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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28화 (228/850)

228화

원상의 이천호 대방은 김명규의 보고에 살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번 달에 개항장으로 몰려든 유민만 4천 명이 넘었다고?"

"그렇습니다. 대방 어르신."

김명규의 대답에 이천호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원상에서, 그리고 북미왕국이 가져온 식량을 관에서 구휼미로 조선 팔도에서 풀기에 이곳까지 오는 유민들이 많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더불어 개척촌에서 이제는 개항장으로 바뀐 이곳이 아직 조선 내에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헌데 개항장으로 계속해서 유민들이 몰려드는 상황이었으니.

'그동안 꾸준히 보부상들을 통해 유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말이 흘러나갔겠지만...갑자기 이렇게 몰려들 줄은 또 몰랐군. 하긴...그만큼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이천호가 김명규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흐음...조선의 사정이 워낙 좋은 편은 아니니 이해는 가는데...지금 개항장 내에 머무는 유민이 몇 명이지?"

"5천 명입니다. 덕분에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단기간 머무르는 숙소가 가득 찼습니다."

옛 개척촌은 정성국이 떠난 이후 꾸준히 유민들을 받아들여 북미왕국으로 보냈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한 곳은 원상 소속과 그 가족들이 머무는 구역이었고 또 한 곳은 북미왕국으로 떠날 유민들이 잠시 머무는 숙소와 식당, 목욕탕 등이 즐비한 구역이었다.

유민들은 이곳에 머물며 깨끗하게 씻고 원상이 주는 양질의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한 뒤 배를 타고 이동했기에 험한 뱃길에도 버틸 수 있었고.

원래 이 시기 이 구역에서 지내는 유민들은 이주 선단을 타고 모두 떠나 텅 비어있을 시기였지만 올해는 기후가 심상치 않고 작물이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하자 예전 보부상들을 통해 알게 되었던 개척촌을 향해 유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마지막 이주 선단이 모두 떠난 이후에도 개척촌에는 유민들이 바글바글했기에 묻자 역시나 예상대로 개항장에 마련된 유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는 가득 찼다는 보고에 이천호는 안타까워하며 현 유민들의 상황을 물었다.

"흐음...그럼 지금 몰려드는 유민들은 모두 외곽에 마련해둔 임시 야영지에 머무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유민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아무리 옛 개척촌 행정부와 원상이 정성국의 명령을 받고 유민들을 위해 천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비축하고 인근에 공터를 만들어 두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유민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릴수록 각종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이천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김명규에게 질문을 던졌다.

"개항장에 머무는 유민들의 접종은 끝났나?"

"그렇습니다."

김명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천호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럼 접종이 끝난 유민들을 포로나이로 보내게. 어차피 식량을 내려놓고 포로나이로 돌아가기 위해 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이곳에 들르는 북미왕국의 배들이 많으니 말일세. 관리들에겐 내가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유민들을 이주하는 일은 북미왕국에서 관리를 보내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북미왕국에선 일손이 부족했기에 원상에서 이를 대리하고 있었다.

일종의 하청의 개념이었다.

조선에서는 북미왕국의 관리들이 직접 조선 유민들과 접촉하는 것보다는 조선 상단인 원상이 이 일을 대리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고.

현재 조선이 북미왕국에 도움을 받는 상황이다 보니 북미왕국 관리는 상대하기 껄끄럽게 여겼지만, 원상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원상이 유민들의 이주 업무를 대리하고 있었기에 이천호가 나서서 조선 관리들에게 말해둘 테니 개항장에 들어온 유민들을 일단 포로나이로 이주시키라는 이천호의 명령에 김명규는 반색했다.

포로나이를 가끔 다녀온 김명규는 그곳에도 꽤 많은 유민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곧바로 유민들을 배에 태워 포로나이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이천호는 계속해서 지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임시 야영지에 머무는 유민 중 조선을 떠나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유민들로 채우고. 상황이 상황이니 조선 관리들도 적당히 확인하고 넘어갈걸세."

개항장에 잡인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왜관처럼 주변을 높은 돌담으로 둘러야 했지만, 예전 개척촌의 영역 전체를 개항장으로 지정했기에 이 넓은 지역 전체를 빙 두르는 높은 돌담을 건설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통은 노역으로 해결할 문제이지만 조선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백성들이 굶주리는 판국에 노역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나마 개항장 안쪽의 옛 개척촌 주민들은 건장한 편이었지만 이들은 원상 소속이거나 유민 출신으로 이미 북미왕국인이 되어 버렸기에 함부로 노역을 부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관리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때 이천호가 나서서 일단은 원상에서 간단한 목책을 두르는 것으로 합의했고.

그렇게 이천호가 먼저 이곳에 파견된 조선 관리들을 도왔기에 이곳에 파견된 조선 관리들도 개항장의 출입을 깐깐하게 따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김명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김명규가 대답하고 일어나 방에서 나가려 할 때 이천호는 혹시나 해 말했다.

"아. 그리고 계속해서 유민들이 몰려드니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철저히 감독하라고 하게."

