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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37화 (237/850)

237화

정성국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관리청장을 보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입을 열었다.

“왔나? 쾌속선은 출항했고?”

관리청장은 정성국의 물음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쾌속선의 함장에게 제가 직접 전하의 편지와 외무청의 명령서를 전달했습니다.”

“그래?”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살짝 안색을 굳혔다.

조용한 곰과 이야기한 후 이번에 조선에 전달되는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대신 북미왕국의 정보를 일부 알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조선과는 꾸준히 교류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북미왕국의 정보를 숨길 수는 없던 탓이다.

다만 아무리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하더라도 모든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것은 어려웠다.

그 때문에 조용한 곰이 외무청 관리들과 함께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적당히 북미왕국의 건국을 각색했고.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 유민들의 역할이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 정성국이 북미왕국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교류를 지속한다면 언젠가는 조선의 사절단이 북미왕국에 방문할 수도 있었으니.

물론 외형상으론 단발과 수염을 깔끔하게 깎고 북미왕국의 복식을 했기에 조선인과 원주민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이름으로 판단할 수 있었고 새한성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북미왕국인들이 조선말과 거의 흡사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나 문자로 조선의 한글을 개량한 북미왕국만의 한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려도 납득할 테고.

그 때문에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으나 투로시노가 이 사실을 언급하는 순간 조선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정성국도 짐작할 수 없어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입장에선 조선을 떠난 유민들이 먼 곳에 나라를 세운 셈이니 말이다.

그것도 조그마한 지역을 장악해 자신들끼리 살면서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보다 훨씬 거대한 나라를 세운 셈이었으니.

그러니 정성국은 조선 조정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관리청장은 정성국의 표정을 확인하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선 상황이 썩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꼬치꼬치 따지려 들진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관리청장의 말에도 정성국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이를 결정했고 정성국의 편지와 외무청의 명령서가 쾌속선을 통해 포로나이로 떠난 이상 이미 손을 떠난 일이었고 걱정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정성국은 관리청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수송 선단은 모두 출항했나?”

“그렇습니다. 전하. 마지막 한 척까지 모두 출항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관리청장이 새김포까지 간 것은 수송 선단의 출항 때문이었다.

쾌속선을 타고 조용한 곰이 도착한 것은 북방 항로가 열렸다는 뜻이었으니 관리청장이 직접 새김포로 가 수송 선단의 출항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그리고 간 김에 정성국의 편지와 외무청의 명령서도 쾌속선에 전달한 것이고.

“그래? 고생했네.”

그동안 수송 선단을 조직하기 위해 관리청에서 수많은 업무를 감당해야 했기에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관리청장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전하.”

겸양하는 관리청장을 보고 피식 웃은 정성국은 문득 이주민에 관련된 문제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유민이 새김포로 도착할 것 같네. 개항장도 그렇고 포로나이도 그렇게 조선 출신 유민들이 꽤 많은 모양이야. 그러니 미리 물자를 충분히 준비해 두도록 하게.”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선 조용한 곰에게 언질을 받았었기에 관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아. 행정청에 이야기해서 새김포에 있는 이주민 거주 지역을 더 늘릴까요?”

그 말에 정성국은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저었다.

조용한 곰의 말에 따르면 지금 개항장에는 유민들이 넘쳐난다고 했다.

그래서 감당이 되지 않아 포로나이로 보냈지만, 포로나이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 일부 유민들을 주변 지역에 정착시킬 정도였고.

하지만 조선 상황이 나아지면 자연스럽게 유민들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글세...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네. 당장은 유민들이 넘쳐나지만, 조선의 상황이 안정되면 이주민이 확 줄어들지 않겠나.”

관리청장 역시 조선 출신이었기에 조선 사람들이 의외로 보수적이라 어지간하면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요.”

“다만 이번에 수송 선단이 조금 걸려서 이야기한 걸세.”

조용한 곰의 말을 들어보니 수송 선단이 포로나이에 도착하면 식량을 내려놓고 유민들을 가득 싣고 올 것 같았기에 이를 지적하자 관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수송 선단이 돌아오면서 유민들을 가득 싣고 오면 확실히 지금의 이주민 거주 지역으론 조금 부족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행정청에 이야기해서 임시로 머물 공터를 마련해두도록 하지요.”

현 이주민 거주 지역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최근 확장한 덕분에 1만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수송 선단의 규모를 고려해보면 부족한 감이 있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관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하네. 아. 그리고 조용한 곰에게 들었겠지만 조용한 곰이 쾌속선을 타고 출항할 때 이주 선단도 함께 출항했다고 하니 곧 이주민들이 도착할 거야. 그러니 미리 준비하도록 하게.”

이 부분은 언제나 관리청과 행정청에서 맡아왔던 일이었기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관리청장이었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하.”

“다행이군.”

* * *

버지니아 식민지의 중심부인 제임스타운의 한 선술집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근 본국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식민지 주민들은 반발했지만, 총독부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슬슬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총독부의 반응에 상황을 인식한 사람들이 하나둘 서인도 제도를 오가는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으니까.

그 때문에 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대부분은 한탄과 분노를 내비쳤으니 분위기가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선술집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 사내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봐. 베이크. 정말 사람들을 모으라고?”

