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새한성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현재 새한성에서 임시로 외무청장의 일을 하던 푸른 안개가 뛰어 들어왔다.
“전하!”
잠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던 정성국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푸른 안개 덕에 놀라 떨어뜨릴 뻔한 커피잔의 손잡이를 꽉 쥐며 황당한 표정으로 푸른 안개를 바라보았다.
“장인어른?”
하지만 푸른 안개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손에 든 보고서를 흔들며 말했다.
“새진주에서 웅크린 늑대가 보낸 급보입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그런 정성국을 보고 푸른 안개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전하! 마침내 잉글랜드가 북미 동해안 지역을 우리 북미왕국에 넘기기로 합의했다는 보고입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허어...”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힘이 빠지는지 휘청하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잉글랜드의 특별 대사가 새진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접한 이후 웅크린 늑대의 판단에 따라 협상에 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오자 웅크린 늑대의 판단을 존중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잉글랜드와의 협상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볼품없는 잉글랜드의 식민지에 불과하지만 약 100년 후에는 잉글랜드에 독립해 미국이 탄생하고 그 미국이 어떤 국가가 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미국이 내심 부담되어 무리해서라도 잉글랜드 식민지가 더 커지기 전에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해 성장을 막을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심 새진주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관심을 두었고 마침내 협상에 들어갔다는 보고에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잉글랜드가 북미 동해안 지역에 건설한 식민지를 포기하고 북미왕국에 넘기기로 합의한 이상 더는 전생의 미국이 태동할 수 없게 되었으니 묘한 탈력감에 주저앉은 것이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푸른 안개는 화들짝 놀라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정성국은 그런 푸른 안개를 보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장인어른. 괜찮습니다.”
하지만 푸른 안개는 정성국을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김 의원이라도 부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나라에서 전하의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때문에 매일 아침 궁궐 주변을 뛰면서 체력을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성국의 말에도 자신의 사위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푸른 안개였기에 정성국은 속마음을 슬쩍 털어놓았다.
“새진주에서 잉글랜드와 협상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접한 이후 만약 협상이 실패한다면 결국 잉글랜드와도 전쟁을 벌여야 하는 만큼 내심 부담스럽긴 했습니다. 분명 북미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서양 세력을 최대한 빠르게 북미 지역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것만이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전쟁으로 인해 죽어갈 북미왕국의 병사들도 있을 테고 프랑스 역시 참전할 수도 있었으니.”
물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앙숙이긴 했지만, 찰스 2세 시절에는 사이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청교도 혁명 때문에 처형되고 스코틀랜드에서 즉위한 찰스 2세였지만 올리버 크롬웰에게 패한 이후로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했었고.
그런 만큼 북미왕국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다면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갑자기 나타나 세력을 확장하는 북미왕국을 부담스럽게 여겨 프랑스 역시 참전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에스파냐와 비밀동맹을 맺긴 했지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기에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고.
푸른 안개는 정성국의 속마음을 듣고 자신을 신뢰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무릇 지도자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꾸준히 고민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너무 과한 걱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전하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군 무척이나 강력하지 않습니까. 서양의 강국 중 하나라는 에스파냐도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인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상황이 다르니까요. 에스파냐의 경우야 일방적인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했기에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잉글랜드는 다르지요. 더불어 저들은 우리 북미왕국을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협상에서 실패해 전쟁이 벌어진다면 최대한 많은 병력을 보내고 식민지의 주민들을 모두 무장시키려 들 테니 그만큼 북미 동해안 지역을 점령하는 데 많은 피를 흘릴 테고.”
정성국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푸른 안개는 고개를 끄덕이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그렇긴 하군요. 하지만 이미 잉글랜드는 우리 북미왕국의 국력을 두려워해 대가를 받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북미 지역의 모든 이권을 우리에게 넘기기로 했으니 전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푸른 안개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했지만, 정성국에겐 그 말이 미국으로 인해 더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인지 정성국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요. 이젠 그럴 일이 없지요.”
“전하?”
그런 정성국의 반응이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푸른 안개였다.
하지만 정성국은 웃음을 멈추고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자세한 사항을 확인하고 싶은데...”
“아. 여기 있습니다. 전하.”
푸른 안개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건네자 정성국은 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허어...예상한 물량의 절반이라니...웅크린 늑대가 협상을 무척 잘한 모양이군요.”
정성국이 웅크린 늑대에게 허락한 교역품의 양은 북미왕국이 1년 동안 고생해서 준비해야 마련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내심 부담스러웠던 정성국이었기에 최대한 많은 교역품을 배정해 저들이 식민지를 넘겨주길 바란 것이다.
헌데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이 책정한 물량의 절반으로 잉글랜드가 북미 지역에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그것도 정성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드슨 만 인근 지역까지 사들인 셈이니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정성국은 보고서 말미에 적힌 1년 후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이때 잉글랜드의 모든 권리를 넘겨받는다는 문구를 보고 중얼거렸다.
“흐음...1년 이라. 생각보다 짧은 기간인데 준비할 게 무척 많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번에 잉글랜드가 넘기기로 한 지역은 무척 광활했다.
