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북미왕국이 선착장에 내려놓은 식량을 모두 옮긴 이후 유철은 슬슬 북미왕국의 사절단을 한양으로 안내하기 위해 다시 투로시노를 찾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상경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투로시노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유철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귀국의 수도에 방문해 국왕 전하를 뵙고 인사를 드리고는 싶습니다만 귀국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어찌 부담을 주겠습니까.”
이에 유철은 투로시노가 조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해서 살짝 정색하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분명 현 조선의 상황이 썩 좋지는 않지만, 사절단을 맞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과한 배려 십니다.”
유철의 대답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사절단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귀국과의 협상을 위한 실무진 일부와 제 개인 호위일 뿐이지요.”
이에 유철은 다시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투로시노는 손을 들어 선착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저기 정박해 있는 선단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정식 사절단의 일원입니다. 물론 일부는 저 배를 지켜야 하니 남아야겠지만...만약 정식으로 사절단이 상경하게 되면 최소 300명이 넘는 이들이 움직여야 하니 분명 귀국에 부담이 될 겁니다.”
“허...300명이라...”
유철은 정식 사절단은 300명이 넘는다는 소리에 움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절단의 대접은 결국 조선이 책임져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를 때라면 모를까 현 조선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3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일이었으니.
더불어 당장 3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재울 곳도 마땅치 않았고.
비록 북미왕국이 먼저 식량을 가져오며 우호적인 교류를 원했기에 사절단을 상경시키기로 했지만 이렇게 대규모 사절단은 논외였다.
이에 조심스럽게 사절단 일부만 상경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유철이었지만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사절단이 상경하게 되면 북미왕국이 생소한 조선 백성들에게도 북미왕국의 위상을 널리 알려야 하는 만큼 규모를 줄이긴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 하면서.
더불어 친선을 위해 서신과 예물까지 가져온 터라 직접 사절단이 상경해 이를 건넨다면 당연히 답서와 답례품을 받을 때까지는 대기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번 조선 방문은 풍랑으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더불어 최근 조선의 기후가 이상한지라 이곳에서 다시 아이누 섬으로 돌아가는 것도 수월하지는 않아 보여 날씨가 좋을 때 하루빨리 출항하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사절단이 정식으로 상경하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투로시노와 조용한 곰은 한양을 방문할 생각이 있었고 그곳에서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관사를 호위하는 해군 병사들을 조선 출신이 아닌 2함대에서도 많지 않은 아이누인들로만 구성했던 것이고.
하지만 예조참판인 유철이 이곳까지 그들을 영접하려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과 어제 말한 제안에 대해 유철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이를 조용한 곰에게 알리고 논의한 끝에 계획을 급히 바꾸었다.
협상의 주도권을 위해서라도 한양으로 가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협상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과 더불어 한양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수많은 질문이 날아올 테고 훗날을 생각하면 대놓고 거짓말을 하기도 곤란했으니 이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현재 조선이 파악하고 있는 북미왕국의 정보는 원상이 북미왕국이 최근 확보한 아이누 섬의 원주민들을 통해 파악한 정보라고 알렸기에 오류가 있어도 훗날 문제가 될 여지는 적었지만, 공식 사절단의 총 책임자로 방문한 투로시노가 직접 답할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출항하기 전에 이에 대비했고 풍랑으로 인해 조선에 도착하는 것이 미뤄지자 조용한 곰은 투로시노에게 알려도 되는 정보와 협상 이전에 알리지 말아야 할 정보를 구분해 철저하게 숙지시키긴 했지만, 조약을 맺기 전까지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투로시노와 조용한 곰이었다.
이에 유철은 조심스럽게 어제 그와 한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지만...어제 이야기한 협상을 진행하려면...”
“아. 그거야 권한이 있는 실무자들끼리 이곳에서 협상을 진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니 귀국에서 사절단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투로시노가 살짝 미소를 짓자 유철은 투로시노가 조선의 사정을 생각해 이러한 제안을 했다 여겨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아국의 사정을 배려해 그리 이야기하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허나 귀국의 국왕 전하께서 직접 쓰신 서신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귀국의 국왕 전하께 보내는 서신과 예물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그거야 귀하를 통해 건네주고 답서와 답례품만 받으면 그만 아닙니까. 당장 답례품을 마련하기 부담스럽다면 아예 저희가 떠날 때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허어...”
투로시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자 유철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들 북미왕국은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에 유철은 이것 또한 그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조정에 장계를 보내 이를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북미왕국이 드디어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2만 석의 식량을 가져왔고 원상의 말처럼 상황이 좋지 못한 조선을 위해 가져온 만큼 아무런 조건 없이 이를 건네주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한양의 조정 대신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하지만 이번에 북미왕국이 가져온 2만 석의 식량으로는 대기근을 막을 수는 없었기에 조정 대신들은 정말 원상이 언급한 대로 북미왕국이 조선에 식량을 팔 수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조선을 도우려면 조선에서 최소한의 명분을 제공해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이번에 제물포에 도착한 북미왕국 사절이 직접 언급한 사례들이 전해지자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조정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결국 북미왕국의 말이 식량을 원한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이권을 달라는 일종의 제안이자 거래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현 조선의 상황이 조선이 건국된 이래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최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조선 팔도에서는 미친 듯이 재해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으니.
