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북미왕국의 해군들은 모두 배에서 대기하고 투로시노와 조용한 곰을 비롯한 외무청 관리 4명과 만약을 대비해 이를 호위하는 병사 10명으로 이루어진 북미왕국 사절단이 인천 도호부의 관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유철은 북미왕국 사절단이 머무는 관사에 방문해 관사 앞마당을 거니는 투로시노에게 다가갔다.
“편히 쉬셨습니까?”
투로시노는 유철을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뱃멀미로 고생한 사람도 있었기에...”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사절단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가 곤란했으니.
“저런...괜찮으십니까? 혹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런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원이 필요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곳에서 쉬니 많이 나아졌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투로시노는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참으로 좋군요. 이곳으로 오기 위해 항해할 때만 해도 어두컴컴하거나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는데 말입니다.”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 역시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참으로 좋은 날씨입니다.”
유철이 수긍하자 투로시노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조선 날씨는 이렇게 화창한 편이지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비가 많이 내리고 풍랑이 심한 것은 아니라고 하던데...”
그 말에 유철은 안색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올해의 기후는 참으로 이상할 정도이지요.”
“그렇군요. 허면 또 언제 이곳에 비가 올지 모른다는 뜻이니...이렇게 날씨가 좋을 때 싣고 온 식량을 내렸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당황했다.
분명 북미왕국이 조선에 지원하려고 식량을 가득 가져온 것은 원상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런 공치사도 없이 곧바로 이렇게 내어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것이다.
“그...그래주신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만...”
그런 유철의 반응을 투로시노는 다른 뜻으로 해석한 것인지 웃으며 급히 덧붙였다.
“아. 원상을 통해 전했다시피 이건 이웃한 우리 북미왕국이 갑작스럽게 닥친 이상기후로 인해 잠시 어려워진 귀국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뿐이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유철은 잠시 자신을 보고 미소짓고 있는 이 이국적인 젊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이번에 이들이 가져온 식량이 많지는 않다고는 하나 이들의 행동이 절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던 유철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귀국과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는데 무상으로 식량을 지원해준다니 귀국의 배려에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에 투로시노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헌데...이곳에 식량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공터에 식량을 쌓아뒀다가 비라도 내린다면...”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유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이번에 가져온 식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음...원상에게 들었던 귀국의 기준으론 아마 2만 석이 조금 넘을 겁니다. 우리 북미왕국과 귀국의 도량형이 다르니까요.”
정성국이 북미지역에 건너간 이후 개척촌의 장인들만 사용하던 미터법으로 도량형을 통일시켜버렸다.
야드 파운드 법이야 정성국도 익숙하지 않았고 척관법은 그나마 조선에 살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척관법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할뿐더러 당장 그의 지식으로 만든 기초 교과서는 전생의 교과서를 옮긴 것에 불과했기에 미터법을 사용하는 만큼 아예 북미왕국의 도량형을 미터법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조선 출신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1석의 기준도 전생에 맞춰 조정했고 덕분에 북미왕국의 벼 1석은 조선의 대곡 1석에 비해 부피가 컸기에 이를 언급하자 유철은 생각보다 많은 식량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습니까. 허어. 확실히 북미왕국의 배가 크긴 크군요. 8척에 2만 석이라니...”
보통 조선의 조운선이 1천석 가량은 운반했기에 이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급 전선은 말 그대로 전선이었고 또 기선이었기에 무장과 병사들의 숙소, 식량, 그리고 연료 등의 문제로 적재량이 적은 편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투로시노는 내색하지 않고 유철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유철은 감탄하다 자신의 추태를 파악하고 급히 입을 열었다.
“크흠. 이곳에 식량을 내려두시면 이쪽에서 군사를 동원해 내륙의 창고로 옮기면 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바로 식량을 내려놓으라고 하지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관사 안쪽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북미왕국의 병사에게 다가가는 투로시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철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이다.”
* * *
투로시노가 정일신에게 사람을 보내자 정일신은 곧바로 병사들을 움직여 그들이 싣고 온 식량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협상은 시작하지도 않았고 북미왕국의 실체를 조선에 알릴 이유가 없었기에 병사들에게 입을 함부로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에 병사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식량을 옮기기 시작했다.
2함대의 병사들은 태반이 개척촌이나 유민 출신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조선을 버리고 북미왕국을 택했기에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더욱 조심했고.
오히려 배 위에서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에 열심히 배에 실려있는 식량을 내리기 시작하자 조선 관리들은 급히 제물진의 병사들을 부르고 제물포 인근의 백성들과 우마차를 최대한 동원해 식량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유철은 옆에서 주변 풍경을 구경하는 투로시노를 보며 말했다.
“우리 조선은 귀국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에 투로시노는 유철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젠 이웃 국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행히 우리는 식량에 여유가 있었기에 도운 것뿐입니다.”
“허어...”
유철은 투로시노의 말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 조선의 이웃 국가라고 해봐야 청나라와 왜국인데 둘 다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헌데 조선에 우호적인 국가가 이렇게 이웃 국가로 등장했으니 유철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듣기로는 이들도 대국이라고 들었는데...태생이 오랑캐인 청나라와는 전혀 다르구나.’
비록 원상에 의해 조선의 정보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북미왕국의 정보 역시 원상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원상이 가공한 정보였지만.