전염병을 우려해 개항장 주변에 나누여 임시 야영지를 만들어 두긴 했지만 계속 사람이 몰리는 터라 아무래도 이천호는 불안해했다.

이에 김명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람이 많이 몰릴수록 무서운 것이 바로 전염병이었기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기에.

"물론입니다. 그 부분은 자경단을 만들어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정성국은 연말에 가족들과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정원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 정성국은 정원에 서서 잠시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1671년인가? 시간 참 빠르네..."

하지만 정성국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조선과 협상을 하기 위해 떠난 조용한 곰이 풍랑에 의해 발이 묶였다가 제물포에 도착해 영의정인 정태화와 협상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끝으로 쾌속선의 운항이 종료되었기에.

물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라면 투로시노를 잘 이끌어 조선의 문호를 열 것이라고 믿긴 했지만, 지도자라면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해야 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조용한 곰이 정성국이 원하는 대로 조선과 협상을 마친다 하더라도 포로나이에 비축된 식량으론 조선 백성들의 굶주림을 막을 수 없었기에 안타깝기도 했다.

"문제는 내년인데...괜히 경신 대기근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 영 걱정스러운데..."

경신 대기근은 말 그대로 경술년에서 신해년까지 2년에 걸쳐 대기근이 발생한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내년에도 조선의 작황이 썩 좋지 못할 것은 뻔했는데 내년에 북미왕국에서 조선에 지원할 수 있는 식량은 무척 적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곰이라면 분명 뒤에서 투로시노를 잘 이끌어서 조선과 협상을 끝낼 거야. 그러면 포로나이에 비축된 식량 대부분은 조선으로 옮겨질 테고. 그러니 내년에 조선에 보낼 식량은 기껏해야 이주 선단으로 옮길 수 있는 25만석 정도가 다인데...흐음.'

정성국이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뭐 하세요? 오라버니?"

정성국은 전아라의 목소리에 표정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아. 왜 나왔어? 추운데."

정성국이 얇은 옷차림의 전아라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전아라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찾으려고 나왔죠. 헌데 여기서 왜 달을 보고 계세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이에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난방을 너무 강하게 해서 잠시 머리 좀 식힐 겸 나와 있었던 거야."

"흐음..."

전아라는 뚱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정말이라니까?"

"으음....."

계속되는 부인에 전아라의 눈빛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정성국은 볼을 긁적이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그냥 조선이 쪼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제야 털어놓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다가와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정성국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분명 최선을 다하셨어요. 오라버니가 만약을 대비해 조선과 포로나이에 비축한 식량으로 분명 많은 조선인이 굶주림을 면했을 거예요."

어느새 차가워진 손에 전아라의 온기가 전해지자 정성국은 그 온기에 위로받는 느낌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럴까?"

이에 전아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요."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자신을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했고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포로나이에 비축한 식량은 조선으로 옮겨져 이 식량으로 전생에서 굶어 죽어갔던 조선인 일부라도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더불어 원상에 의해 이미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유민들은 이곳에서 굶을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전생에 비하면 최소한 10만 명은 확실하게 살아남은 셈이고.

이에 정성국의 표정이 조금 나아지자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북미왕국 백성들의 어버이세요. 조선 백성들만 신경 쓰지 마시고 오라버니를 어버이로 여기는 북미왕국 백성들을 신경 쓰셔야죠."

전아라의 말은 정론이었기에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전아라는 잠시 정성국을 바라보다 제안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이 정 걱정된다면 북미왕국의 선박을 일부 차출해 식량을 싣고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어때요? 분명 내년에도 힘겨운 보릿고개가 될 테니까요."

"음?"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아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한 3달 정도는 북미 서해안의 물류가 사실상 마비되긴 하겠지만...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테고요."

전아라도 조선 출신이긴 했지만 전아라는 조선에 별다른 애착은 없었다.

오히려 개척촌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고 개척촌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북미왕국으로 이주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 조선의 기근으로 인해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었기에 크게 안타까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성국이 조선 백성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있었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걸리는 표정이었기에 오로지 정성국이 가장 중요한 전아라는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전아라의 마음을 짐작하고 피식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아까는 북미왕국 백성들을 신경 쓰라더니?"

하지만 전아라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에겐 오라버니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런 전아라의 말에 내심 감동한 정성국이었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투덜거렸다.

"야. 너도 북미왕국 백성들의 어머니라는 걸 좀 자각하지 그러냐?"

하지만 전아라는 오라버니는 뭘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북미왕국 백성들의 어머니는 저뿐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조금 신경 덜 써도 돼요."

생각지도 못한 전아라의 대답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그 말도 맞긴 맞네."

그때 뒤쪽에서 하얀 들꽃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성국을 찾으러 나간 전아라가 돌아오지 않자 나와본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전하? 어우. 추워라."

정성국은 갑작스럽게 밖에 나와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떠는 하얀 들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또 다른 어머니네?"

"풉."

"예?"

이에 전아라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고 하얀 들꽃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성국은 그런 두 여인이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하하하. 아니야. 춥다.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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