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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26화 (226/850)

226화

정태화는 사랑방으로 찾아온 감성우가 한 말에 반색했다.

"허어? 그래? 벌써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싣고 왔다고?"

이미 한 해의 수확물을 걷을 시기가 왔건만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장계에 따르면 조정 대신들의 예상대로 어느 한 곳도 평작인 곳이 없었다.

대략 360여 곳의 조선 팔도 모든 고을이 흉작이라는 보고에 이미 조선 팔도에서 각종 재해로 인한 피해 장계가 계속해서 올라와 어느 정도 이를 예상하였고 이 때문에 해금령도 풀고 북미왕국과 협상을 하며 만약을 대비했던 조정 대신들조차 내심 충격을 받았고.

정태화 역시 대기근이 도래할 것을 우려해 이에 대한 대비를 적극적으로 했지만, 막상 조선 팔도 전체에 대흉년이 닥치자 내심 충격을 받았고 앞으로의 일에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감성우가 방문해 북미왕국이 벌써 식량을 가져오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미 조정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는 감성우는 살짝 미소지으면서 답했다.

"그렇습니다. 함경도와 강원도에 북미왕국의 배들이 식량을 가득 싣고 도착해 식량을 내려놓고 있다고 개척촌, 아니 개항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허어...상인들의 소식이 빠르다더니..."

아직 장계가 올라오지 않았는데 이미 원상은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태화는 감탄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가져오는 식량을 통해 백성들을 구휼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겼다.

조선 조정에서는 북미왕국과 조약을 맺은 후 조선 팔도의 관찰사들에게 이를 알리고 삼태극기를 달고 있는 북미왕국의 배가 출몰하면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들이 싣고 온 식량을 받아 이 식량을 사용해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북미왕국에서 가져오는 식량은 많지 않았기에 상황을 봐서 추가로 조정에서 비축하고 있던 식량 일부와 만약을 대비해 비축하고 있던 군량미 일부도 구휼미로 사용해 내년 봄까지는 조선 팔도 곳곳에 진휼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는 정태화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조정에서 비축하고 있는 식량 일부를 푸는 것은 다른 대신들도 동의했지만, 군량미의 경우는 이견이 있었다.

군량미를 함부로 풀었다가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비상시라는 정태화의 강력한 주장과 만약의 경우가 벌어진다면 북미왕국이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정태화의 말에 다른 대신들도 군량미를 푸는 것에 결국 동의했다.

투로시노가 정태화에게 했던 이야기는 정태화를 통해 이연과 조정 대신들도 알게 되었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청국과 비견될 정도의 대국으로 생각했던 북미왕국의 속사정을 조금 알게 되자 이연과 대신들은 내심 안도했다.

당장 조선의 사정이 급박해서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북미왕국을 내심 경계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북미왕국은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대폭 줄었고 이를 복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조금은 안심한 것이다.

더불어 북미왕국 사절단이 건넨 예물 중 화려한 장식의 단총을 정태화가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던 이연과 조정 대신들은 북미왕국이 인구는 적을지언정 군사력은 대단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태화의 말처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북미왕국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조선 유민들 때문에라도 조선을 도우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연과 조정 대신들은 북미왕국의 도움을 강력하게 믿고 있다기보단 실제로 청나라나 왜국이 조선을 쳐들어올 가능성을 무척 낮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북미왕국의 배가 식량을 가득 싣고 조선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보다 원상의 소식이 더 빠르니 정태화는 감탄했고.

감성우는 그런 정태화의 반응에 슬쩍 웃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북미왕국에선 제물포에서 협의한 대로 식량을 분배해 조선 팔도에 운송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다만 북미왕국에서 개항장을 통해 알리기를 태풍에 의해 몇몇 배가 묶인 상황이라 식량 운송이 조금 지체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말에 정태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허어...그래? 얼마나?"

"큰 문제만 없다면 내년 2월까지는 모든 식량을 운송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대여섯 번은 오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상황을 봐서 조정에서 비축한 식량도 함께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흐음...그 정도야 큰 문제는 없겠군."

