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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22화 (222/850)

222화

개척촌 행정청의 실질적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윤휴는 원상의 이천호 대방의 건네준 종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허어...이런 조약을 맺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어르신.”

이천호 대방이 윤휴에게 건네준 종이는 북미왕국과 조선이 제물포에서 맺은 조약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번 조약을 맺기 전 북미왕국이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원하자 정태화는 개척촌을 만들고 관리해 온 원상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이미 제물포 근처에 머물던 감성우는 곧바로 정태화에게 가서 이를 받아들여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처음과는 달리 개척촌의 규모가 꽤 커진 상황이라 아무래도 조정의 눈치가 보여 원상에선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는 말과 함께 이 기회에 개척촌이 양지로 나오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더불어 원상이 북미왕국에 빚진 것도 있고 최근 개척촌에 들어가는 자금을 대느라 원상의 사정이 썩 좋은 것만도 아니라 개척촌의 땅과 건물을 북미왕국에 넘겨 손해를 만회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원상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태화는 다행이라고 여기며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하는 대신 이번 일로 원상이 손해를 보지 않게끔 배려해주었다.

북미왕국이 개항장에 한하여 땅을 소유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어차피 공식적으로도 개척촌 일대의 땅은 모두 원상의 소유이니 북미왕국이 땅을 소유할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원상이 북미왕국에 개척촌의 땅을 팔아 그동안 개척촌에 투자한 돈들을 회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원래라면 북미왕국이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하길 원하는 만큼 조정에서 개척촌의 땅을 원상에게 사들여 북미왕국에 임대하는 방식을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태화의 배려 덕분에 매끄럽게 개척촌의 땅과 건물을 북미왕국에 넘길 수 있어 감성우는 반색했고.

그렇게 북미왕국에서는 훗날 제물포 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허허허. 나쁘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운영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윤휴가 비록 10년 가까이 개척촌을 운영하며 이곳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개척촌을 원상에서 운영하기는 어렵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젠 개항장으로 불리게 될 개척촌이 양지로 나가게 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웃자 이천호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윤휴는 유리창을 통해 어느덧 익숙해진 개척촌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조선에 닥친 각종 재해는 단기적으론 조선의 시련이 될 테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어.”

“저도 부디 그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성국은 조선이 해금령을 폐지하고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조선이 북미왕국과의 교류를 시작했으니 윤휴가 아는 정성국이라면 조선을 어느 정도 배려해 더 발전할 수 있게 도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에 윤휴는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으로 탁자 위의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홀짝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정식으로 관청이 들어서고 나라에서 관리들을 임명할 테니 나도 이제 쉴 때가 된 건가?”

그 말에 이천호는 빙긋 웃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

“음?”

이천호의 말에 윤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이천호는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 윤휴에게 넘겼다.

“전하께서 보내신 친서입니다.”

“아. 그런가?”

윤휴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정성국의 편지를 받아들었다.

정성국이 개척촌을 떠나 북미 지역으로 이주한 후로도 이주 선단을 통해 간간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고 있었다.

윤휴는 정성국이 보낸 편지를 단숨에 읽은 후 신음을 흘리며 이천호를 바라보고 물었다.

“흐음...자네도 이 내용을 아나?”

“대략적으로는요.”

이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휴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이 윤모를 무척이나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네. 나는 북미왕국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북미왕국의 국법을 제정하는 데 관여한다? 글쎄...”

정성국이 윤휴에게 보낸 편지의 앞부분은 그간의 안부를 묻는 개인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뒷부분은 현재 북미왕국의 국법을 제정하는 것에 난항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북미왕국은 아직 제대로 된 국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다만 통치를 위해 경국대전에서 북미왕국의 사정에 맞지 않는 부분을 싹 쳐내고 사용하고 있을 뿐.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고 북미왕국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북미왕국의 국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와의 교류 이후 꾸준히 유럽의 여러 법전과 법체계에 대한 서적들을 수집하고 이를 번역하는 일에 힘써왔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슬슬 번역된 결과물들이 나오고 있기는 한데 문제는 이를 연구하고 취합해 북미왕국의 사정에 맞는 법을 제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나마 북미왕국의 이주민 중에 유학자라도 조금 있으면 모를까 대다수는 무식한 유민들이었고 개척촌 출신 태반은 이공계 쪽의 학자나 장인들이었으니.

이 때문에 행정청에서 일하던 관리들 일부를 빼서 법을 연구하도록 맡겼지만 영 지지부진 하자 당연히 정성국은 윤휴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에 식량을 지원하는 문제로 조선과 협상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조선의 문호를 열게 되면 개척촌에도 변화가 생길 테고 개척촌의 윤휴 역시 시간이 남을 테니 그에게 법 제정을 맡기기 위해 편지와 그간 번역된 서양의 법에 관련된 서적들을 몽땅 보낸 것이다.

더불어 이천호에게도 이러한 사정을 적은 서찰을 함께 보내면서 최대한 윤휴를 설득해보라고 명령했고.

그런 만큼 이천호는 고개를 젓는 윤휴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북미왕국엔 가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북미왕국에 다녀온 선장이나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곳의 분위기는 이곳 개척촌과 거의 흡사하다고 합니다. 아마 그렇기에 전하께서도 이러한 대임을 어르신께 맡기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북미왕국의 법을 제정하는 일은 결국 나라의 뼈대를 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전하께서 그저 친분 때문에 맡기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이것 참...”

