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235화 (235/850)

235화

"이주 선단이 출발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날이 풀리고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그동안 새김포의 선착장에서 정박하고 있던 천급 함선이 태평양으로 나섰다.

예정대로라면 작년에 개척촌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당시 계속해서 조선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고 계속되는 장마 덕분에 조선 주변의 바다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출항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적당한 기항지라도 있으면 큰 상관은 없었지만, 하와이 이후엔 마땅한 기항지가 없었기에 이주 선단의 안전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나마 왜국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면야 도중에 풍랑을 피해 왜국에 정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비록 아이누 섬이 왜국과 교류를 중단하긴 했지만, 왜국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북미왕국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테고 북미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절대 곱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의 이주 선단이 풍랑을 피하고자 왜국의 항구에 접근한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겨우내 새김포에서 머물던 이주 선단은 날이 조금 풀리기 시작하자 곧바로 출항 준비를 끝내고 개척촌을 향해 출항했다는 관리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주 선단에 식량은 가득 실어 보냈겠지?"

이에 관리청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괜찮으려나?"

항상 이주 선단이 도착하고 다시 출항하는 시기와는 달랐기에 정성국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하자 관리청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분명 괜찮을 겁니다. 천급 함선들의 선장들은 다들 뛰어난 뱃사람들이니 별문제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리청장의 말에 조금은 안도한 정성국은 표정을 풀고 주제를 돌렸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보다 수송 선단은 어떻게 되어가나?"

"이미 편성을 끝내고 열심히 북미왕국 서해안을 돌아다니며 물자들을 수송하는 중입니다."

포로나이로 식량을 보내라는 정성국의 지시에 북미왕국 서해안을 오가며 물자를 수송하던 선박 중 비교적 수송량이 큰 선박들만 따로 수송 선단으로 편성되어 북방항로가 열리기 전까지 북미왕국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죽어라 돌아다니며 물자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보고하는 관리청장이었고 정성국은 이를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했네."

정성국의 칭찬에 관리청장이 슬쩍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올해는 얼마나 많은 식량을 수송할 수 있지?"

정성국의 물음에 관리청장은 이미 계산해두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이번 수송 선단을 통해 포로나이로 수송하는 식량과 기존의 이주 선단이 오가며 수송하는 식량까지 합하면 대략 35만석 가량을 수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리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 결단을 내려 수송 선단을 계획했는데 예상보다는 포로나이로 옮길 수 있는 식량이 적었던 탓이다.

"그래?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수송 선단까지 동원하는데도 생각보다 많진 않네?"

정성국의 말에 관리청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큰 수송선은 많지 않으니까요."

물자 운송의 효율을 위해 북미왕국의 모든 수송선은 기선이었다.

당연히 증기기관의 출력 문제로 인해 커다란 수송선이라 봐야 1천 톤급이 다였고 이것도 최근에 건조한 수송선이나 그렇지 대부분 수송선은 주로 500톤급이다 보니 수송량이 적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만큼 연료를 많이 실어야 했기에 수송 용량은 기존보다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해한 정성국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쩝...어쩔 수 없지. 아무튼, 북방항로가 열리면 곧바로 식량을 실어 포로나이로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이 읽고 있던 마지막 보고서를 집무실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정성국이 내려놓은 보고서와 비슷한 양식의 보고서들이 즐비했다.

"으음..."

정성국은 집무실 책상 위의 풍경을 보고 신음을 흘리며 잠시 고민하다 3개의 보고서를 집어 들어 빼놓고 나머지는 대충 모아 한쪽에 던져 버렸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푸른 안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반기며 따로 빼두었던 3개의 보고서를 꺼내 푸른 안개에게 건네주었다.

푸른 안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건네받고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건..."

정성국이 건네준 것은 군사청의 인사 평가 보고서였고 이 3개의 보고서는 굳건한 바위, 음흉한 여우, 게으른 곰의 상관과 동료, 부하들의 평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정성국은 푸른 안개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장인어른께서는 이 친구들을 잘 아시지요?"

이들은 대추장이었던 조용한 곰, 웅크린 늑대, 지혜로운 나무의 자식들이었고 푸른 안개는 예전부터 이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가끔 보긴 했었다.

가끔 자식 자랑을 듣기도 했었고.

그렇다고 자주 본 것은 아니었기에 잘 안다고 대답하기도 애매했고 정성국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들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린 푸른 안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 안다고 하기는 조금 애매하긴 한데...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보기는 했었습니다. 헌데 이 친구들은 왜?"

