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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14화 (214/850)

214화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는 인급 전선의 갑판 위에 서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휴우...드디어 도착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참 오래도 걸렸네요.”

처음 원상에 의해 조선 상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접촉하기 위해 나섰다가 기상 문제로 인해 홋카이도의 마쓰마에 항에서 한 달 넘게 대기하다 계속된 장마와 풍랑이 잦아들자 출항했었다.

다만 올해 조선에 이상기후가 만연했기에 만약을 대비해 단번에 제물포로 향하려던 인급 전선으로 구성된 선단은 일단 개척촌에 들러 연료를 보급하고 조선 남부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기상이 나쁘지 않다는 원상의 말에 급히 출항했지만, 전라도를 지날 때쯤에 다시 비구름과 풍랑이 심상치 않아 목포에 잠시 정박했고.

처음 북미왕국의 선단을 보고 기겁했던 조선 관리들이었지만 원상의 배가 함께 움직여 사정을 설명했기에 다행히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이때도 목포 인근에서 일주일 가까이 지체했고 그 이후에야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다시 출항해 마침내 제물포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풍랑이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뱃멀미로 인해 고생했던 조용한 곰은 더더욱.

이에 둘은 말없이 한참을 제물포를 바라보았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조용한 곰은 다시 주변을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아니. 선착장 규모는 큰 편인데 조금...”

조용한 곰이 말을 흐렸지만, 투로시노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투로시노가 보기에도 제물포는 생각보다 허름하고 제대로 개발되어있지 않은 탓이다.

특히나 조용한 곰이나 투로시노는 이 제물포의 위치를 생각하면 북미왕국의 새김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포구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으니.

“하긴...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라고 들었는데 조금 허름해 보이기는 하는군요. 포로나이나 개척촌이야 그렇다 쳐도 풍랑을 피하려고 잠시 머물렀던 목포보다도 못한 수준이니...”

조용한 곰은 투로시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쪽 상부 구조물의 문이 열리며 정일신이 나오다 이 말을 들었는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하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곳이 한강으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 포구이긴 한데...조선의 배들은 굳이 이곳에 정박해 짐을 내리진 않습니다. 곧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한강을 거슬러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직행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다른 항구도시와는 조금 다르죠.”

조용한 곰은 정일신의 말에 그러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야 이해가 가는군요. 허면 우리가 제물포로 향한 것은...”

정일신은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선 조정을 안심시키기 위해섭니다. 저 북쪽으로 올라간다면 한강 하류로 진입할 수 있으니 조선 조정에선 기겁할 테니까요. 더불어 조선 수군은 비상이 걸릴 테고.”

조용한 곰은 한강이라는 말에 새한강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렇긴 하군요. 타국의 배가 새한강으로 진입한다고 생각해보면...우리도 기겁하며 이를 막으려 들 테니.”

그 말에 정일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지요. 우리 북미왕국이야 뭐...1함대가 있는 이상 타국의 선박은 새한강은커녕 새김포만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하겠지만요.”

1함대의 존재 이유를 말하는 정일신의 말에 조용한 곰은 그도 그렇다는 듯 슬쩍 웃었다.

그때 정일신이 자신이 이곳에 나온 이유를 떠올렸는지 입가에 웃음을 지우고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보다 맨 앞쪽에 있는 원상의 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미 제물포에서 조정의 관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군요.”

보통은 외국 배가 출몰하면 관리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문정에 나서지만, 이번 경우는 원상이 함께 움직이며 이 선단이 북미왕국의 선단이라는 것을 알렸을뿐더러 북미왕국이 제물포에 도착한 이유를 조선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문정을 하지 않고 곧바로 포구에 정박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이러한 사항까지 정일신이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북미왕국의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관리 중에는 예조참판 영감도 있다고 합니다.”

정일신의 말에 투로시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협상에 나서기에 기본적인 사항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에 예조 참판이 종2품의 고위 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허어...예조참판이면 무척 높은 관리 아닙니까? 헌데 여기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그렇답니다.”

