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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17화 (217/850)

217화

“그러니까...귀국이 원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로군요. 자유롭게 조선을 오가며 교역할 수 있는 권리와 유민들의 이주 문제.”

애초에 총 책임자끼리의 협상인 만큼 정태화는 이런저런 수식어는 빼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투로시노는 오히려 환영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습니다.”

이에 정태화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은 이미 유철이 보낸 장계에 적힌 것과 비슷했고 한양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주상과 조정 대신들과는 논의를 끝낸 사항들이었기에 정태화는 큰 부담 없이 입을 열었다.

“적당한 포구를 하나 내어 줄 테니 그곳에 한하여 귀국의 상선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교역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호오?”

예상과는 달리 곧바로 북미왕국의 제안을 승인하는 듯한 정태화의 대답에 투로시노는 살짝 의외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태화는 계속해서 말했다.

“더불어 귀국의 요구대로 지정된 포구 인근에 귀국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과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 그리고 귀국의 상인들과 선원들이 쉴 수 있는 숙소 등을 만들 공간 역시 내어드리지요.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단숨에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한 정태화였지만 눈빛에는 묘한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기에 투로시노는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군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태화는 내심 안도하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다만 서로 간의 풍속이 다른 만큼 문제가 생길 여지도 있으니 귀국이 사용하는 공간 주변에 담을 쳐서 잡인이 출입하는 것은 막을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결국, 포구 하나를 내어주되 주변에 담을 둘러 격리하겠다는 이야기였지만 어차피 이를 예상했던 투로시노는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아...원상에게 들었던 저 부산의 왜관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원상이 왜관에 관한 이야기까지 했다는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정태화였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운영할 생각입니다.”

이에 투로시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연기하며 시간을 끌다 질문을 던졌다.

“흐음...그렇다면 상인들과 아국에 고용된 인사들만 출입할 수 있겠군요?”

“일단은 그렇겠지요.”

정태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는 무척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귀국의 법도대로 일을 처리할 테고요?”

이에 정태화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투로시노의 기색을 살폈지만, 양보할 기색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섰다.

“흐음...원칙적으로는 그렇소만 아국과 귀국의 풍습이 다른 만큼 문제가 발생하면 귀국의 관리와 협상해 문제를 처리할 생각입니다.”

정태화의 대답에 나쁘지 않다고 여긴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다 한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그렇다면야...아. 한 가지만 아국을 배려해주시면 괜찮을 듯싶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정태화가 묻자 투로시노는 입을 열어 이야기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일단 음...이번 협상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되는 항구를 개항장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투로시노의 말에 정태화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개항장이라...나쁘지 않군요. 그러시지요.”

조정 대신들은 왜인들과 교역하는 지역을 왜관으로 부르는 만큼 북미왕국인들과 교역하는 지역은 북미왕국관이나 혹은 조선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니만큼 동관으로 부를 생각이었지만 굳이 이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기에.

“이 개항장을 저희가 원하는 지역에 지정해달라는 것입니다.”

투로시노의 말에 정태화는 살짝 난감해하며 물었다.

“허허. 어느 지역을 원하시길래 그러십니까?”

투로시노는 그런 정태화의 반응에 크게 웃으며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설마 이 제물포를 원하겠습니까. 아이누 섬의 위치를 고려하면 귀국의 강원도 지역에 존재하는 포구 중 하나를 개항장으로 지정했으면 합니다만...”

하지만 정태화는 투로시노의 대답에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흐음...설마 개척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정태화는 영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긴...귀국은 원상과 접촉했으니 개척촌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겠구려. 헌데 그곳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압니다. 거의 허허벌판에 원상이 일부 유민들을 이용해 조그마한 마을을 건설하고 발전해 이 제물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지만, 공식적으로는 아주 조그마한 포구 마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곳을 개항장으로 지정해달라는 겁니까? 귀국은 원상과 친한 편 아니었습니까?”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태화는 살짝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북미왕국이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해달라는 이야기는 원상이 애써 키운 개척촌을 날로 먹겠다는 뜻으로 들린 것이다.

이에 투로시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원상 역시 언제까지 이를 숨길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기회에 개척촌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정성국이 북미지역에 정착해 개척촌의 중요 인력 대부분을 불러들이고 또 서인들이 개척촌의 성장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기에 원상 소속 선박의 모항을 포로나이로 옮기고 선원들의 가족들 역시 포로나이로 이주하면서 개척촌은 그 규모가 확실히 줄어들긴 했다.

그나마 원상이 조선의 양반들에게 유통하는 여러 사치품을 생산하는 공방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매년 1만이 넘는 조선 유민들이 이곳을 통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만큼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확실히 사람은 줄어 활기가 예전만 못했다.

