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클레멘트 코트렐은 자메이카 킹스턴의 선착장에서 내리면서 발견한 중년 남성을 보고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함장님.”
클레멘트 코트렐의 앞에 있는 중년 사내는 예전 클레멘트와 함께 새진주를 방문해 북미왕국을 관찰했던 잉글랜드 해군 소속 함장이었다.
중년 사내는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다에 던지며 클레멘트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다시 뵙게 되어 기쁘군요. 코트렐 경.”
그러면서 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런던과 이곳 자메이카 인근의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오. 그럼 코트렐 경이 다시 특별 대사로 임명되어 이곳에 오신 것은 북미왕국과의 협상 때문입니까?”
클레멘트는 슬쩍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저를 좋게 보셔서 이러한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허어. 축하드립니다. 코트렐 경.”
클레멘트 코트렐은 젊고 가문이 대단하다거나 작위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전에야 단순히 북미왕국의 실체를 파악하는 임무였기에 그가 특별 대사로 임명되어 방문한 것이 놀랄 것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본국에서는 북미왕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했을 테고 그런 만큼 이번 협상은 본국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든지 간에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협상의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클레멘트가 찰스 2세에게 신임을 받았다는 의미였기에 진심으로 축하하는 함장이었다.
그렇게 대화하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선착장 끝까지 이동한 함장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선 좀 진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요. 그래. 본국에선 어떤 결정을 내린 겁니까?”
함장의 물음에 클레멘트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제가 특별 대사로 다시 이곳에 방문한 것을 보고 짐작하셨을 텐데요?”
“그럼...”
“그렇습니다. 찰스 2세께서는 저보고 북미왕국과 접촉해 저들이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구입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하셨습니다.”
클레멘트의 확답에 함장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장 역시 직접 북미왕국의 힘을 목격했었기에 본국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북미왕국과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내심 부담스러워했었으니.
물론 잉글랜드의 군인으로서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온다면야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과연 북미왕국의 군함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헌데 본국에서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방어하기 위해 북미왕국과 맞설 생각은 없다니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휴우. 정말로 다행이군요. 잘하셨습니다. 코트렐 경. 국왕 폐하를 설득하시다니.”
이에 클레멘트는 고개를 저으며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설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런던에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북미왕국을 꽤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북미왕국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작년에 제가 이곳에 방문했던 것이고.”
“그렇기야 하지요.”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멘트는 슬쩍 주변을 살피다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더불어 저도 그렇지만 함장님 역시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북미왕국에 의해 신대륙에서 가장 세력이 큰 에스파냐마저 낭패를 본 것을 이미 확인했고 저와 함장님의 보고서도 북미왕국과 맞서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내용뿐이니...바로 결정은 내리신 듯 보였습니다. 다만 저를 불러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지요.”
직접 찰스 2세와 대면했다는 클레멘트의 말에 함장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허어. 그렇군요.”
클레멘트의 말처럼 찰스 2세는 클레멘트를 불러 그가 직접 목격한 것을 듣고 여러 질문을 던진 후 곧바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포기를 결정했다.
클레멘트의 말을 들어보니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군비가 소요될 것은 뻔했기에.
다만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투자한 귀족들이나 상인들이 반발할 것이 뻔했기에 이를 공론화하기 전에 사전작업으로 클레멘트에게 명령했다.
그가 파악한 정보를 런던의 귀족들에게 알리라고.
클레멘트는 그런 찰스 2세의 명령에 무슨 의미로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인지 이해하고 최대한 북미왕국의 위험성을 부풀려 런던의 귀족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런던의 귀족들과 상인들은 불안해하며 지금이라도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방어할 군대를 보내자고 주장했다.
