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아. 오셨습니까?”
웅크린 늑대가 책상 위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보고서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김봉길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투덜댔다.
“거참...아마 잉글랜드의 사절단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혈압이 오를 겁니다.”
잉글랜드의 사절단이 새진주에 도착해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에게 양국 간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다며 협상을 요청했지만, 작년에 클레멘트를 접대했던 그 외무청 관리는 자신은 국가 간의 협상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며 수도에 이를 알릴 테니 기다려달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클레멘트는 수긍하며 중요한 협상이니 어느 정도 권한이 있는 사람과 만났으면 한다고 덧붙였고 그때 이후로 거의 두 달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전권을 위임받은 웅크린 늑대는 이미 새진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잉글랜드 사절단의 총 책임자인 클레멘트가 비교적 젊은 만큼 시간을 끌어 클레멘트를 최대한 초조하게 만들어 협상에서 이득을 보겠다면서 웅크린 늑대가 이렇게 협상을 미루고 있었고.
그러니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김봉길로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김봉길의 타박에 웅크린 늑대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거의 두 달 가까이 이렇게 방 안에서만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 지급 전선의 진수는 끝났습니까?”
이에 김봉길은 이번에 새로 건조된 지급 전선을 떠올리며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방금 지급 전선을 타고 앞바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왔지요.”
그러면서 이번에 건조한 지급 전선이 얼마나 대단한지 열심히 설명하는 김봉길의 이야기를 한 귀로 적당히 흘리던 웅크린 늑대는 김봉길의 설명이 끝나자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잉글랜드의 사절단이 지급 전선을 목격했겠군요?”
이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지 않겠소? 떠들썩하게 진수식을 벌였고 저들이 정박해 있는 배 근처를 지나갔으니...”
“흐음...”
김봉길의 대답에 웅크린 늑대가 생각에 잠기자 김봉길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거 참...어차피 저들은 우리에게 식민지를 넘기러 온건데 너무 압박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러다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클레멘트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들은 저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차피 잉글랜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는데 저렇게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김봉길은 하루라도 빨리 저들과 협상해 북미 지역 동해안까지 영역을 확장하기를 바랐지만, 협상의 전권은 웅크린 늑대에게 있었고 그는 협상의 우위에 서기 위해 시간을 끌기로 이미 결정했기에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설마요. 저들이 이렇게 국가 간의 협상 권한을 가진 외무청 관리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북미왕국과 협상하기로 잉글랜드의 본국에서 결정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지금 저기 있는 특별 대사가 그 결정 자체를 바꾸긴 어려워요.”
웅크린 늑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김봉길은 수긍했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러니 저들은 아마 식민지를 넘겨주는 대가로 여러 이권을 챙기려 들 테니...최대한 저들을 압박해서 내어줄 이권을 최대한 줄여야죠.”
“뭐 나도 그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했기에 이렇게 도와주고 있긴 한데...”
하지만 김봉길은 조금 더 이득을 보려다가 산통이 깨질 것을 우려하는 표정이었고 웅크린 늑대도 적당히 시간을 끌며 힘을 과시했으니 슬슬 협상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판단해 김봉길을 보고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적당히 시간을 끌었으니 수도가 꽤 멀리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했을 테고 적당히 무력 과시도 한 것 같으니...슬슬 협상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 * *
“안녕하십니까. 외무청 소속 웅크린 늑대라고 합니다.”
클레멘트는 거의 두 달 가까이 기다린 후에야 만나게 된 이번 협상의 총 책임자인 웅크린 늑대를 무척이나 반기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잉글랜드의 특별 대사인 클레멘트 코트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둘은 준비되어 있던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고 커피를 다 마시고 난 후 웅크린 늑대가 클레멘트를 바라보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래. 특별 대사께서 어느 정도 권한이 있는 외무청 관리를 요청하셨다지요?”
이에 클레멘트는 내심 긴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요청으로 제가 이곳에 왔습니다. 허니 저를 부른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클레멘트는 웅크린 늑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귀하께서는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으십니까?”
이에 웅크린 늑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권을 위임받아 왔으니 특별 대사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허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그렇습니까.”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우리 잉글랜드와 북미왕국 간의 영토 협상 때문입니다.”
“영토 협상이라...”
“전에도 방문해서 외무청 관리에게 이야기했지만, 우리 잉글랜드는 이 북아메리카 대륙이 비어있다고 생각해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헌데 갑자기 귀국이 등장했고 에스파냐와의 협상을 통해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귀국의 영토라 주장하니 우리 잉글랜드로선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지요.”
그런 클레멘트의 말에 웅크린 늑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지적할 것이 많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지요. 그래서요? 우리 북미왕국에 선전포고라도 날리러 오신 겁니까?”
그러면서 빙긋 웃는 웅크린 늑대가 무척 얄미워 보였지만 클레멘트는 내색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영토 협상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지요.”
이에 웅크린 늑대는 경청하겠다는 모습을 보였고 클레멘트는 계속 입을 열었다.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 귀국의 사정을 알리자 본국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우리 잉글랜드의 자랑인 해군과 육군을 보내 식민지를 방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잉글랜드 왕국의 주인이신 찰스 2세께서는 귀국이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자국의 땅으로 생각하는 것에 일리는 있다면서, 그리고 귀국과는 아시아 지역에서 교류하며 나름의 친분을 쌓은 만큼 귀국을 우호국으로 생각한다며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해서 제가 이렇게 귀국과 평화적으로 영토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고.”
