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멕시코시티의 집무실에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이 전해준 정보를 듣고 되물었다.
"그래? 결국, 영토 협상이 체결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부왕 전하."
보좌관은 최근 새진주를 방문한 선장이 전해준 정보가 적힌 보고서를 안토니오 부왕에게 건넸다.
이 보고서에는 새진주를 방문했다가 외국 전용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잉글랜드 선박이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확인한 에스파냐의 선장이 잉글랜드 사관에게 술을 건네고 얻게 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안토니오 부왕은 이를 빠르게 훑어보고 살짝 부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어. 북미 지역에 건설된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이 정도 물량의 교역품을 받기로 했다라...찰스 2세 입장에선 나쁘진 않군."
에스파냐는 북미왕국과 비밀동맹을 맺은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북미왕국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저들이 원하는 대로 유럽에서 사용하는 북아메리카라는 명칭 대신 북미 대륙, 북미 지역으로 부르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식민지인데 이를 넘겨주는 대가로 막대한 물량의 교역품을 받았으니..."
보좌관은 잉글랜드가 얻게 될 막대한 물량의 교역품에 대한 부러움과 잉글랜드가 결국 북미왕국과 충돌하지 않아 에스파냐가 이득을 볼 수 있던 상황이 무산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인 얼굴로 말을 흐렸다.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의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면 영 아쉽단 말이지. 우리도 진작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았다면 북미 지역의 권리를 모두 넘기고 꽤 이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고작 북미 동해안의 식민지를 넘기고 저 정도 규모의 교역품을 얻었으니 만약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북미 지역의 권리를 넘기고 더 많은 교역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에 안토니오 부왕이 중얼거리자 보좌관이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그나마 부왕 전하의 결단으로 손해를 최소화하고 저들과의 교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어 본국의 사정도 점차 나아지고 있으니 부왕 전하의 판단력과 결단력은 훗날에도 회고될 겁니다."
보좌관의 아부에 안토니오 부왕은 크게 웃으며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하하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 둘 필요는 없지. 그보다 뭐 작년에 잉글랜드인들이 새진주에 머물며 북미왕국 군사 훈련을 참관했다는 보고에 예상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잉글랜드마저 북미 지역에 손 떼기로 했으니 남은 건 프랑스뿐인가?"
이에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회의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습니다만...프랑스가 과연 북미왕국과 맞서는 선택을 할지는 의문이군요."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북미 지역의 식민지 확장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은 보좌관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북미 지역에서 프랑스의 세력은 큰 편이 아니었기에 과연 북미왕국과 맞서겠느냐는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분명 루이 14세는 식민지보다는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더 관심을 두는 작자이니 잉글랜드처럼 북미왕국에 대가를 받고 북미 지역의 모든 권리를 북미왕국에 넘겨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이 말을 흐리자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좌관이 잽싸게 아부했다.
"부왕 전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 말에 피식 웃은 안토니오 부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루이 14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솔직히 짐작하기 어렵네. 아직 프랑스가 북미왕국에 접촉했다는 보고는 없지?"
"그렇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타국이 북미왕국과 접촉하려면 새진주로 가야 했고 에스파냐의 선박들이 자주 새진주를 방문하는 만큼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협상도 결국은 북미왕국이 플로리다 지역으로 진출해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할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가 먼저 사절단을 보내 북미왕국이 얼마나 강성한지 파악하고 지키지 못할 것 같으니 영토 협상을 한 거야. 헌데 과연 그 오만한 루이 14세가 잉글랜드처럼 판단할까? 그게 좀 걸려."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보좌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 2세와 루이 14세의 성향은 조금 달랐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상황도 달랐다.
그렇기에 보좌관이 판단하기에는 프랑스도 잉글랜드처럼 영토 협상을 해서 적당한 대가를 받고 모든 권리를 북미왕국에 넘기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과연 루이 14세도 이러한 결정을 내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그것도 그렇군요. 물론 루이 14세는 유럽에서 영향력 확대에만 관심이 있고 식민지를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맞는데...루이 14세가 영토 확장에는 무척 관심이 많은 만큼 스스로 식민지 영토를 포기할까 싶기는 하네요."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바로 그거라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그거야. 그래서 루이 14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어. 다만 결국은 그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봐야겠지. 당장 북미왕국은 잉글랜드에 넘겨받는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느라 당분간은 정신없을 테니."
새진주에 드나들며, 그리고 새진도에 상주하고 있는 로하스를 통해 북미왕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결국은 루이 14세의 의중에 달려있다고 판단한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부디 루이 14세가 영토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줬으면 좋겠지만...'
애써 비밀동맹을 맺었지만, 잉글랜드는 사절단을 보내 북미왕국의 힘을 파악하고 곧바로 영토 협상을 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북미 지역의 모든 권리를 북미왕국에 넘겨버렸다.
그런 만큼 프랑스라도 북미왕국과 분쟁이 발생해 그로 인해 에스파냐가 이득을 챙기길 바란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인지 안토니오 부왕이 보좌관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협상한 것은 가조약이고 실질적으론 내년에 영토를 넘겨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부왕 전하."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부수입이나 올리자고. 새진도의 로하스에게 연락해서 북미왕국에 더 많은 물자를 팔 수 있으니 이를 협상해보라고 하게."
어느 정도 북미왕국을 파악하고 있는 안토니오 부왕이었기에, 그리고 저들이 새진주나 산 아구스틴을 장악하는 것을 보면서 내년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넘겨받게 되면 북미왕국이 어떻게 행동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
거기에 멕시코 원주민을 고용해 길을 정비하고 있었지만, 북미왕국은 아직 새진주에 직접 물자를 보급하기보다는 에스파냐에 물자를 보급받고 있었다.