어떻게 보면 북미 지역 동해안 전체와 북부지역 전체였으니.
당장 허드슨 만 인근 지역은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북미 지역 동해안 전체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은 푸른 안개도 능히 짐작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 고민을 청장들과 나누기로 했다.
“바로 청장 회의를 열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 * *
청장들을 모두 회의실로 불러 잉글랜드가 가지고 있던 북미 지역의 모든 권리를 넘겨받기로 협상을 했다는 소리에 청장들은 그만큼 북미왕국이 커진다는 뜻이었기에 기뻐하면서도 이번에 확보한 영역을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해했다.
특히 다른 청장들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이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 행정청장, 이곳의 치안을 유지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군사청장은 더더욱.
잉글랜드의 특별 대사가 영토 협상을 위해 새진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내심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잉글랜드가 북미 지역의 모든 권리를 대가를 받고 북미왕국에 넘기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1년이라...그 안에 이곳에 보낼 관리들을 육성해야 하는 거군요.”
정성국은 그런 행정청장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다만...현재 잉글랜드의 식민지 인구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야. 거기에 잉글랜드가 식민지를 포기했고 1년 후에 이 지역이 우리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당수의 잉글랜드인이 떠날 거라고 생각되는 만큼...그렇게 많은 관리가 필요하진 않으리라 생각해.”
“그럴까요?”
정성국의 말에 표정이 살짝 밝아지는 행정청장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식민지 주민들이 보기에 우리는 인디언들의 나라나 다름없잖아? 헌데 저들이 과연 남겠다는 결정을 내릴까? 거기에 남게 되면 북미왕국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고 당분간 잉글랜드와는 연락조차 끊길 테니...”
워낙 인구가 부족한 만큼 정성국은 남겠다는 잉글랜드인을 내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불어 나중엔 유럽의 이주민들도 받을 생각이었고.
다만 이건 시간이 좀 흐르고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어느 정도 장악했다고 판단했을 때의 일이고 당장은 남는 잉글랜드인들로 인해 북미왕국의 실체가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뉴펀들랜드 섬을 제외한 북미 동해안의 항구에 외국 선박이 드나드는 것을 당분간 금지하겠다고 잉글랜드의 특별 대사에게도 알린 만큼 어지간한 잉글랜드인은 다 떠날 것으로 예상한 정성국이었다.
그 말에 행정청장은 일리가 있다는 듯 동의했다.
“흐음...그건 또 그렇군요. 그럼...?”
“내 예상은 아마 인구가 확 줄어들 테니 당장 많은 행정청의 관리들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 오히려 외무청 관리들이 더 많이 필요하겠지. 이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워낙 이주한 인구가 적기에 안전을 위해서라도 주변 원주민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처음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정착한 잉글랜드인들은 점차 늘어나는 이주민과 그들이 경작할 땅을 얻기 위해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범했고 결국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잉글랜드의 무력에 의해 굴복하고 영역을 빼앗긴 원주민들이었지만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넘겨받음으로써 잉글랜드인 대부분이 떠나게 된다면, 그리고 북미왕국에 합류하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면 자연스럽게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에 합류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만큼 당장은 행정청의 역할보다는 원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외무청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자 외무청장 대리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푸른 안개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외무청 관리야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말이 통하는가가 문제인데...”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군요. 이곳의 원주민들은 영어는 하더라도 에스파냐어를 하지는 못할 테니.”
“그렇습니다. 전하. 영어를 배우는 외무청 관리가 있긴 합니다만 능숙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진 못해서...”
푸른 안개가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어쩌겠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대략적으로나마 의사소통이 된다면 일단 우리 북미왕국이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만 알리고 천천히 설득하면 됩니다.”
분명 모든 잉글랜드인이 떠나지는 않을 테고 그중에는 에스파냐어를 할 줄 아는 잉글랜드인도 있긴 하겠지만 원주민을 설득하는 일에 통역을 맡기기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차선을 이야기하자 푸른 안개가 제안했다.
“아마 북미왕국에 귀화한 에스파냐인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알아보고 있다면 그들에 한해서 이동 제한을 푸는 것이 어떻습니까?”
에스파냐의 군인이었다가 북미왕국에 포로로 잡힌 이후 북미왕국의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과 에스파냐가 종전 협상을 한 이후 조국으로 돌아갔다가 지인들을 설득해 다시 북미왕국으로 이주했다.
정성국은 이들의 이주를 환영했고 이들을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인정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동과 거주의 제약을 받았다.
푸른 안개는 이를 풀자는 이야기였는데 이에 옆에서 듣던 행정청장이 반색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남는 잉글랜드인들과의 소통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영어를 한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할 테고 거기에 이들은 먼저 북미왕국에 귀화한 같은 유럽인이니 이들로 잉글랜드인들을 안정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뭐 상관은 없겠지요. 그리고 당분간 북미 동해안 지역에는 외국 함선이 정박하지도 못할 테니 정보가 알려질 위험도 적고. 그렇게 하시지요. 장인어른.”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