"다만 남쪽에서 계속 태풍이 올라오는 것이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운송이 더 늦어질 가능성도 있고요. 북미왕국에서도 그 때문에 늦어지면 3월 정도까지 밀릴 수 있다더군요."

보통은 여름, 혹은 가을 늦게 태풍이 올라오곤 했지만 올해는 워낙 날씨가 해괴해 최근에도 태풍과 장마로 인해 삼남 지방과 강원도에 큰 피해를 줬기에 정태화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그거야 어쩔 수 없지. 오히려 기한을 맞추려 무리하게 운송하다 사고가 발생해 식량이 사라지는 것이 더 문제이니 늦어져도 괜찮으니 최대한 안전하게 운송해달라고 전하게.“

이는 감성우 역시 동의했기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영상 대감."

* * *

돌쇠는 비축해둔 식량이 슬슬 간당간당해 옆집 삼돌이네 마당에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삼돌아. 혹시 먹을 거 좀 남아있냐? 없으면 나랑 같이 산이나...음?"

돌쇠는 왠지 모르게 휑한 삼돌이네 마당풍경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때 방 안에 있던 삼돌이가 문을 열고 돌쇠를 보며 인사했다.

"오셨소. 돌쇠 아재."

돌쇠는 방 안의 커다란 봇짐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너 어디 가냐?"

돌쇠의 질문에 삼돌이는 쓰게 웃으며 계속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곳에 남아있어 봐야 굶어 죽거나 아니면 살기 위해 김 진사댁의 노비로 들어가는 길밖에는 없잖소. 요새 뒷산에 가서 캘 수 있는 나무뿌리도 얼마 없고. 그래서 강원도로 가볼 생각이오."

삼돌이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짓던 돌쇠는 강원도로 가겠다는 삼돌이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되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강원도?"

"그렇소. 아재."

이에 돌쇠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대체 왜? 식량을 구하려면 차라리 가까운 동래로 가지? 거기서 원상이 구휼미를 나눠주고 있다며? 그리고 곧 나라에서 구휼미를 푼다는 소문도 있고 곳곳에 진휼청을 세운다는 소리도 있는데 왜 강원도로 간다는 거여?"

삼돌이는 봇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쭉 빼서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돌쇠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기에 그를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가 한 보부상을 통해 들었는데 말이오. 저 강원도에 식량이 꽤 많이 비축되어있다고 하오."

하지만 돌쇠는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리여? 강원도에? 거긴 날씨가 괜찮았다던?"

이에 삼돌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조선 팔도 전체가 가뭄과 수해로 인해 피해를 봤는데."

"그럼 강원도에 식량이 많을 리가 없잖어? 아니. 생각해보니 강원도는 재난이 닥치지 않았더라도 논밭이 적어 식량 자체가 적지 않나?"

그 말에 삼돌이는 다시 누군가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확인한 후 조용히 대답했다.

"거기에 원상의 본거지가 있다고 들었소. 그 때문에 꽤 많은 식량을 비축해두었다고 하고."

"...원상이?"

"그렇소."

원상이라는 말에 돌쇠는 바로 수긍했다.

원상은 조선 제일의 상단이었으니 정말 강원도에 원상의 본거지가 있다면 최소한 그곳에는 식량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식량이 많이 비축되어있긴 할 텐데...그곳에 간다면 식량을 받을 수 있을까?"

돌쇠의 말에 삼돌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릿고개에 기근이 닥치자 자신들의 창고를 열어 쌀과 잡곡을 나누어준 원상 아니오. 그리고 보부상이 말하기를 인근 유민들이 다 원상의 본거지로 향했는데 원상에서는 무상으로 식량과 천막까지 나눠주었다고 하니..."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돌쇠는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으음...하지만 너무 멀지 않나? 거기에 북쪽이니 더 추울 테고. 동래에 가서 구휼미로 버티다 다시 돌아와 내년 농사를 지어야 할 것 아녀?"

