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북미왕국에서는 그동안 조선산 면포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선 유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아메리카 원주민 중 젊은 층들이 기존의 복식보다는 북미왕국의 복식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너도나도 개척단에 소속되어 고향을 빠져나가면서 목화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조선에서 수입하는 면포의 수요량이 폭증하며 더는 조선에서 수입하는 면포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정성국은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섬유 산업을 일으킬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섬유 산업은 의외로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에 그동안은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나 이제 식량 생산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현재 북미왕국이 장악한 영역 중 남부 지역 중 애리조나와 텍사스 지역은 목화 농사를 짓는데 적합한 기후이기도 했고 뉴멕시코 지역은 양모를 얻기 위해 양을 목축하기 적당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성국은 개척촌 시절 집필했던 방적기와 직조기의 원리를 설명해 놓은 책을 꺼냈다.
정성국이 환생한 이후 조선 여인들이 물레와 베틀을 이용해 직접 면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보고 너무 손이 많이 간다는 생각에 면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방적기와 직조기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고 이 책을 집필했었다.
전생의 방적기와 직조기의 원리들을 상세히 적어 두었기에 이를 가지고 장인들이 연구한다면 아마도 전생의 방적기와 직조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보았지만, 이 책을 집필하던 도중 정성국은 생각을 바꾸어 결국 집필한 책을 장인들에게 넘기지 않고 책장 한쪽에 꽂아 두었다.
조선은 면포를 화폐 대용으로 이용했기에 원상에서 면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 분명 문제가 불거지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면포 공방을 크게 세우면 세울수록 면포 값이 내려가 아낙네들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였고.
그렇기에 책장 한쪽에 꽂아 두었다가 드디어 이 책을 꺼내 박기동을 집무실로 불러 이 책을 건네주며 방적기와 직조기를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하자 박기동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책을 유심히 읽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성국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정성국은 의아했지만, 별말 하지 않고 박기동을 따라나섰고 연구청 소속의 연구소에 도착해 박기동의 안내를 받아 연구소 구석의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성국은 건물 안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방적기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사를 토했다.
"와...이걸...이미 발명했었다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이 무척 만족스러운지 박기동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2년 전쯤에 첫 시제품을 만들었고 눈앞에 보이는 이 녀석은 시제품을 꾸준히 개량한 녀석입니다. 더 개량해서 스승님께 보고하려고 했었는데..."
"허어..."
정성국은 증기기관의 동력에 의해 열심히 회전하며 실을 만드는 방적기에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거의 뮬 방적기 이상인데? 왜 기동이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짓나 했더니...'
방적기는 섬유를 사용해 실을 뽑아내는 기계로 가장 전통적인 방적기는 바로 물레였다.
이 물레를 인류는 수천 년간 사용하다 18세기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한 사람이 한 번에 8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를 개발하면서 실을 대량 생산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다만 이 제니 방적기는 인력을 사용하는 방식이었기에 한계가 있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수력을 이용한 새로운 방적기를 만들었고 제니 방적기와 이 수력 발전기의 장점을 합친 것이 바로 뮬 방적기였다.
헌데 정성국의 눈앞에 있는 이 방적기는 증기기관을 사용해 꾸준히 여러 가닥의 실을 계속해서 뽑아내고 있었고 이는 정성국이 집필한 책에서 설명한 방적기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발전된 형태였으니 정성국은 내심 북미왕국의 기술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박기동이 정성국이 건네준 책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박기동은 놀란 표정으로 방적기를 살펴보는 정성국에게 다가와 방적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방적기는 기존의 물레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은 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회전하고 있는 방추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겠지. 저 방추만 해도 20개 가까이 되어 보이는데?"
이에 박기동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예. 정확히 24개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에 24가닥의 실을 뽑아내는 거고 물레와 비교하면 24배의 효율이죠. 뭐 이건 단순 비교고 실제 효율은 뭐..."
"허허허..."
박기동의 말처럼 인간이 손으로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는 것과 기계를 사용해 실을 뽑아내는 것은 실을 뽑아내는 속도만 따져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저 한 가닥의 실을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물레와 비교하면 몇 배의 효율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저 방적기 하나로 기존 방식에 거의 100배의 물량을 뽑아낸다라...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괜히 잉글랜드가 이런 기계를 이용해 대량으로 면직물을 생산해서 막대한 부를 쌓은 것이 아니군.'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실을 뽑아내고 있는 방적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박기동이 정성국을 보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되지요. 스승님. 저 방으로 가시지요."
"음?"
정성국은 박기동의 안내로 그 옆방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보이는 커다란 직조기에 정성국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헐..."
정성국은 자동으로 북이 움직이며 천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히죽거리며 웃는 박기동을 보고 물었다.
"저거 증기기관을 이용한 직조기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방금 보신 방적기를 통해 대량으로 실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량으로 생산된 실을 인력을 사용해 천을 짜는 것도 비효율적으로 보여서 증기기관의 힘을 이용해 대량으로 천을 직조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생과는 반대의 흐름인 건가?'
직조기는 실을 이용해 천을 짜는 기계로 방직기라고도 불리며 전통적인 직조기는 바로 베틀이었다.