어쨌건 상황이 그런 만큼 조선도 북미왕국에 아예 무지하지는 않았고 감성우가 정평화에게 건네준 세계지도 역시 조정 대신들은 한 번씩 살펴보기도 했기에 조정 대신들은 내심 북미왕국을 청국과 비슷한 대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원상이 전해 준 북미왕국의 정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고 원상이 확인한 것 역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원상이 전해 준 세계지도로 인해 최소한 조정 대신들의 세계 인식은 조금이나마 변하게 되었다.
원상이 전해 준 북미왕국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상이 전해 준 이 북미왕국의 세계지도는 임진년에 명나라로부터 전해진 세계지도와도 흡사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당시야 조선인의 세계 인식 자체가 중화적 세계관이었기에 이때 전해진 마테오 리치가 만든 이 지도는 조정 대신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남만인이 제작했다는 소리에 과연 과장이 심하다고 여겼지만, 북미왕국까지 비슷한 지도를 보내자 이 지도가 사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세계 인식이 조금은 바뀐 것이다.
유철이 그러한 생각에 잠겼을 때 투로시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솔직히 이번에 가져온 식량으로 조선에 닥친 기근을 막기는 불가능하지요.”
이에 정신을 차린 유철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투로시노는 한창 식량을 옮기는 조선 백성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번에 가져온 식량이 제가 임의로 동원할 수 있는 식량 전부라는 겁니다. 북미왕국에서는 식량이 풍부한 편이라 주변 원주민과의 우호적인 교류를 위해 외무청 관리에게 일정 식량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이번에 가져온 식량으로 전 그 한도를 다 채운 셈이니까요.”
그 말에 유철은 가슴이 철렁해 급히 투로시노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원상에게 듣기로는...”
투로시노는 유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비록 아이누 섬에 많은 식량이 비축되어 있긴 합니다만...이는 어디까지나 아이누 섬을 비롯해 그 인근에 사는 백성들을 위한 식량이라 제가 임의로 이 식량에 손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유철은 살짝 인상을 흐리며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저 왜국 북방의 원주민들처럼 귀국을 상국으로 모셔야 한다는 뜻입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펄쩍 뛰면서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 십니다. 애초에 우리 북미왕국이 아이누인들을 도운 것은 왜인들에 의해 아이누인들이 핍박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귀국에 무상으로 식량을 지원한 것과 비슷한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도움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누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을 지키려 들었을 뿐이니까요.”
“으음...”
“다만 왜인들을 몰아내고 독립한 아이누인들은 왜국의 국력을 두려워해 우리 북미왕국에 속하기를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한 것이지만 귀국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허니 귀국이 우리 아국의 속국이 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휘휘 저은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투로시노에게 사과했다.
“크흠. 귀국의 선의를 오해해서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투로시노가 선선히 사과를 받아들이자 유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결국,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로군요.”
이에 투로시노는 바로 그렇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명분이 있다면 아이누 섬에 비축된 식량 일부를 귀국에 지원할 수 있겠지요.”
“지원이라고요?”
유철이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투로시노를 바라보자 투로시노는 슬쩍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상에게 듣기로는 조선이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다고 들었으니 식량을 판매한다고 해서 이를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기근을 최소한의 피해로 버티려면 막대한 식량이 필요했는데 당장 조선에서 그만한 식량을 사들일 정도의 재물은 없었기에 유철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요.”
그런 유철을 반응에 투로시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귀국이 아국을 돕는다면 저는 그것을 명분으로 귀국에 식량 지원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이에 유철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이 북미왕국은 대국으로 보였는데 자신들이 돕는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국이 귀국을 돕는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는다는 겁니까?”
유철의 물음에 투로시노는 내심 바짝 긴장하면서도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지나가듯 말했다.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가 있지요. 이번 일을 계기로 아국과 귀국이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교역도 진행할 텐데 이때 아국의 상단이 귀국 항구를 편히 이용할 수 있게 돕는다던가, 혹은 아국의 상단이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선착장을 만들 수 있게 귀국이 돕는다던가, 아니면 최근 우리가 확장한 지역에 빈 경작지가 많아 고민인데 이곳에 정착해 경작지를 일굴 의사가 있는 유민들을 모으는데 귀국이 아국을 조금 돕는 것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투로시노의 제안은 결국 식량을 지원해줄 테니 몇몇 이권을 내놓으라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거래라는 단어 대신 서로 돕고 돕는다고 표현했을 뿐이지.
이를 파악한 유철은 잠시 안색을 흐렸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당장 급한 것은 조선이었고 저들의 제안이 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단순히 북미왕국의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제물포까지 나온 것이기에 조정에 이 제안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으음...그것으로 충분합니까?”
그러한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는 속으로는 쾌재를 내지르면서도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흐음...그...”
유철이 무엇을 묻는지 짐작한 투로시노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만약 귀국이 아국을 돕는다면 전 아이누 섬에 있는 식량 대부분을 지원하겠습니다. 그 양은 귀국의 도량형으론 아마 60만 석이 넘어갈 테고...조선 사정상 운송도 쉽지 않을 테니 우리가 직접 조선 팔도의 포구에 옮겨드리지요.”
“...귀국의 제안은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