정성국은 슬슬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까지 북미왕국은 폐쇄적이었고 외국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한해 철저하게 북미왕국의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는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자들에게 철저하게 교육한 쾌거였고 언어가 다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정보 차단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북미왕국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해 커다란 이득을 보고 있었고 아직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북미왕국의 실상을 파악한다면 유럽의 강국들은 북미왕국을 적대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는 이 신대륙까지 군사력을 제대로 투사할 수 있는 국가인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와는 우호적이었지만 북미왕국이 실제로는 건국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신생 국가이고 인구수 역시 겨우 200만을 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 두 국가는 분명 진지하게 주판을 튕기며 북미왕국과의 전쟁을 고려할 것이 뻔해 보였다.

북미왕국이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두 국가였지만 북미왕국의 영토는 무척 넓었으니 잘만 하면 북미왕국을 공격하고 약탈해 북미왕국이 자랑하는 각종 기술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울 테니 말이다.

이들이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대서양 방면의 2, 4함대를 전력을 다해 키우고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정보기관이 필요했다.

이를 정성국은 차분히 푸른 안개에게 설명했고 푸른 안개는 이를 다 듣고 자신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흐음...정보기관이라...전하의 말씀을 들어보니 아주 중요한 기관 같은데...이런 젊은 친구들을 총 책임자로 앉히실 생각이십니까?"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성국 역시 정보기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 정보기관의 수장을 정하는데 무척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평국에게 맡기면 정성국이야 편하겠지만 현재 정평국이 맡은 일이 워낙 많은 상황이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비슷한 이유로 다른 청장들 역시 논외였고.

그래서 군사청의 선임 조장 이상급의 인사 평가 보고서를 모두 살펴본 정성국이었고 그나마 눈길이 가는 것이 굳건한 바위, 음흉한 여우, 게으른 곰이었다.

예전에 이들을 먼발치서 보긴 했었고 게으른 곰은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도 있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기에 푸른 안개를 부른 것이고.

"뭐 나이야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제 막 창설하는 기관인 만큼 더더욱.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은 호위대 소속으로 두고 부릴 생각이라 이 친구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정보기관은 아무래도 생소할 수밖에 없기에 당분간은 정성국의 친위 부대라 할 수 있는 호위대 소속으로 두고 정성국이 옆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줄 생각이었다.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신음을 흘리며 머뭇거렸다.

"으음..."

"그보다는 능력과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이정호 탐사대장의 보고서나 군사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들 능력도 출중하고 북미왕국을 배신할 리도 없어 보이고요."

푸른 안개는 정성국의 설명을 듣고 이 정보기관이 당장은 단순히 북미왕국의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기관이지만 훗날에는 무척 중요한 기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기관의 수장인 만큼 믿을 수 있는 개척촌 출신을 써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내심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꼭 한 명을 지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들을 모두 만나 본 장인어른께 조언을 듣고 싶었어요."

정성국이 자신 같은 원주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된 푸른 안개는 정성국에게 조언해주기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자신의 기억과 대조해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세 녀석 모두 영리한 녀석들이고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녀석들입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업무 성향을 생각하면 일단 굳건한 바위와는 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정성국 역시 보고서를 통해 내심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가요?"

"예. 굳건한 바위는 좀 우직한 면이 있는 녀석이라...전하께서 말씀하신 임무에는 썩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나무의 이야기로는 굳건한 바위는 지금 일에 무척 만족한다고 들었고요."

이에 정성국은 굳건한 바위의 보고서를 치우며 질문했다.

"그럼 나머지 둘은요?"

푸른 안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는...흐음...나쁘지 않을것 같군요. 게으른 곰은 조금 느긋한 면이 있어서 살짝 걸리기는 하는데...또 시키면 일은 잘하는 녀석이다보니..."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예전에 만났었던 게으른 곰을 기억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가요? 둘 다 괜찮다라...그럼 둘 다 호위대로 배속시켜서 일을 맡겨보죠."

이에 푸른 안개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이 둘을 경쟁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경쟁이 안 될 텐데요."

푸른 안개가 기억하는 둘이라면 느긋한 성격의 게으른 곰은 의욕 넘치는 음흉한 여우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 설명하자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경쟁이라기보단...당장 정보기관을 조직하고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일이 정말 많을 테니 적당히 나누려는 거지요. 그리고 어차피 나중엔 여러 기관으로 쪼갤 생각도 하고 있으니."

정보기관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 정보기관을 여러 개로 분리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정보기관의 수장을 믿는다 해도 정보의 독점은 무엇보다 위험했기에.

그런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둘을 불러 맡기는 것도 좋을 겁니다. 음흉한 여우의 등쌀에 게으른 곰이 움직일 테니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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