조선에서는 사대교린의 정책에 따라 외국 사신을 둘로 분류해 접대했다.

사대할 대상과 교린할 대상을 나눈 것인데 당연히 사대할 대상은 명나라였고 교린할 대상은 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청나라를 사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반청 의식과 조선을 소중화로 여겼기에 청나라 사신을 폄하했다.

그리고 당연히 북미왕국은 교린 관계로 여겼고 북미왕국의 국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과 자신들을 돕기 위해 식량을 가져온다는 점을 고려해 왜국과 유구의 사신과 비슷한 급으로 책정했다.

또한, 원상을 통해 북미왕국 국왕이 보낸 친서까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이번에 방문하는 사절을 국왕사(國王使)로 판단하고 비슷한 품계인 종2품 예조참판을 이곳까지 보낸 것이다.

이러한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정성국이나 다른 조선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조선의 고위 관리가 직접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에 조용한 곰이 중얼거렸다.

“흐음...그렇게 높은 관리가 계속 이곳에서 기달렸다라...”

정일신은 이를 듣고 잽싸게 손을 내저었다.

“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에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원상에서 우리의 사정을 알린 후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거나 아니면 우리가 풍랑을 피하고자 목포에서 발이 묶였을 때 육로를 통해 소식이 간 모양입니다.”

거의 두 달 넘게 기다리게 했다면 아무리 기상 때문이라지만 미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지 않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조용한 곰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나마 우리를 환대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이에 정일신은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이런 시국에 식량을 싣고 왔으니 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이번에 가져온 식량은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는 셈이니.”

* * *

기다렸던 북미왕국의 선단이 드디어 도착했다는 소식에 예조참판인 유철은 급히 포구로 나와 천천히 다가오는 8척의 커다란 배를 보고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 말에 유철을 보좌하기 위해 함께 온 예조정랑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남쪽에도 다시 수해가 발생했다는 소리에 당분간은 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사절이 도착하지 않자 이미 풍랑에 의해 물귀신이 된 것으로 여겼지만 원상이 북미왕국의 사절은 단순히 풍랑을 피해 회항했을 뿐이며 기상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방문할 것이라는 점을 알리자 조정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소와는 달리 조선 남부뿐만 아니라 중부와 북부까지도 수해로 인해 피해가 극심했던 탓에 조정 대신들 모두가 곧 대기근이 닥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으니까.

이에 대신들은 북미왕국 사절단이 도착할 제물포에 사절단을 환영할 조정 대신을 보내기로 하고 바로 예조참판인 유철을 보내버린 것이다.

“그러게나 말일세. 그보다 저들의 배는 좀 특이하구만.”

개척촌에서도 돛이 없는 기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 기선은 개척촌과 아이누섬을 오갔을 뿐이고 조선 연안을 항해하는 원상의 배는 오직 범선인 인급 함선들이었기에 조선인들에게도 돛이 없이 움직이는 기선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유철은 북미왕국의 기선을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그런 유철의 말에 예조정랑이 맞장구쳤다.

“원상에서 설명한 대로 돛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 생소하긴 하군요. 다만 배의 크기는...원상의 대선과 비슷해 보입니다.”

이에 유철은 조금 놀란 기색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허허. 한강을 오가는 쪽배만 보다가 저 북미왕국의 대선을 보니 조금 놀랐는데 조선에도 저런 큰 배가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로군.”

예조정랑은 원상과 가까운 편이었기에 급히 덧붙였다.

“이번 저들의 방문에도 원상의 공이 컸고요.”

그러면서 원상에 대해 칭찬을 하려는 예조정랑이었지만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건 들었네. 영상 대감의 명에 풍랑이 거센 바다로 나가 저들과 접촉해 결국 지원을 끌어냈다고 하니...거기에 최근 원상에서 조선 각지에 비축해 둔 식량을 구휼미로 풀고 있다지? 이번에 원상을 보고 천한 상인 중에도 인물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하하하. 뭐 그렇지요. 원상은 다른 상단과는 조금 다르니까요. 인간의 도리는 아는 상단이랄까요?”