또한, 새진주에서 열심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선박이 많지 않다는 것 역시 파악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내년에는 분명 북미 동해안 지역에 물자를 보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테니 이를 돕고 적당히 이득을 챙기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에 보좌관은 활짝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
"아!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알겠습니다. 부왕 전하. 바로 새진도로 연락해 북미왕국 외무청과 협상하라고 전하겠습니다."
* * *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한 선술집에서 제이콥은 맥주를 마시다 잭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급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본국에서 이곳을 포기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그래. 이번에 본국에 다녀온 스미스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잭이 그렇게 대답하고 바로 맥주를 마시자 제이콥은 답답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아니. 대체 왜?"
그제야 맥주잔에 입을 뗀 잭은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긴 왜야. 북미왕국 때문이지."
"아..."
제이콥은 잭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등장해 북아메리카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 중인 북미왕국을 제이콥도 모르지 않았으니.
그리고 최근 이 북미왕국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 예전 에스파냐의 영역인 플로리다까지 진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고.
플로리다 지역은 잉글랜드가 건설한 식민지 가장 남쪽인 캐롤라이나와 인접해있었기에 조만간 북미왕국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본국에서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제이콥이었기에 잭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걸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니. 고작 인디언들 때문에 본국이 이곳을 포기한다고?"
제이콥이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가 취기가 올라오는지 불콰해진 안색으로 씩씩거리며 잭을 바라보았다.
이에 잭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본국에서 그런 소문이 나돈다 이거지."
슬쩍 빼는 잭의 행동에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는 만족스러운지 거들먹거렸다.
"흥. 헛소문이야. 본국이 고작 인디언들 따위에 굴복할 리 없지."
이에 잭은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음...북미왕국은 고작 인디언들로 보긴 어렵지 않나?"
"뭐라고?"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가 얼굴을 붉히며 잭을 매섭게 바라보았지만, 잭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잘 모르는 모양인데 본국에서도 인디언들과 북미왕국인은 따로 구분한다고."
갑자기 본국을 들먹이자 잠시 멈칫한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를 보고 잭이 과장되게 주변을 살피며 선술집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킨 후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이런. 자넨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둘 다 이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건 동일하지만 우리 주변의 부족 생활을 하는 인디언들과는 달리 북미왕국인은 자체적으로 국가를 이루고 화약 무기를 생산해 사용할 정도의 문명인이라고. 그 때문에 에스파냐도 이들을 부담스러워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것으로 종전 협상을 할 정도였고."
선술집의 모든 사람이 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는 멈칫했고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더벅머리의 덩치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에스파냐 따위를 이긴 게 뭐 대수라고. 에스파냐는 우리도 이겼었잖아? 저들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마저 격퇴했었다고."
더벅머리 덩치의 말에 잉글랜드인인 선술집 안의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더벅머리 덩치뿐만 아니라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가 기세등등하게 잭을 바라보았지만, 잭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 이봐. 친구. 분명 에스파냐가 예전만 못하지만, 이곳 신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이 바로 에스파냐야. 헌데 그 에스파냐조차 북미왕국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했다고. 북미왕국이 등장한 이후로 본국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보면 본국도 그런 북미왕국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확실하고. 이건 자네도 동의할 텐데?"
잭의 말에 선술집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잭의 말에 다시 분위기가 바뀐 것을 짐작한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는 열 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익!"
하지만 더벅머리의 덩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이에 커다란 덩치의 대머리는 씩씩거리다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선술집에서 나갔다.
더벅머리의 덩치도 그 뒤를 따라 선술집을 나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잭은 혀를 찼다.
"쯧쯧."
제이콥은 그런 잭에게 새로운 맥주잔을 건네주며 질문을 던졌다.
"이봐. 잭.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정말 본국이 이곳을 포기할까?"
말다툼해서 목이 말랐던지 제이콥이 건네준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킨 잭은 텅 빈 맥주잔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이에 제이콥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정말 본국이 이곳을 포기한다고?"
제이콥의 목소리는 꽤 컸고 방금까지 잭이 덩치들과 말다툼을 한 것도 있었기에 선술집은 무척 조용해졌다.
이에 잭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술집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내 예상일 뿐이지만 스미스가 그 소문을 들을 정도로 퍼진 상태라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본국이 북미왕국과 맞서 이곳을 지킬 생각이었다면 이곳으로 오는 이주민을 제한하지는 않았겠지. 안 그래?"
정말 본국이 북미왕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생각이었다면 캐롤라이나로 향하는 이주민만 막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본국은 북미 동해안 지역의 모든 식민지로 향하는 이주민들을 서인도제도로 이주하길 권했고 덕분에 요 몇 년간 이주민이 전무했다.
이를 알고 있는 제이콥이 중얼거렸다.
"아...하긴...만약 북미왕국이 이곳을 공격한다면 돕기 위해서 요새로 달려갈 테니...“
어차피 식민지에 배치된 병력은 많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일반인들도 한 손 보태야 했다.
그 말에 선술집의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그래. 그런데 이주민을 제한한 것부터 북미왕국이 보통 강성한 게 아니란 뜻이야. 그리고 그때부터 본국에서는 이곳을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을 거라고 봐."
잭의 대답에 제이콥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는 어쩌지?"
이에 선술집은 다시 조용해졌고 잭은 정말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당장 스미스에게 들은 것은 소문일 뿐이니까...일단 본국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려야지."
그 말에 선술집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은 잭에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지만, 잭은 맥주를 마시며 적당히 질문을 회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