인류는 이 베틀을 수천 년간 사용해왔고 그러다가 18세기 잉글랜드의 존 케이가 베틀의 핵심 부품인 북(shuttle)을 스프링을 이용하는 나는 북(flying shuttle)을 개발하면서 방직기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잉글랜드의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동력을 사용해 직조기를 움직이는 역직기를 개발하면서 직조 속도가 베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직조기의 발전 덕분에 실의 수요가 폭증했고 이 때문에 방적기가 개발되면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고.
전생에서는 이러한 흐름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흐름이었기에 정성국은 흥미롭다는 듯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천을 짜는 북을 바라보았다.
그때 박기동이 한쪽에서 곱게 접힌 천을 가져와 정성국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저 직조기를 이용해 만든 천입니다."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박기동이 가져온 천을 살펴보고 손으로도 만져보았다.
"흐음...생각보다 품질이 좋구나."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무리 대량 생산이 가능하더라도 품질이 나쁘면 의미가 없잖습니까."
물론 품질이 조금 나쁘더라도 대량 생산으로 생산 가격을 확 내린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긴 했지만 장인 정신이 투철한 박기동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흘려들을 것이 뻔했기에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정말 고생했다."
정성국인 이 방적기와 직조기가 얼마나 대단한 발명품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발명품들로 인해 직물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옷의 가격이 내려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3가지 요소인 의식주 가운데 의복 부분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박기동은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진 못한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상돈이의 말을 듣고 잠깐 틈날 때 연구한 건데요 뭐."
"그래?"
"예. 아. 그리고 평국이도 슬슬 직물의 수요가 늘어날 테니 이를 대비해야 한다면서 물레와 베틀에 증기기관을 접목할 수 없느냐고 요청하기도 해서요."
"그랬구나."
자신이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연구청의 연구소에 틀어박혀 사는 박기동이 이것들을 발명해 조금 의아했는데 이상돈과 정평국의 요청이라는 말에 이해가 갔다.
둘은 북미왕국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물품을 다루고 북미왕국인들의 생활상을 잘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의복의 수요가 폭증할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박기동에게 이야기해 대비했던 것이다.
이는 정성국의 개입 없이도 알아서 북미왕국이 운영되고 발전해간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천을 짜는 직조기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보다 직물을 대량 생산할 길이 열렸으니...이제는 원료의 수급이 문제겠구나."
이에 박기동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거야 뭐...제 소관은 아니니까요."
어차피 박기동은 방적기와 직조기를 발명한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긴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차피 그동안은 직물 자체를 수입했다면 이제는 원료를 수입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다 문득 정성국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항을 떠올리며 급히 박기동에게 말했다.
"아. 이젠 우리 북미왕국도 목화나 양모를 일부 생산할 생각이니...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조면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가뜩이나 북미왕국의 인구가 적은 상황에서 일일이 사람 손으로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것은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다.
이를 지적하자 박기동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긴...효율을 생각하면 그게 낫겠네요. 알겠습니다. 스승님. 어차피 저 방적기와 직조기를 계속해서 연구, 계량하는 부서를 만들 생각이었으니 그쪽에 이야기해두도록 하지요."
"그래. 그러렴. 그리고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도 만들어보고."
면직물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목화를 재배하고 수확하고 씨를 분리하고 실을 만들어 직물을 직조해야 했으니.
헌데 방적기, 직조기를 만들었고 조면기도 개발할 예정이었으니 당연히 남은 목화 수확 문제도 기계를 통해 들어가는 인력을 줄이고 싶은 정성국이었다.
특히나 계속된 연구 개발로 현재 경운차를 이용해 벼나 밀 같은 작물은 기계를 이용해 손쉽게 수확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운차로 작물을 수확하는 기능을 넣기 위해 고생한 것이 떠올랐기에.
"끙..."
정성국은 그런 박기동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그리고 혹시 저거로 비단도 짤 수 있냐?"
정성국의 물음에 툴툴거리던 박기동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비단이요? 글쎄요...이론상으로야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 말에 정성국은 반색하며 명령했다.
"네가 만든다는 그 부서에 이야기해서 아예 면직물, 모직물, 견직물 전용 방적기와 직조기를 만들어보라고 해라."
이에 박기동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음? 모든 북미왕국 백성들에게 비단옷이라도 입히시려고요?"
"그럼 안 되냐?"
"하하하."
정성국은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장차 북미왕국이 발전하며 북미왕국인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고 박기동에게 말했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생사를 사와 비단으로 가공해 유럽에 팔 수만 있다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을걸?"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도자기처럼 말이지요?"
"그렇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청나라에 원하는 교역품은 크게 도자기, 비단, 차였다.
그리고 이제 유럽인들은 도자기는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청나라 도자기와 동급으로 여기는 중이었고 이 때문에 아시아 무역을 하는 유럽의 각국은 이제 청나라에서 도자기를 구하기보단 비단과 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성국은 청나라의 비단까지 노리고 있었다.
'물론 비단이야 원재료인 생사를 계속해서 청나라에 사들여야 하는 만큼 청나라로 향하는 은 일부를 가져오는 것에 불과하지만...그것만 해도 장난이 아닐 테고...'
"흐음...그럼 당분간 제가 그 부서를 관리하며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보겠습니다."
박기동 역시 북미왕국이 도자기로 인해 얼마나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북미왕국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고.
헌데 잘하면 유럽에 팔만한 교역품이 또 하나 생긴다는 뜻이었기에 박기동은 이 일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정성국은 박기동을 믿음직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하. 그래. 부탁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