다만 지금까지는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었는데 북미왕국이 등장하면서 최소한의 방도가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하더라도 이를 단칼에 쳐내기보단 어떻게든 사절단을 설득해 식량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들도 있는 상황에서 북미왕국의 요구는 그들이 생각하기엔 과하지도 않았고 지원 조건은 무척이나 후했던 것이다.
무려 60만 석을 그것도 조정 대신들이 예상했던 대여나 판매도 아닌 지원이었으며 북미왕국에서 직접 조선 팔도에 운송까지 해준다는 조건이었으니.
몇몇 조정 대신들은 이를 듣고 임진왜란 당시 기근이 발생하자 만력제가 식량 100만 석을 지원해준 것을 떠올리며 명나라가 사라진 이후 이렇게 조선에 호의적인 국가는 처음이라고 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들이 그들이 보기엔 썩 대단치는 않았던 탓이다.
북미왕국이 요구한 원활한 교역을 위해 항구나 선착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은 조정 대신들이 보기엔 일종의 왜관을 만들게 허용해달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차피 북미왕국이 왜국 북부의 섬에 진출해 이웃 국가가 되었고 또 북미왕국이 조선과 꾸준히 교류할 뜻을 밝혔으며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고 식량을 지원할 정도로 조선에 호의적인 것처럼 보였기에, 그리고 북미왕국과의 교역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에 조정 대신들은 이러한 북미왕국의 요청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또 당연히 배려해줘야 한다고 여겼기에 개의치 않은 것이다.
다만 유민의 문제가 좀 걸리기는 했는데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야 유민을 어떻게든 정착시켜 양민으로 만들어 세금을 걷는 것이 최선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정 대신들이 몇 번이고 유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세금도 감면해주는 등 유인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딱 그때만 정착했을 뿐이고 시간이 흐르고 원래대로 세금을 걷으려 하면 다시 도망쳐 유민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았고 이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는 터라 차라리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유민들을 북미왕국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더불어 최근 북쪽 국경 근처의 백성 일부는 기근이 예상되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멀리 있는 대도시로 이동하기보다는 가까운 국경을 넘어 만주의 산나물을 캐고 사냥을 한다는 보고도 올라와 유민으로 인해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일어날까 우려할 정도였기에 유민들이 북쪽 국경을 넘어 만주로 향하는 것보다야 북미왕국으로 보내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다.
다만 몇몇 대신들은 유민들의 북미왕국 이주를 허용했다가 농사를 지을 백성들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긴 했지만,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은 조선을 떠나 북미왕국에 이주할 사람인데 일반 양민들이 과연 고향을 떠나 먼 타국으로 떠나겠느냐는 말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정 대신들이 북미왕국과의 협상을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때 조선의 국왕인 이연 역시 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대신 식량을 지원받는 것이 과히 나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조선에서 먼저 식량을 요청하는 모양새도 아니고 이웃 국가 간의 어려운 점을 서로 돕는다는 모양새였으니.
거기에 저들이 원하는 사항을 들어준다면 60만 석을 나중에 갚을 필요도 없어 보였으니 이연으로서는 어지간하면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식량을 지원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여겼다.
물론 북미왕국이 지원해준다는 60만 석으로 대기근이 도래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이에 더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비축해 둔 식량까지 최대한 푼다면 대기근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는 확실히 줄일 수 있어 보였기에.
그렇게 조선 조정이 어지간하면 북미왕국과 협상해 식량을 지원받기로 중론을 모았을 때쯤에 다시 제물포에서 급히 장계가 올라왔는데 이번에 온 사절단은 조선에 오려다 풍랑에 의해 많은 시간을 허비해 상경하지 않고 이곳 제물포에서 빠르게 협상만 진행하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실제 알고 보니 이번 북미왕국이 보낸 사절단은 3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이라 움직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면서 사절단의 총 책임자가 이를 요청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현 조선의 상황에서 3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이번에 북미왕국의 사절단 역시 식량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나라의 사정을 이유로 사절단을 받지 않았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누구를 제물포로 보내야 하나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영의정인 정태화가 나서서 자신이 북미왕국을 불러들였으니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며 나서자 대신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고 정태화를 무척이나 신뢰했던 이연은 곧바로 이를 허락하며 어지간하면 북미왕국의 제안을 들어주고 식량을 지원받으라고 당부했다.
* * *
“이번 협상의 총 책임자인 정태화라 합니다.”
조선에서 책정한 이번 북미왕국 사절단의 품계는 종2품이었기에 품계 상으로야 자신이 더 높았지만, 북미왕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을뿐더러 이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상대였기에 자신보다 어린 투로시노에게도 깍듯이 존대하는 정태화였다.
이에 투로시노는 웃으며 인사했다.
“북미왕국 사절단의 총 책임자인 투로시노라고 합니다. 저희의 요청을 들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 투로시노의 말에 정태화는 이곳에 도착해 유철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아닙니다. 예조참판에게 듣자니 아국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조선의 사정도 배려하고 사절단의 사정도 고려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보다 사정이 그러하니 빠르게 협상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