보통의 경우는 조정의 눈치와 더불어 지방의 양반들 눈치까지 봐야 하는 만큼 상단 차원에서 함부로 구휼미를 풀 수 없었다.

민심을 현혹한다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었고 지방의 양반들은 흉년이 들면 식량을 빌미로 논밭을 넓힐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했기에 원상에서는 곧바로 비축한 식량을 구휼미로 풀기 시작했다.

어차피 원상의 경우는 한양 양반들의 사치품을 제공하는 만큼 이들과는 가까웠고 또 관리들과는 인정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오해를 받을 여지는 적었던 탓이다.

그리고 지방의 수령들이야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한다면 이는 수령의 책임이니 원상을 도울 수밖에 없었고.

평소라면 불만 어린 시선을 보낼 지방의 탐욕스러운 양반들조차 이번엔 상황이 영 심상치 않았기에, 그리고 아무리 원상이 조선 제일의 상단이라고는 저들이 푸는 식량만으로 이 기근을 넘기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일단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미 보리의 수확은 망쳤기에 지금쯤이면 아사자가 발생할 거라 여겼는데도 이러한 원상의 노력 덕분에 아직 보고된 아사자는 없었기에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원상을 좋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유철은 예조정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착장에 가까워진 북미왕국의 커다란 배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어. 멀리서 보는 것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또 다르군.”

이에 멀리서 원상의 배를 봤었던 예조정랑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그렇군요. 판옥선만 해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렇게 북미왕국의 배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북미왕국의 배가 하나둘 선착장에 정박했고 한 배에서 대여섯의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예조정랑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어. 북미왕국이 먼 곳에 위치한 나라라더니...확실히 생김새가 조금 다르군요.”

“그렇군. 그리고 복식도 확연히 다르고.”

이미 원상이 북미왕국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했었기에 유철은 저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는 않았다.

원상이 이야기하기를 북미왕국 본토는 꽤 더운 편이고 청결을 중시하는 터라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수염마저 짧게 자른다고 했으니.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런저런 말이 돌긴 했지만, 문화가 다르고 북미왕국이 유학을 숭상하는 것도 아닌데 왈가왈부할 이유가 있느냐는 정태화의 말에 다들 수긍한 것이다.

그렇기에 유철이나 예조정랑 역시 색다른 모습의 북미왕국 사절단을 보고 신기하다는 눈빛만 보낼 뿐이었고.

“근데 정말 말이 통하려나 모르겠습니다.”

예조정랑의 걱정에 유철도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이를 떨쳐냈다.

“원상에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으니 믿어봐야겠지. 자. 이제 저들을 맞이하러 가세.”

그렇게 유철이 발걸음을 옮기자 예조정랑을 비롯한 관리 여럿이 그 뒤를 따랐다.

선착장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던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조선인들의 복식을 확인하고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투로시노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조선의 관리십니까?”

유창한 조선말에 유철은 움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그...그렇습니다. 이번 북미왕국 사절단의 영접을 맡은 예조참판 유철이라 합니다.

이에 투로시노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북미왕국의 외무청 소속의 관리이자 이번 사절단의 총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된 투로시노라고 합니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거 참...조선말을 참 잘하시는구려.”

이에 투로시노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말이 통해야 타국과 교류할 수 있으니 외무청 관리라면 당연한 소양이지요.”

“그렇습니까?”

유철이 고개를 갸웃하자 투로시노는 웃으며 덧붙였다.

“예. 조선말뿐만 아니라 왜인들의 말도 할 수 있답니다.”

“아...그렇군요.”

현재 북미왕국이 진출한 지역의 위치를 떠올린 유철은 이내 수긍하며 투로시노를 보고 말했다.

“뱃길로 이곳에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테니 저희가 마련한 곳에서 잠시 쉬도록 하시지요.”

“배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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