하지만 삼돌이는 그런 돌쇠의 말이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이에 돌쇠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응? 뭐여. 너 설마 안 돌아올 생각이냐?"

이에 삼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깔고 조용히 말했다.

"그렇소. 아재. 좀 묘한 소문이 있어서..."

"무슨 소문?"

돌쇠가 호기심을 보이자 삼돌이는 입을 열었다.

"원상이 유민들을 모으고 있다고 합디다."

"응? 원상이 유민을? 대체 왜?"

삼돌이는 다시 주변을 살피며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 북미왕국이라는 나라와 통상하기로 했는데 그곳으로 이주할 사람을 구한다던가?"

"아니. 갑자기 그게 먼 소리여? 북미왕국은 또 뭐고?"

그런 돌쇠의 반응에 삼돌이는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젓고 그를 방 안으로 데려와 자신이 보부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전달했다.

돌쇠는 그런 삼돌이의 말을 듣고 잠시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허어...그럼 넌 그 북미왕국이란 곳으로 이주할 생각인 거여?"

그 물음에 삼돌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돌쇠 아재."

태어난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떠나겠다는 삼돌이의 선언에 돌쇠는 삼돌이를 말리려는 생각으로 말했다.

"다른 나라라며? 말도 제대로 안 통할 텐데?"

하지만 삼돌이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인지 곧바로 대답했다.

"이주한 백성들끼리 마을을 이뤄 살지 않겠소? 그럼 큰 문제는 없을 테지."

"으음..."

삼돌이의 대답에 돌쇠가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기자 삼돌이가 입을 열었다.

"보부상이 이야기하길 지금 평안도나 함경도 북쪽의 백성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선을 넘는다던데 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은 나라에서도 공인한 일이고 이곳으로 이주한다면 굶을 걱정을 없을 터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청나라로 넘어간다며 보부상이 혀를 차더이다. 그 말을 할 때 보부상의 표정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결정한 거요. 아재."

하지만 돌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부상의 말을 믿을 수 있으려나...?"

그 말에 삼돌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확신은 없소. 그래서 아재한테는 권유하지 못한 거고. 나야 어차피 가진 것은 이 몸뚱어리뿐이니 잘 알아보고 정말 보부상의 말이 맞는다면 그 북미왕국이란 곳으로 이주할 생각이고."

"으음..."

삼돌이의 말에 돌쇠는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삼돌이는 그런 돌쇠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 아재는 혼자 산을 타서 식량을 구해보시구랴. 떠나기 전 아재에게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아재가 이렇게 왔으니 짐만 다 싸면 바로 떠나면 되겠구려. 아. 저기 고구마 조금 하고 전에 캐 둔 칡뿌리가 좀 있으니 가져가고.“

하지만 돌쇠는 삼돌이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할 뿐이었다.

이에 삼돌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쇠의 어깨를 흔들었다.

"돌쇠 아재?"

돌쇠는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삼돌아. 나도 같이 가자."

이에 삼돌이는 당황했다.

자신이야 건장한 몸뚱어리 하나뿐이니 휙 떠날 수 있었지만, 돌쇠는 사정이 달랐다.

"아니. 돌쇠 아재. 가족들은 어쩌고."

"함께 가야제."

이에 삼돌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바람이 매서웠다.

그런데 돌쇠 아재의 아이들이 이 찬바람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기에.

"쉽지 않을 터인데..."

하지만 돌쇠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단호했다.

"그래도 해봐야지. 니 말마따나 뒷산에서 온종일 산을 타봐야 먹을 것을 별로 구하지도 못하는데...이곳에서 반년 가까이 버텨야 하니...그렇다고 김 진사의 노비로 들어가는 것도 쉬울 것 같지는 않고."

그 말에 삼돌이는 걱정스러운 표정과 가장 친한 이웃인 돌쇠의 가족과 함께 움직여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는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알겠소. 돌쇠 아재. 아재도 빨리 준비하고...떠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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