을 진행해서 그렇지, 아니었다면 북미왕국에 호기심을 나타내는 조선 관리들의 질문에 무척이나 곤란했을 것이다.
그리고 투로시노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외무청 관리인 만큼 계속해서 조선을 드나들어야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북미왕국의 정보를 숨기기 위해 조선 관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테니 이는 결국 양국의 관계야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국의 결정은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한 투로시노였다.
“그것보다 조선 관리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분명 말투는 투로시노를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는 정일신을 보고 투로시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후우...이곳에 다른 고위급 관리가 있으면 그를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저번 조선 방문에선 조선 관리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거짓을 말하진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이야기하거나 정보를 숨겨 조선 관리들이 오해하게끔 이야기한 것도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번엔 북미왕국의 정보를 풀면서 자신이 제물포에서 애매하게 이야기하거나 정보를 숨겨 조선 관리들이 오해하게 만든 부분을 인정해야 하는 판이라 영 난처한 투로시노였다.
그런 상황을 짐작한 정일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투로시노는 박장대소하는 정일신을 잠시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전 먼저 개항장으로 가서 원상의 이천호 대방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그제야 웃음을 멈춘 정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무래도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 유민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처음 북미왕국과 접촉한 원상도 의심받을 수 있겠군요.”
원상은 북미왕국의 존재를 처음으로 조선에 알렸고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까지 확실하지 않다는 전제를 덧붙여 조선에 알렸었다.
헌데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인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선 조정에선 원상을 미심쩍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 정일신이었다.
“그렇지요. 훗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질 것을 대비해 원상에서도 조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두긴 했겠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럼 공식적으로 방문하실 겁니까?”
그 말에 투로시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요. 어차피 개항장에는 조선의 고위 관리도 없으니 이천호 대방과 미리 이야기할 시간은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허면 인급 전선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 * *
개항장에 인급 전선 3척이 도착했고 투로시노가 공식적으로 방문했다는 소리에 이천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투로시노를 찾아왔다.
그리고 투로시노의 이야기를 듣고 이천호는 경악했다.
“예? 북미왕국의 정보를 알리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투로시노는 본국에서 수송 선단까지 꾸려 식량을 수송한다는 사실과 조선에 알릴 외무청에서 적당히 각색한 북미왕국의 정보들을 이천호에게 알려주었다.
이를 듣고 이천호는 곧바로 정성국과 외무청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깨닫고 중얼거렸다.
“아...식량 지원을 미끼로 조선의 반발을 최대한 막으려는 뜻이로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천호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셈을 마친 후 중얼거렸다.
“흐음...그렇다면야 조선에서도 크게 반발하진 못할 겁니다. 현재 조선 곳곳에서 운영 중인 진휼소에 할당한 식량이 거의 떨어져 곧 진휼소를 닫는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이니...”
그 말에 투로시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우리 입장에선 나쁘진 않군요.”
이에 이천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다만...”
“다만?”
“조선 조정에서 전하의 출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전하의 정보를 파악하려 들 것이 조금 걱정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존함이 알려지게 되면 좀 곤란해질 것 같고요.”
이천호의 말에 투로시노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아...그러고 보면 전하께서는 조선에서 지내기도 하셨고 원상의 초대 대방이셨으니...”
“예. 전하께서 원상의 초대 대방의 신분으로 해금령을 폐지하기 위해 관리들을 꽤 많이 만나셨으니까요. 물론 양반들이 과연 천한 상인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겠느냐마는...”
조선에서 이름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단순히 대상을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단어가 아닌 생명과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를 저주하고나 훼손하면 그 사람에게도 영향이 미칠 거라고 여겼기에 본 이름 외에도 여러 이름을 가졌다.
흔히 본 이름이라고 알려진 관명(冠名) 외에도 아명(兒名)이나 자(字), 호(號) 등이 바로 그것이고.
그렇기에 양반들은 여러 이름을 가졌고 지배층인 양반들이 여러 이름을 사용하니 자연스럽게 먹고살 만한 부유한 양민들도 이를 따라 하곤 했다.
하지만 정성국은 그저 제 이름 석 자만 사용했을 뿐이었기에 정성국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양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이천호였다.
이에 투로시노는 이천호가 우려하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흐음...알겠습니다. 일단 전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그래 주십시오. 물론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 * *
정태화는 사랑방을 찾아온 감성우가 전해준 이야기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허어.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영상 대감.”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분명 북미왕국에서 비축하고 있던 식량은 대부분 조선으로 가져왔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감성우는 고개를 숙이며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릅니다. 제가 전달받은 것은 그저 현재 개항장에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방문했다는 사실과 사절단에서 추가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는 사실 뿐입니다.”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이번에 방문한 사절단의 총 책임자는 누구라 하던가?”
“전에 제물포에 방문했던 투로시노라고 합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조선에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투로시노를 떠올리고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하지만 투로시노도 추가적인 식량 지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감성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소인의 추측입니다만 날이 따뜻해지면서 뱃길이 열린 만큼 저들의 본국에서 식량을 어느 정도는 가져올 수 있겠지요.”
감성우 역시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북미왕국의 사정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이리 이야기하자 정태화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북미왕국 본토에는 식량이 풍족하다고 했던가? 참으로 부럽군.”
정태화의 부러움 섞인 반응에 감성우는 혹시 과한 기대를 할까 걱정스러워 급히 덧붙였다.
“다만...과연 얼마나 많은 식량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정태화도 아이누 섬과 본국이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감성우의 말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지. 후우. 그보다 청나라에서 식량을 더 들여올 수는 없는가?”
최근 원상이 밀무역을 통해 청나라에서 쌀 2천 석 가량을 들여온 일이 있었다.
조선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았고 원상에 호의적인 정태화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기에 원상 소속의 함선을 청나라로 보내 구한 것이다.
원상에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정말 원상이 청나라에서도 밀무역을 통해 식량을 일부 구해오자 정태화는 밀무역으로 부족한 식량을 구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밀무역이다 보니 많은 양의 식량을 들여오는 것은...”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아쉬움을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아닐세. 무리한 요구나 다름없었으니. 그나마 참으로 막막했는데 조금이지만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추가로 지원할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 아닌가.”
“그렇지요.”
정태화는 다시 투로시노와 만나고 싶었지만 늙은 몸을 이끌고 개항장까지 가긴 어려웠기에 중얼거렸다.
“알겠네. 그럼 개항장에서 장계가 올라오는 즉시 바로 예조참판을 보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