더불어 이번 협상을 통해 조선이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허락하고 유민들의 이주 역시 허락하게 되고 다른 지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면 개척촌의 규모는 더 줄어들 테고 지금처럼 비공식적으로 개척촌을 운용해 얻을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해 양지로 끌어올릴 생각을 한 원상과 북미왕국이었고 말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정태화는 투로시노의 말도 일리는 있어 고심하다 확답을 피했다.

“흐음...그 말에 일리는 있지만, 개척촌을 개항장으로 지정하는 문제는 일단 원상과 상의를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조선의 상황이 급박해 어지간하면 북미왕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 생각한 정태화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기근이 닥칠 기미가 보이자 보유하고 있는 식량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고 거친 바다를 넘어 북미왕국과 접촉해 이렇게 협상의 물꼬를 틀게 도와준 원상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투로시노는 오히려 희미하게 웃으며 흔쾌히 이를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그건 당연하지요. 그러시지요. 어차피 세부 사항을 실무진이 협상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정태화는 내심 안도하면서 잽싸게 주제를 바꿨다.

“그리고 유민의 이주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이건 개인적인 의문인데 하나만 물어봅시다. 북미왕국은 대체 왜 유민들을 원하는 겁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야기한 대로 빈 경작지가 많은 편이라서 말입니다. 그곳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에 정태화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원상을 통해 꽤 많은 유민을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부족하단 겁니까?”

원상이 아이누 섬에 북미왕국과 협상한 이런 개항장을 운영하기 위해 유민들을 데려간다고 했었지만 결국 개항장은 북미왕국의 영토인 만큼 원상이 데려간 유민들은 결국 북미왕국의 주민이 되리라 판단한 정태화였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 들어간 유민의 수가 꽤 되었고.

헌데도 부족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북미왕국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이를 조선에서도 알고 있다는 어투로 언급했지만, 투로시노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부족하지요.”

“흐음...”

“제 대답에 납득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걸 설명하려면 꽤 길어지는데. 흠...그러니까...”

* * *

투로시노가 적당히 가공한 이야기를 들은 정태화는 몹시 충격을 받은 얼굴로 탄식했다.

“허어. 원주민 대부분이 서양인이 가져온 전염병에 의해 죽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투로시노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태화는 무척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허어...허면 귀국은...”

이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아국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곳 원주민들과는 별다른 교류도 없었고요. 하지만 다른 지역들은 이미 전염병에 의해 초토화된 이후였기에 에스파냐의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획득했음에도 인구는 몹시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백성을 이주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북미왕국이 왜 그렇게 유민을 이주시키길 원하는지 이해한 정태화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흐음...”

“물론 북미왕국은 식량이 몹시 풍족한지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증가하긴 하겠지만 방금 설명했다시피 서양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영역을 확장해야 하는 터라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해서 아국은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의 유민들도 받아들일 생각이고요.”

투로시노의 말이 끝나자 정태화는 살짝 굳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허면 아국의 유민들을 국경 인근으로 이주시킬 생각입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절대 걱정하지 마시지요. 유민들을 방패막이로 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후방의 빈 경작지에서 식량을 생산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니까요. 아국은 사람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히 여기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한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태화는 조금은 인상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귀국의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허면 예상보다 많은 수의 유민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길 원하겠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다만 귀국과의 관계도 있는 만큼, 그리고 어차피 조선의 유민들이 북미왕국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 만큼 대규모의 유민을 단번에 이주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태화는 수긍했다.

“아...그건 또 그렇군요.”

“다만 유민들이 이주하는 것을 막지만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정태화는 북미왕국의 사정을 듣고 이번에 유민들의 이주를 허락했다가 대규모로 조선의 인구가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었다.

하지만 투로시노의 말처럼 북미왕국으로 향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오랫동안 항해해야 하는 만큼 매년 이주하는 유민의 수는 정해져 있었고 또 조선과는 달리 전세가 4할이니 일반 양민이라면 결코 유민이 되어 북미왕국 행을 택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렸다.

“흐음...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주상 전하와 조정 대신들과도 논의가 끝난 사항이니. 유민에 한하여 귀국에 이주하는 것을 막지 않겠습니다. 그거면 되는 겁니까?”

정태화의 대답에 투로시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오오!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유민들을 설득하는 문제는 보부상을 비롯한 상인에게 맡기면 되는 문제니까요.”

이에 고개를 끄덕인 정태화는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더 논의할 것은 없습니까?”

협상할 것이 있으면 빠르게 해치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정태화를 보고 투로시노는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 정도라면 아이누 섬의 관리들을 설득해 식량 창고를 열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본국에서도 이 정도라면 충분히 납득할 테고요.”

“그럼...”

무척이나 긴장한 정태화를 보고 투로시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기본적인 합의는 이루어졌으니 자세한 사항은 실무 관료들에게 맡겨 조약문을 작성한 후 돌아가 도착하는 대로 식량을 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우.”

투로시노의 확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태화였다.

그런 정태화를 보고 투로시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60만 석의 식량을 어떻게 배분해 조선에 운송해야 할지 의논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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