이에 찰스 2세는 북미왕국에 관한 보고서를 들먹이며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안전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최소 3만 이상을 파병하고 이를 꾸준히 유지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럽다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귀족들과 상인들은 반발했지만 최근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 그리고 2차 영란전쟁의 패배로 인한 뒷수습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찰스 2세의 말에 더는 반발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과 상인들의 고심이 깊어갈 무렵 찰스 2세는 보좌관과 클레멘트를 움직여 하나의 여론을 형성해나갔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북미왕국에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빼앗길 테니 군대를 양성하고 파병하는 비용 일부를 지원하면서 찰스 2세를 설득하거나 아니면 이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손실을 줄이자고.
이러한 여론에 귀족들과 상인들은 잠정적으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장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조리 투자해도 그 비용을 감당하기는 부족했던 탓이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자 찰스 2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이권을 가진 귀족들을 불러 그냥 포기하긴 아까우니 북미왕국에 식민지를 파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이에 귀족들은 찰스 2세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동의했다.
어차피 버텨봐야 남는 것은 없었는데 찰스 2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북미왕국에 팔아 얻는 수익 일부를 귀족들에게 나누어준다 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찰스 2세는 그의 손발이 되어 영민하게 움직인 클레멘트를 눈여겨보았고 귀족들의 설득이 끝나자 클레멘트를 다시 특별 대사로 임명하여 보낸 것이고.
“오히려 식민지에 여러 이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상인들을 설득하느라 좀 늦어졌기에 걱정이었는데...아직 북미왕국의 움직임은 없었던 모양이군요.”
별다른 보고도 없었고 평온한 킹스턴의 선착장을 보며 중얼거리는 클레멘트를 보고 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휴우. 다행입니다.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북미왕국이 북진해 허무하게 깨진다면 무척이나 곤란했는데 말이지요.”
이에 함장은 클레멘트에게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작년에 방문해 북쪽에 우리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존재한다고 알렸기 때문인지 일단은 주변 지역을 장악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더군요. 더불어 새진주에서 봤었던 그 기괴한 모양의 군함이 주변 해역을 순찰하면서 제대로 국적기를 달지 않고 배회하던 해적선들을 공격하기도 하고요.”
이에 클레멘트는 시선을 돌려 함장을 보고 급히 채근했다.
“허어. 그렇습니까? 그래서요?”
함장은 말해 무엇하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해적들이 북미왕국의 군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보이는 족족 침몰하는 터라 요즈음 바하마 서쪽에 해적선은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에스파냐만 신났지요.”
“그렇겠군요.”
해적들의 주목표는 아무래도 값비싼 물품이 가득 실린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이었다.
다만 북미왕국의 군함이 주변 해역을 순찰함에 따라 멕시코만 북부와 플로리다 동해안은 위험지대로 변모했기에 해적들은 이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은 산 아구스틴까지는 아무런 습격도 받지 않고 편하게 이동한 후 대서양을 건넜기에 습격할 기회 자체가 줄어들어 예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보다 언제쯤 새진주로 향하실 겁니까?”
함장의 물음에 클레멘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바로 가고 싶습니다만...”
방금 대서양을 건너온 클레멘트였기에 함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나름 뱃사람 체질인지 크게 힘들지도 않고 본국의 귀족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 만큼 하루라도 빨리 새진주로 가서 저들과 협상을 시작해야 하니까요.”
클레멘트의 대답에 함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선원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클레멘트는 씩 웃었다.
“하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 * *
“오셨습니까. 함대 사령관님.”
이정운은 2함대 사령부에 김봉길이 들어오자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아아.”
김봉길은 대충 손을 흔들어준 후 의자에 앉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항해도 꽤 심심했어. 이젠 해적들이 얼씬도 안 하는 느낌이야.”
