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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33화 (233/850)

233화

샤쿠샤인은 포로나이의 행정청 집무실에서 정신없이 여러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조용한 곰이 들어왔다.

투로시노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바빴지만, 조선과의 협상이 끝난 이상 조용한 곰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투로시노를 돕자니 그가 맡은 일은 주변 부족과의 협상이 대부분이라 아이누어를 하지 못하는 조용한 곰은 제대로 돕긴 어려웠고.

결국, 날이 따뜻해져서 북방항로가 열리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조선의 상황을 파악할 겸 조선에 다녀온 선박들이 도착할 때마다 조용한 곰은 선착장에 나가 선장들과 대화하며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한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방문하자 샤쿠샤인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런 샤쿠샤인의 시선에 조용한 곰은 슬쩍 시선을 피했고 이에 샤쿠샤인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번에도?"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방금 선착장에 도착한 배에서도 이주민들이 줄줄이 내리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샤쿠샤인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하아...이것 참. 적당히 좀 보내지. 벌써 포로나이에 도착한 유민들만 3만이 넘어가는데..."

작년 겨울부터 개항장으로 유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개항장에서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유민들을 감당하기 버거웠기에 유민 일부를 개항장에서 연료를 보급하고 포로나이로 돌아가려는 배에 태워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민들이 포로나이에 도착했고 처음 포로나이의 행정청에서는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어느 정도 준비해 두었기에 유민들을 환영하며 신속하게 준비해 둔 물자들을 나눠주며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식량을 싣고 조선으로 떠났던 배들이 귀환하면서 유민들을 한가득 싣고 돌아오기 시작하자 점점 작은 규모의 포로나이 행정청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홋카이도에 있던 샤쿠샤인이 홋카이도의 일은 오니비시에게 맡기고 행정청 관리 몇 명과 함께 포로나이 행정청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샤쿠샤인의 지원에 포로나이 행정청은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유민들이 배를 타고 포로나이에 도착하자 더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포로나이가 아이누 섬에서 가장 발달한 장소이고 원상의 배들이 개척촌에서 포로나이로 옮겨간 이후 개척촌에서 포로나이로 이주한 사람들도 꽤 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채 3만이 되지 못했다.

헌데 3만이 넘는 유민이 포로나이에 단기간에 유입된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포로나이에 도착한 배에서 또다시 유민들이 가득 도착했다고 하니 샤쿠샤인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샤쿠샤인의 반응에 쓴웃음을 머금은 조용한 곰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문제는 선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개항장에도 계속해서 유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유민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샤쿠샤인은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허...확실히 조선에 인구가 많긴 많군요. 우리가 나름 식량을 지원해주었고 조선에서도 자체적으로 비축하고 있던 식량 일부를 풀어 백성들을 구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그런데도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항장에 유민이 몰려든다니...그 소리는 다른 지역도 다 비슷하다는 것 아닙니까?"

이에 조용한 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선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우리 선박들이 드나드는 포구는 식량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하다더군요."

그 말에 샤쿠샤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허허...인구가 많은 것 자체는 참 부러운 일인데..."

북미왕국은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렸기에 조용한 곰은 내심 동의했다.

하지만 조용한 곰은 이를 내색하지 않고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우리도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후 식량 사정이 무척 좋아져서 인구가 점차 늘고 있지 않습니까. 이곳도 그렇고 본국도 그렇고. 그러니 너무 부러워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하하. 그렇지요."

조용한 곰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인구가 줄어들던 아이누인들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후 풍족한 식량과 위생 교육으로 인해 유아 사망률이 줄어들면서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행정청에 소속된 샤쿠샤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누인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후 북미왕국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어 샤쿠샤인 자신도 그렇고 오니비시도 워낙 일이 많아 죽겠다고 항상 투덜거렸지만 그런데도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점차 아이누인들의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올라오는 보고서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샤쿠샤인은 조용한 곰의 말에 점차 발전하고 있는 북미왕국과 아이누인들을 떠올리며 기운 내서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여는 샤쿠샤인이었다.

"현 상황에 중요한 것은 유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솔직히 유민들을 더 수용하긴 어렵습니다. 지금도 한계에 도달했어요. 너무 많은 유민이 몰려온 탓에 통제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최근 포로나이를 자주 돌아다니는 조용한 곰이었기에 샤쿠샤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예정을 조금 바꿔야겠습니다."

샤쿠샤인의 말에 조용한 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원래는 유민들을 잠시 이곳에서 머물게 하다가 본토로 모두 보낼 예정이었잖습니까."

그 말에 조용한 곰은 샤쿠샤인의 의도를 파악한듯했다.

"아...설마?"

"예. 유민들의 입장에선 본토로 가는 편이 좋겠지만 너무 많은 유민이 몰려든 탓이 저들을 당장 본토로 옮기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개항장의 상황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유민들이 포로나이로 몰려올 것 같으니 일부 유민들을 주변 여러 지역에 정착시키도록 하지요."

지금 발생하는 문제는 포로나이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많은 유민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물론 샤쿠샤인 역시 인력이 부족한 본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조선 유민들의 입장에서도 이곳보다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싶어 북방항로가 열릴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유민은 이미 수용한계를 넘어섰고 또 앞으로도 유민들이 도착할 테니 남은 방법은 유민들 일부를 이곳에 정착시키는 방법뿐이었다.

조용한 곰은 샤쿠샤인의 말에 약간 아쉬움을 표했지만 결국 샤쿠샤인의 뜻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개항장에서 너무 많은 유민을 보낸 탓에 이주 선단으로 이주시킬 수 있는 인원을 이미 넘은 상태이기도 했고.

