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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36화 (236/850)

236화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성국은 집무실로 들어온 조용한 곰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조용한 곰! 정말 오랜만이야."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데리고 티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내리면서 조용한 곰을 살펴보았다.

뱃멀미를 조금 한 것인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건강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기에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자네를 포로나이로 보낼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한 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조선에 가서 빠르게 협상을 진행하고 북방항로가 닫히기 전에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만...정말 조선의 자연은 무척이나 사납더군요.“

조용한 곰은 목포에서 사납게 비바람이 몰아쳤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조선 출신인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뭐 작년은 좀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그보다 조선과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정성국이 커피를 커피잔에 따라주며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품 안에서 이미 서명된 조약문을 꺼내 정성국에게 바쳤다.

정성국은 조약문을 빠르게 훑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분명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믿고 있긴 했지만, 정성국이 원했던 모든 사안을 다 관철시킬 줄은 몰랐기에.

"와아...이건 투로시노가 협상을 잘 한 건가? 아니면 조선 상황이 정말 안 좋았던 건가?"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커피를 마시며 정성국에게 협상장에서 있었던 일들과 조약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이를 주의 깊게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개항장이라...“

전생을 기억하는 정성국에게 개항장은 묘한 울림을 주었다.

개항장은 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해 개방한 지역으로 고려 때에는 벽란도가 존재했고 현 조선에도 왜관이 개항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개항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근대 이후였고 개항장을 지정하게 되는 조약이 바로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정성국으로서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더불어 북미왕국은 조선과 동등한 국가로 교류를 시작했으니 조선은 더는 세계정세에 어둡지도 않을 테고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면 조선도 더는 안주하지 않고 발전해 나갈 거라 믿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세운 개척촌의 이름이 바뀐 것이 안타까워 저러나 싶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개척촌이란 이름은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북미왕국관으로 붙일 것 같아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정신을 차리고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나쁘지 않네. 그런데...이 땅을 북미왕국에서 모두 사들였다고?“

"그렇습니다. 이 지역 황무지는 원래 원상의 소유였잖습니까. 원칙대로라면 관에서 원상에게 헐값에 사들여 우리가 임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원상이 막대한 손해를 볼 테니 조금 배려해주더군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잠깐. 이곳에 원상이 소유한 모든 땅을 넘겨받은 거야? 그 넓은 땅을?"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원상은 갑자기 막대한 빚이 생겼고 이를 모두 탕감하는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맙소사."

애당초 원상이 관에서 사들인 땅은 정성국이 사들였었다.

개척촌을 세울 생각을 하고 관이 소유하고 있던 해안가 땅을 값싸게 사들인 것인데 당시에 정성국은 조선을 떠날 마음이 없고 개척촌을 근대화의 시발점이자 동해안 제일의 도시로 만들 생각에 생각보다 넓은 땅을 사들였었다.

헌데 그 넓은 땅이 모두 북미왕국의 소유가 되었다니.

이곳을 통해 조선과 교류할 테니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의 소유한 땅의 가치는 급격하게 올라갈 것이다.

이를 짐작한 정성국은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에 웃으며 평했다.

"아무튼, 잘됐네. 솔직히 언제까지 관의 눈을 피하며 개척촌을 운영할 수는 없었으니까.“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도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이천호 대방도 그런 소리를 했었고 그 때문에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한 것이니까요. 이 조약이 체결된 후 이천호 대방도 원상의 부담이 줄어들었다며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이천호 대방을 떠올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테지. 대방에겐 참 미안할 뿐이야.“

정성국과 정평국을 대신해 원상을 맡게 된 이천호가 받는 부담은 무척 컸을 것이다.

아무리 관리들을 구워삶는다고 해도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외줄 타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개척촌이 개항장으로 바뀌고 양지로 올라온 만큼 이천호 대방이 걱정해야 하는 문제는 많이 줄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식량은 모두 옮겼나?"

"그렇습니다. 전하."

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겨울 태풍이 불어오는 터라 운송이 쉽지 않았지만, 북방항로가 열리기 전에 포로나이에 비축해 둔 식량 중 일부만 남겨놓고 모두 옮겼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조선 상황은 어떤가?“

이 질문에 조용한 곰은 미소를 지우고 대답했다.

"썩 좋지는 않습니다."

"으음..."

조용한 곰은 원상과 조선 팔도를 방문한 선장들을 통해 파악한 조선의 사정을 정성국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이를 주의 깊게 듣고 속으로 안도했다.

조용한 곰은 무척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정성국이 듣기엔 확실히 전생보다 상황이 많이 나았다.

전생에서는 경술년 7월에 처음 아사자가 발생한 이후 아사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기근 덕분에 제대로 먹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전염병에 의해 죽어 나갔다.

덕분에 길거리 곳곳에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가 넘쳐났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전생에서는 한양에 진휼소를 열었다는 소문에 전국에서 유민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었고 덕분에 전염병은 빠르게 서울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계급에 상관없이 너도나도 전염병에 걸렸고 궁궐을 지키는 병사와 궁녀까지 걸리고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 공주마저 사망하자 왕실은 전염병을 피해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 정도였고.

헌데 조용한 곰의 보고를 들어보니 아사자가 발생할 것 같아 원상에서 보유한 식량을 푼 이후 몇몇 양반들도 자체적으로 구휼미를 풀기도 했을뿐더러 북미왕국이 식량을 지원하자 피해를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정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식량을 그것도 한양에서가 아닌 북미왕국이 식량을 내려놓는 조선 팔도에 분산해 풀었다.