그 말이 끝나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흐음...우리 북미왕국은 이 북미 대륙 전체를 우리의 영토로 생각합니다. 헌데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영토 협상이 가능하겠습니까? 귀국이 북미 지역에 건설한 식민지를 포기한다면야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흐리면서도 웅크린 늑대는 살벌한 눈빛으로 클레멘트를 빤히 바라보았고 클레멘트는 애써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잉글랜드가 이곳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한 지도 벌써 60년이 흘렀습니다. 당연히 이곳에 투자한 본국의 귀족들과 상인들이 꽤 많지요. 그런 만큼 그냥 식민지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클레멘트의 말에 웅크린 늑대는 내심 쾌재를 지으면서도 잠시 생각에 잠긴 척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 말씀은 우리 북미왕국이 귀국에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귀국이 북미 지역에 건설한 식민지를 포기할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클레멘트는 웅크린 늑대의 말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야 우리 잉글랜드는 귀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식민지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모든 권리를 귀국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그런 클레멘트의 답변이 무언가 거슬렸던 웅크린 늑대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음? 북아메리카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모든 권리?”
이에 클레멘트는 일전에 새진주에 방문했을 때는 잉글랜드가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만 알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웅크린 늑대에게 설명했다.
“에스파냐는 이 신대륙을 먼저 발견했기에 이 신대륙 전체가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우기지만 저들이 실제 제대로 지리를 파악한 지역은 멕시코 지역과 남아메리카 지역 정도입니다. 북아메리카 지역은 오히려 우리 잉글랜드의 자랑스러운 탐험가와 항해자들이 목숨을 걸고 탐사했기에 우리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의 허드슨만 지역 일대에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클레멘트의 설명에 웅크린 늑대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클레멘트를 노려보았다.
“허...그것 참...그저 발견만 하면 그 땅에 누가 살든 당신들의 땅이 되는 거요?”
“...비어있는 땅이니까요.”
그런 클레멘트의 대답에 웅크린 늑대는 두 손으로 티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멘트를 노려보고 소리쳤다.
“비어있다? 그럴 리가! 설마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한 명도 없다는 소리요!?”
“크흠...”
클레멘트는 할 말이 없었기에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서양인들이 이곳에 사는 원주민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원주민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저들의 재산 역시 인정해야 했고 신대륙 역시 그들의 땅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주민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이 신대륙은 임자가 없는 땅이고 저들의 귀금속을 약탈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서양인들은 원주민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고 그것이 자국의 이익이 되었기에 서양 국가들 역시 침묵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은 그런 원주민들로 이루어진 국가였기에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싸우자는 소리밖에 되지 않아 클레멘트는 그저 아름답기 그지없는 금세공이 되어 있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했고 웅크린 늑대는 서서 그런 클레멘트의 정수리를 쏘아보다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해 한숨을 내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후우. 뭐 좋소. 우리 북미왕국도 그간 그 지역의 사정을 미리 파악해 개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어차피 귀국도 우리 북미왕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북아메리카 지역에 있는 모든 권리를 넘기겠다고 했으니 일단은 그냥 넘어가리다.”
웅크린 늑대의 말에 클레멘트는 내심 안도하며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헛기침했다.
“크흠...우리 잉글랜드의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레멘트의 저자세에 웅크린 늑대는 내심 실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협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 귀국이 넘기겠다는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일 듯싶군요.”
“그렇지요. 잠시만요.”
웅크린 늑대의 말에 클레멘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티테이블 위의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옮기고 품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지도는 북미 지역 북동쪽이 나름 상세히 그려진 지도였고 이를 손으로 짚으며 입을 여는 클레멘트였다.
“일단 제가 전에 귀국에 알렸던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의 식민지는 바로 이곳입니다. 이 영역 전체이지요.”
“음...”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멘트는 손을 옮겨 북미 대륙 북쪽의 거대한 허드슨만 일대를 짚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 허드슨만으로 흘러드는 모든 강과 지류를 포함한 유역 전체 역시 우리 잉글랜드의 소유입니다. 이 지역들에 대해 귀국이 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우리 잉글랜드는 귀국과의 우호를 위해 넘길 생각입니다.”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계속 지도를 바라보다가 잉글랜드의 영토로 분류되어있는 북동쪽의 커다란 섬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잠깐. 이곳은 왜 빼놓는 것이오? 이곳도 귀국의 영토라고 나와 있잖소.”
웅크린 늑대가 북미 대륙 북동쪽의 커다란 섬인 뉴펀들랜드 섬을 가리키자 클레멘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곳은...섬이니 이번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정성국은 몇 번이고 이 뉴펀들랜드 섬을 확보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글세...분명 이곳은 섬이긴 한데 북미 대륙과 무척이나 가까운 만큼 이곳을 이번 협상에서 뺀다면 우리는 굳이 협상할 이유가 없소. 차라리 전쟁을 통해 싹 다 얻는 것이 낫지.”
그러면서 웅크린 늑대는 클레멘트를 쏘아보았고 클레멘트는 인상을 찡그리며 지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으음...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시오.”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협상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다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