베이크라고 불린 갈색 머리의 젊어 보이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본국의 결정에 분노한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하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이끌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들은 포기하고 지금처럼 배를 타고 서인도 제도로 떠날 테고.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해.”

베이크의 말에 더벅머리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 질문을 던졌다.

“음...정말 북미왕국에 맞서 싸우려고?”

이에 베이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럼 넌 네 가족의 땅을 그냥 포기할 생각이야?”

더벅머리 사내 역시 그동안 일군 대를 이어 일군 농장을 버리고 서인도 제도로 가야 하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북미왕국과 맞서 싸우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 조심스럽게 베이크에게 대답했다.

“하지만...북미왕국의 소문이 심상치 않잖아?”

더벅머리의 말에 다른 사내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문했다.

“그렇긴 해. 하지만 네가 들은 북미왕국의 정도는 모두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뿐이잖아? 그 북미왕국의 소문 중에 정확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는 해?”

그 말에 더벅머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질문했다.

“음...물론 진위가 의심스러운 소문이 많기는 하지만...저들은 국가라고. 한 국가와 맞서 싸우겠다는 거야?”

이에 베이크는 무척 오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봐야 미개한 인디언들일 뿐이야. 뭐 이 주변의 인디언 부족과는 달리 조금 규모가 큰 편이긴 하겠지만.”

베이크의 대답에 옆에 있던 짙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봐. 베이크. 저들은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소문 못 들었어?”

다른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베이크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기존의 주장을 고수했다.

“말했잖아? 단지 소문일 뿐이라고. 저들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있기는 해?”

“하...하지만 북미왕국은 저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잖아?”

더벅머리의 반론에 베이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덕분에 일방적인 기습을 당한 셈이고. 뭐...인디언들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자부할 정도라면 꽤 규모가 큰 부족일 테니 전사들도 적은 편은 아니었을 테고 그 때문에 에스파냐의 피해가 꽤 컸겠지. 그래서 그냥 협상해서 종전한 것일 테고. 만약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의 존재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면 고작 인디언들로 이루어진 북미왕국이 에스파냐를 이겼을 것 같아? 덤볐다가 깨졌겠지.”

베이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고 그런 베이크의 태도에 사내들은 베이크의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으음...”

“아. 그리고 그때 에스파냐의 머스킷을 노획했을 수도 있겠네. 그래서 북미왕국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고 북미왕국의 군대는 머스킷으로 무장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테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저 미개한 인디언들이 정말 화약을 제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내들이 생각하기엔 베이크의 말도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였기에 조금씩 베이크의 주장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긴...인디언들이 화약을 만든다는 소문은 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어.”

사내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깨달은 베이크는 열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뭉친다면 저들과 맞설 수 있어. 우리가 노력해서 일군 땅을 지킬 수 있다고. 헌데 포기할 셈이야?”

“정말 저들과 맞설 수 있을까?”

더벅머리의 중얼거림에 베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분명 쉽진 않을 거야. 한 나라를 칭할 정도로 대부족이니 분명 전사 계급도 적진 않을 테고.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자리 잡고 방어한다면 충분히 저들을 막을 있을 거라 믿어. 우리의 아버지들이 치렀던 인디언들과의 전쟁처럼 말이야.”

“으음...”

그 말에 베이크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북미왕국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실제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북미왕국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베이크의 말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정확한 판단 같았다.

거기에 이들은 모두 본국에서 온 이민자가 아닌 식민지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에게 이 버지니아를 지키기 위해 원주민들과 2번의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과 그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식민지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들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 세대가 버지니아 주변 원주민 부족을 철저히 말살해 멸족시키고 식민지를 확장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처음 본국이 인디언들의 국가인 북미왕국에 모든 권리를 넘겨줬다는 사실에 더욱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고 일단 모든 땅은 북미왕국에 귀속된다는 말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들도 딱히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는 본국으로, 일부는 서인도 제도로 이주하기 시작했기에 내심 이대로 떠나야 하는 건가 싶었고.

헌데 베이크의 주장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다들 베이크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것을 깨닫자 더벅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볼게. 하지만 무기는 어쩌려고?”

일부는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말 북미왕국과 맞서 싸우려면 그 정도론 턱도 없었기에 이를 거론하자 베이크는 주변을 살핀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무기고에서 가져와야지.”

베이크의 말에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에 젊은 사내들을 화들짝 놀라 혹시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 주변을 살폈다.

“으음...그게 가능할까? 총독은 열렬한 왕당파잖아? 결코, 찰스 2세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을 텐데 우리에게 무기를 넘겨 줄까?”

짙은 갈색 머리의 사내는 조금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베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사람들을 설득하라는 거야. 일단 우리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회유해서 여론을 만들고...총독과 담판을 지어야지.”

“흐음...”

하지만 베이크의 말에도 젊은 사내들은 조금 부담스러운 눈치였기에 베이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굳이 총독과 싸울 생각은 없어. 잉글랜드 병사들과 싸워 피를 흘리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설득해볼 생각이야. 그래도 안 되면야 뭐...”

그렇다고 무기고를 탈취하지 않으면 북미왕국에 맞서 싸우지도 못할 것이 뻔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자 더벅머리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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