김봉길의 말에 보고서를 살피던 이정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그럴 수밖에요. 지금까지 침몰시킨 해적선만 해도 30척이 넘잖습니까. 그러니 해적들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해적이라 해도 목숨은 아까운 법이니 북미왕국 해군이 순찰하는 해역엔 얼씬도 하지 않고 멀리서 삼태극기가 보이면 급히 내빼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시간이 흐르고 새진주에서 인급 전선이 계속 건조되어 2함대에 배속되기 시작하자 김봉길은 2함대를 움직여 새진주와 산 아구스틴 간의 항로를 따라 2함대의 인급 전선들을 보내 해역을 순찰하면서 해적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해적선들은 인급 전선의 전투력을 당해내지 못해 하나둘 침몰하고 살아남은 해적들은 포로로 잡혀 새진주의 탄광에서 곡괭이질을 해야 했다.
그러자 해적들은 이 해역을 기피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플로리다반도 인근에 해적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기야 한데...이래서야 곧 건조되는 지급 전선이 활약할 기회가 전혀 없을 것 같아 아쉬워서 그렇지.”
김봉길은 최근 건조되기 시작한 지급 전선을 거론하며 무척이나 아쉬워하자 이정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에스파냐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순찰 범위를 조금 넓게 잡을까요? 아니면 플로리다 지역 북동쪽 해역을 순찰하면 될 것도 같은데.”
이에 김봉길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포탄이며 연료도 다 돈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비밀동맹까지 맺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기존의 항로 대신 우리가 순찰하는 해역으로 이동하는 꼴이 영 달갑지는 않거든.”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이정운 역시 내심 동의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산 아구스틴은 어떻습니까?”
최근 업무가 많아지자 김봉길은 귀찮다는 이유로 대부분 업무를 이정운에게 떠넘기고 밖으로만 돌고 있었기에 산 아구스틴에 가본 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 흘렀기에 궁금증을 나타내자 괜히 양심에 가책을 느낀 김봉길은 슬쩍 이정운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뭐 여전히 활기차고 북적거리네. 티무쿠아 족은 뻔질나게 산 아구스틴을 들락거리고 있고...남쪽의 원주민들도 간혹 산 아구스틴까지 그 조그만 배를 타고 와서 이런저런 물건을 사러 오니.”
처음 산 아구스틴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꽤 황폐했었지만 계속해서 새진주에서 사람과 물자를 보내기 시작해 산 아구스틴을 재건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나아졌다.
거기에 지금까지 산 아구스틴에 머물던 백인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자신들과 비슷한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큰 배를 타고 나타나 정착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티무쿠아 족이 호기심에 몇 번 방문했고 이들이 에스파냐인처럼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시장에는 여러 신기한 물품들과 그 비싼 철제 제품들이 비교적 값싸게 파는 것을 확인하자 티무쿠아 족은 뻔질나게 산 아구스틴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2함대가 플로리다반도를 순찰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해적들을 물리치는 것을 목격한 남쪽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판단하고 하나둘 산 아구스틴으로 찾아와 교류를 시작하는 터라 꽤 북적이는 산 아구스틴이었다.
이를 김봉길이 설명하자 이정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정운의 그런 미소에 김봉길은 점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당분간은 이곳에서 자신이 업무를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아직 소식은 없나? 잉글랜드 놈들 말일세.”
이에 이정운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엉덩이가 꽤 무거운지 아무런 소식도 없군요.”
“흐음...뭐 일단은 2함대의 확장과 플로리다 지역이 장악이 우선이니 상관은 없지만...”
북미왕국의 훈련을 가장한 화력 시범을 참관한 후 새하얗게 질렸던 잉글랜드인들이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은 곧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할 뜻을 내비쳤고.
그렇기에 곧바로 본국에 이를 알리고 무언가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아직 소식이 없었기에 좀 의아하긴 했다.
비록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으니.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병사가 들어와 김봉길을 찾았다.
“함대 사령관님!”
“음?”
“무슨 일인가?”
“잉글랜드 깃발을 단 배가 새진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김봉길과 이정운은 서로를 바라보고 피식하고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딱 그 짝이네요.”
이정운의 말에 김봉길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 일 중독자인 웅크린 늑대가 좋아할 소식이로군.”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