덕분에 굶주린 유민들과 백성들이 분산되어 전생처럼 전염병에 의해 한양이 마비되는 일도 없었고.

그동안 정성국은 뻔히 경신 대기근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면서 너무 소극적으로 대비하지 않았나 생각하곤 했었다.

비록 전아라의 말에 조금 위안을 받긴 했고 전생보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졌으니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죄책감을 아예 떨쳐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할지언정 전생의 기록처럼 아비규환 같지는 않았기에 정성국은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많이 심각하진 않아 다행이네.“

이에 조용한 곰은 무척 당황했다.

지금까지 조선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정성국이 심각하지 않다며 안도하는 모습이었으니 조용한 곰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을 파악한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그동안 올라왔던 보고는 계속된 재난의 연속이었잖나. 거기에 조선 팔도 전체가 흉작이었으니 조선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대기근이 닥친 셈인데...“

정성국의 말은 최악 중 최악의 상황이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조용한 곰의 보고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라는 말에 조용한 곰은 일리가 있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긴 하군요."

그런 조용한 곰의 표정에 슬쩍 웃은 정성국은 미소를 지우고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보다 올해 작황도 안 좋을 것 같다라...”

이에 조용한 곰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그렇습니다. 조선 팔도로 식량을 운송했던 선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리 싹이 제대로 트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보리농사는 흉년이 확정이라며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하는 농민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그 때문에 조정에서도 원상에게 혹시 다른 곳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고 했답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아무리 원상이라도 우리가 아닌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구하긴 어려울 텐데..."

"그렇지요.“

조용한 곰이 동의하자 정성국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다행이군. 혹시나 해서 수송 선단을 준비했던 건데...“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의 안색도 조금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저도 새김포에 무슨 배가 이렇게 많이 정박해 있나 하고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전하께서 수송 선단을 조직해 두었다는 대답에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용한 곰이 떠나기 전 원상에서 연락이 왔지만 이미 최소한의 식량을 남기고 모두 조선으로 보낸 상태였기에 당장은 돕기 어렵고 이주 선단이 오가면서 본국에서 식량을 가져오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말했었다.

헌데 새김포에 도착하고 보니 정성국이 이미 수송 선단을 조직해 평소보다 더 많은 식량을 보낼 예정이라고 하니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준비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봐야 옮길 수 있는 식량은 얼마 안 돼. 나름 북미왕국의 피해를 감수하고 수송 선단까지 조직했는데도 올 한해 옮길 수 있는 식량은 기껏해야 35만석 수준이더군.“

정성국이 툴툴거리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 해도 어딥니까. 조선은 비축해둔 식량을 많이 풀어서 계속 식량을 풀기 어려운 모양이던데요. 그리고 35만 석이면 이번에 조선에 지원한 양과 비슷한 물량이니...이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조선과 다시 협상할 수도 있겠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조약문을 바라보고 무척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하지."

"예?“

조용한 곰이 놀란 표정을 짓자 정성국이 말했다.

"어차피 얻을 것은 이번 조약으로 다 얻지 않았나. 그리고 처음에야 본국과 협의하지 못한 상황에서 투로시노가 임의로 식량을 반출하는 척했기에 자신이 본국에 책잡히지 않으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면서 이런 요구를 해도 저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이번에도 이러면 저들은 우리를 좋게 보지는 않을 거야."

물론 이번 지원을 통해 몇몇 이권을 가져오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개항장이 생겼고 유민들의 이주가 허락된 이상 차라리 조선과의 관계를 더 우호적으로 만드는 편이 나았다.

특히나 언제까지 북미왕국의 정보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정성국의 손에 있는 조약문만 해도 그랬다.

원래 조약문은 각자의 글로 2부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북미왕국에선 한글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한글로 조약문을 만들면 당연히 조선에선 왜 북미왕국이 언문을 사용하냐며 물을 것이 뻔했기에 이를 피하고자 한문으로 된 조약문을 가져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들과 교류할 때 이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훗날을 대비해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조용한 곰은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수긍했다.

"아...하긴. 그건 그렇군요. 언젠가는 북미왕국의 정보가 알려질 테니..."

"그래. 그러니 이번엔 그냥 무상으로 지원해준다고 하게. 굳이 상환할 필요도 없고.“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바로 쾌속선을 통해 연락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는 전하의 결정이라는 것과 북미왕국의 정보를 일부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응? 지금 알리자고?“

정성국이 조금 당황해 조용한 곰을 쳐다보았지만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조선은 작년보다 상황이 좋지 못한 만큼...“

조선의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한 만큼 북미왕국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 식량을 거부하긴 어려울 테니 이 기회에 북미왕국의 정보를 알리더라도 크게 반발하지는 못할 거라는 계산이 담긴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흐음...“

고심하는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은 덧붙였다.

”그리고 조약문에 적힌 1항의 내용인 조선과 북미왕국은 대등한 국가라고 명시한 것도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훗날에 북미왕국의 정보가 조선에 알려지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넣은 조항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기회에 적당히 꾸며서 알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래야 저들도 왜 북미왕국이 무상으로 지원하는지 납득할 테고요.“

정성국은 그 말에 결단을 내렸다.

”흐음...알겠네. 적당히 다듬어서 이야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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