조선과 조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유민들의 이주가 가능해졌기에 조용한 곰은 이주 선단을 통해 최대로 옮길 수 있는 인원을 알아본 결과 1년에 잘해야 3만 명 내외였다.

그러니 그 이상은 이곳에 정착시키는 것이 그들에게도 나아 보였다.

본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1년 이상을 이곳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흐음...그 방법 외엔 다른 수가 없긴 하군요. 허면 어디로 보낼 생각입니까?"

조용한 곰이 동의하자 샤쿠샤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에 일부를 정착시키고...포로시로와 마쓰마에 항으로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고민하다 반대했다.

"흐음...홋카이도로 보내는 것은 동의합니다만 마쓰마에 항으로 보내는 것은 썩 좋은 생각 같지 않습니다."

샤쿠샤인은 조용한 곰의 말에 자신이 놓친 것을 파악했다.

"아. 막부를 생각하지 못했군요. 하긴...조선 유민들은 일단 복식부터가 아이누인들과는 다르니..."

막부와의 교류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어부들을 보내 먼발치서나마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막부에게 괜한 빌미를 줄 이유는 없었기에 샤쿠샤인이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차라리 홋카이도 북부로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포로나이의 맞은편으로 보내자는 조용한 곰의 의견에 샤쿠샤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라...그게 낫겠군요. 그럼 그렇게 하고...카무이 반도로도 좀 보냈으면 좋겠는데..."

샤쿠샤인의 말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찬성이지만 당장은 어렵겠지요. 북방항로가 열린 이후에나 가능하니."

이에 샤쿠샤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척이나 추운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불쌍한 유민들을 애도하며 중얼거렸다.

"예. 카무이 반도로의 이주는 이곳에 도착하는 유민 중 본국으로 떠나는 이주 선단에 타지 못한 유민들을 틈틈이 보내야겠네요."

* * *

정태화는 퇴청 후 사랑방에서 자신을 찾아온 감성우가 전해준 이야기에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허어. 벌써 그렇게 된 건가? 북미왕국에서 60만 석을 다 운송했다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식량을 실은 배가 포로나이 항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곧 각지에서 장계가 올라올 거로 생각합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아쉬운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간 북미왕국이 지원해 준 식량 덕에 백성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 이거 아쉽게 되었어."

정태화의 중얼거림에 감성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이에 정태화는 아쉬운 표정을 지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닐세. 자네를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쉬워서 한 이야기야. 그래도 원상에서 북미왕국과 잘 연결해준 덕분에 겪어보지 못한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피해를 최소화하지 않았나."

정태화의 말에 감성우는 고개를 숙이며 급히 입을 놀렸다.

"그게 어디 원상과 북미왕국 덕분이겠습니까. 저희 원상이 푼 식량은 얼마 되지 않고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식량도 고작 60만 석에 불과한데요. 이게 다 주상 전하와 영상 대감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결단 덕분이지요. 무려 군량미 일부도 백성들을 구호하기 위해 풀고 있지 않습니까."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자네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군량미는 차마 손대지 못했을 거야."

그동안 감성우는 정태화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중에는 북미왕국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감성우야 북미왕국의 상황과 정성국의 성향을 잘 알기에 한 이야기였지만 정태화는 이를 북미왕국에 인구가 부족해 유민의 이주를 허락한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의미로 해석했다.

북미왕국이 비록 영토에 비해 인구는 적었지만, 이들의 무기는 대단했고 전에 그런 무기로 무장한 병력 5천이 아이누 섬에 주둔하고 있다는 감성우의 이야기에 정태화는 북미왕국을 믿고 군량미를 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고 말이다.

"그렇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감성우를 보고 정태화는 흐뭇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원상이 먼저 나서서 식량을 푼 덕분에 다른 상단들도 조금이나마 재물을 내놓기도 했고 몇몇 선비들도 상단마저 나라의 심각함을 알고 보유한 식량을 푸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면서 구휼미를 풀기도 했으니."

실제로 이 때문에 지방 양반들이 원상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서웠기에 감성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그랬었죠."

정태화는 그런 감성우를 보고 대소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그 당시 동참했던 선비들은 비록 집안에 재물은 많지 않을지언정 명망 높은 선비들이었어. 그리고 조정 대신들도 자네들을 좋게 보고 있고. 그러니 부덕한 양반들이 원상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한들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연조차 원상을 무척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술년은 계속된 여러 재난으로 인해 역대 최악의 대기근이 예상되었지만, 원상 덕분에 양반 일부가 비축하고 있던 식량 일부를 풀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더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상이 기특할 수밖에 없었고.

듣고 싶던 말을 정태화가 이야기하자 감성우는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보다 원상의 배를 이용해 다른 곳에서 식량을 구할 길이 정말 없겠는가?"

정태화가 이러는 것은 올해도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조선 팔도에서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겨우내 심었던 보리의 싹이 쑥쑥 자라야 할 시기인데 제대로 싹이 자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작년 겨울에 겨울 장마로 인해 보리 싹의 태반이 죽었다는 뜻이라 조정에서는 올해도 기근이 닥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올해 기후가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보리농사가 흉년이라면 결국 벼를 심고 수확할 때까지는 제대로 된 수확물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감성우 역시 원상을 통해 그런 상황을 이미 파악했기에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일단 배를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확답하지 못하는 감성우를 보고 정태화는 내심 낙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래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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