이천호의 말에 윤휴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처럼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국법을 제정하는 일을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자신이 승낙하면 북미왕국에서 법을 연구하는 관리들을 이곳에 보내겠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자신을 배려했으니.

이에 잠시 고민하던 윤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네만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네.”

단칼에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천호를 향해 윤휴가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께서 보내신 서적들은 놓고 가게.”

이에 이천호는 슬쩍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 * *

조용한 곰은 포로나이 선착장에 내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드디어 도착했군.”

제물포에서 출항한 후 순조롭게 항해하다 풍랑 때문에 잠시 동래에서 풍랑이 가라앉을 때까지 또 정박해야 했었다.

그러다 풍랑이 잦아들자 기회다 싶어 출항했고 개척촌에 들러 보급을 하는 동안 다시 폭우가 쏟아져 며칠간 발이 묶였다가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출항해 마침내 포로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용한 곰은 포로나이의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안도했고 그를 따라 뒤늦게 내리던 투로시노와 먼저 선착장에 내려 선원들의 보고를 받고 있던 정일신은 이를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고생하셨습니다.”

정일신의 말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으며 질문을 던졌다.

“원래 이렇게 뱃길이 험한 겁니까?”

“이 정도는 아닙니다. 물론 여름철에 간간이 태풍으로 인해 풍랑이 강한 편이긴 했지만...올해가 특히 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 때문에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은 거고.”

정일신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살짝 걱정스럽다는 듯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어차피 조선의 배로는 식량을 옮기기 어려워 우리가 식량을 운송해준다고 약조는 했는데 바다가 이러니 영 걱정되는군요.”

이에 정일신은 피식 웃으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감을 보였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일반적이라면 바다가 평온해야 할 시기인데 계속해서 태풍이 북상하고 있으니...다만 원상 소속의 뱃사람들은 나름 잔뼈가 굵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정일신의 말에 조용한 곰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급히 덧붙였다.

“아. 그리고 원상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으니...이번에 식량을 운송할 때는 모든 배에 삼태극기를 달고 식량을 운송했으면 합니다.”

그 말에 정일신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허어...임시입니까? 아니면 아예 소속을 옮기는 겁니까?”

“후자입니다. 조선 근해를 오가며 해운에 운용되는 인급 함선 몇 척만 원상 소속으로 두고 나머지는 모두 북미왕국 소속으로 옮기기로 합의했습니다.”

그 말에 정일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졸지에 원상의 배 태반이 사라진 셈이로군요. 인급 함선이라 봐야 몇 척 되지도 않잖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조선 연안에서 운용되는 인급 함선들은 모두 범선이군요? 그래서입니까?”

정일신의 물음에는 증기기관이 조선으로 유출될 것을 경계하느냐는 뜻이었기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냥 원상 소속으로 두면 증기기관의 유출 문제도 있고 조선 팔도에 식량을 수송하는 것으로 원상이 얼마나 많은 배를 소유하고 있는지 조선에서 파악할 수 있는 만큼 이천호 대방이 먼저 요청하더군요. 어차피 남아 있는 인급 함선만 해도 충분하다면서.”

원상 소속의 배 태반을 북미왕국 소속으로 돌리려는 이유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가 더 크긴 했다.

아무리 해금령이 반쯤 유명무실해졌다 한들 수십 척의 대선을 상단이 운용했었다는 말이 돌아봐야 원상에 좋을 것이 전혀 없었으니.

그러한 사정을 짐작한 정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음...이번 식량 운송은 우리 해군도 참여하는 만큼 일단 모든 선박을 임시로 3함대 소속으로 두겠습니다. 그리고 식량 수송이 끝나면 원상 소속의 선박들은 국영 상단 소속으로 옮기면 되겠지요.”

“예. 그러면 될 듯합니다. 그보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질문에 정일신이 뒷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기존의 예상보단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저도 방금 보고를 받았는데 남쪽에서 계속 태풍이 온다고 본국에 알려서인지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 복귀하는 것을 전하께서 막으셨습니다. 덕분에 선착장에 천급 함선은 한 척도 없지요.”

그 말에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는 포로나이의 선착장을 급히 둘러보았지만, 정일신의 말처럼 가장 큰 천급 함선은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없군요. 아. 천급 함선은 북방항로가 아닌 태평양을 횡단해 남쪽으로 복귀하니 위험하다고 판단한 걸까요?”

투로시노의 말에 정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서 가장 커다란 천급 함선이 빠져버리는 바람에...운송량이 반 토막 나버린 셈이지요.”

그 말에 조용한 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끙...아쉽지만 천급 함선이 풍랑에 휘말리는 것보다야 나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럼 예상보다 두 배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적재량을 계산해보면 한 5회 정도는 왕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조용한 곰은 혀를 찼지만, 현 상황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그나마 포로나이에서 조선과의 거리는 본국으로 오가는 것보다야 가까운 편이라 날씨만 도와준다면 본국으로 이주 선단을 보내야 하는 초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식량을 모두 운송할 수 있을 것 같아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원상을 통해 이 소식을 알리도록 하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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