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조용한 곰은 투로시노와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찾아온 정일신을 반겼다.
하지만 정일신이 용건을 꺼내자 조용한 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허. 개척촌에서 배가 도착했다는 겁니까? 포로나이에?”
“그렇답니다.”
이에 조용한 곰은 급히 정일신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조선의 날씨가 괜찮은 건가요?”
하지만 정일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한양에서 이미 북미왕국의 사절을 만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보이지 않자 이런저런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한양의 감도방이 개척촌에 몇 번이고 연락했고 이에 조금은 무리해서 바다로 나온 모양입니다.”
“허. 그럴 수가...”
자신들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원상의 선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에 나선 것 같아 조용한 곰과 투로시노가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자 이를 알아차린 정일신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그렇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무리해서 나온 것은 아니고 기상을 살피다 파도가 좀 잦아들었을 때 곧바로 출항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기존의 항로와는 달리 해안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항해하다가 기상이 좋지 않다 싶으면 인근에 정박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고...이런 식으로 해안가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 날씨가 괜찮아지자 곧바로 포로나이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정일신의 설명에 조금은 안도한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긴. 우리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몰랐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그렇게 포로나이에 도착한 후 선단이 아무런 피해 없이 단지 풍랑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에 안도하면서 하루빨리 이를 알려야 한다고 말한 후 곧바로 다시 개척촌으로 떠났다 합니다.”
“허어...”
아직도 풍랑은 평소보다 거셌기에 안전을 위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조용한 곰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 곧바로 포로나이에서 출항한 원상 소속 선원들의 담력에 감탄했다.
다만 옆에서 이를 듣고 있는 투로시노는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정일신에게 물었다.
“어라? 우리도 저들과 비슷한 항로로 항해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에 정일신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위험을 감수한다면야 출항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북미왕국의 사정상 당분간은 북미 동해안의 2함대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서쪽에 있는 1, 3함대의 지원은 상당히 줄어든 상황이다 보니 전선 한 척 한 척이 무척이나 소중했기에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더불어 이번에 원상에서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가뭄에 이은 수해 덕분에 조선 내부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심각하고 흉흉했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대기근이 시작되어 아사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원래라면 이미 아사자가 발생했을 시기였지만 원상에 의해 감자와 고구마가 퍼져 원래보다 비축된 식량이 조금은 많았기에 아직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슬슬 먹을 것이 부족해지는 시기가 다가오자 만약을 대비해 원상이 조선 팔도에 비축해둔 식량 일부를 풀기 시작했으니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테고.
물론 조선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만큼 조선 출신인 정일신의 마음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정일신은 자신을 북미왕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직위가 3함대 사령관인 만큼 3함대 소속 해군의 목숨까지 그의 판단에 달려있었기에 냉정하게 판단한 것이다.
“한 척이 이동하는 것과 여러 척의 배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거기에 우리는 적재량의 한도까지 식량을 실어둔 상황이라 굼뜰 수밖에 없어 더 위험하고. 마지막으로 개척촌 북쪽으로는 인급 전선 8척이 정박해 비바람을 피할만한 포구가 거의 없습니다.”
함경도의 경우는 풍랑을 피할만한 포구 자체가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 커다란 원산포를 제외하면 인급 전선 8척이 정박할만한 포구도 없기에 이를 거론하자 투로시노는 이에 수긍했다.
“아...그렇군요.”
정일신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조용한 곰을 보며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포로나이에 도착한 원상의 선장도 조선 남쪽은 풍랑이 심해 원상의 배들도 운항을 멈춘 상황이라고 전했으니...당분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조용한 곰은 어차피 바다에 대한 것은 잘 모를뿐더러 조선의 바다는 조선 출신인 정일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우리야 바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함대 사령관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일신은 조용한 곰의 승낙에 웃으며 인사한 후 잠시 담소를 나누다 상황을 살피겠다며 다시 방을 나섰다.
조용한 곰은 투로시노와 단둘이 남게 되자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이곳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으니.”
투로시노가 맞장구치자 조용한 곰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런 일로 3함대에 피해가 가면 안 되니 말일세.”
“그렇지요.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해선 안 됩니다.”
투로시노는 정일신의 방침이 마음에 들었다.
그 역시 본토 상황을 그나마 알고 있었기에 당분간 3함대의 규모가 늘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비록 자신의 친우들 대부분은 조선 출신이었기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그를 비롯한 아이누인들로선 막부의 수군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억제해주는 3함대의 존재가 무척이나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투로시노의 절박한 심정이 담긴 대답에 조용한 곰은 이를 헤아리고 웃으며 투로시노를 달랬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게. 이제 아이누 경비대도 이곳에 3천이나 배치되어 있지 않나. 아이누 섬에도 2천이나 배치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증원될 테고. 그 정도만 해도 함부로 왜국이 홋카이도를 침범하긴 어려울 걸세.”
이미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아이누 경비대 5천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강병으로 길러내기 위해 아이누 경비대장인 박경수가 꽤 고생했었고.
덕분에 아이누 독립 전쟁 당시 고작 200에 불과했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이젠 5천에 달했으니 예전처럼 왜국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를 상기한 투로시노는 조금은 밝은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요.”
조용한 곰은 그런 투로시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덧붙였다.
“더불어 이젠 이곳은 북미왕국의 영역이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하께서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 마음을 좀 놓게나.”
이에 투로시노는 정성국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네요.”
* * *
정성국은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푸른 안개를 보며 당황해 그를 바라보고 물었다.
“장인어른? 무슨 일이시길래 그리 급히 뛰어오신 겁니까?”
푸른 안개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정성국이 묻자 큰소리로 대답했다.
“전하! 나바호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푸른 안개를 바라보았다.
“예? 나바호 족이요?”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만 해도 나바호 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갑작스럽게 나바호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했다는 푸른 안개의 보고에 정성국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푸른 안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갑자기 왜요? 아...설마 이번 가뭄 피해 때문입니까?”
외무청을 통해 보고된 것과는 달리 나바호 족이 가뭄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묻자 푸른 안개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져서 북미왕국에 합류한 것은 아닙니다.”
“음?”
“나바호 족 영역에서 발생한 가뭄으로 식량 생산이 확 줄어들긴 했지만, 전에 보고한 것처럼 일부 식량과 북미왕국에서 지원해주기로 한 식량까지 생각하면 기근에 의해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는 아닙니다.”
“허면 왜...?”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식량 문제가 아니라면 굳이 나바호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유는 없어 보였던 탓이다.
북미왕국에서는 나바호 족이 생각보다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에스파냐와의 관계도 그랬고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로 외무청의 관리들이 인구가 많은 나바호 족을 북미왕국에 끌어들이려 노력했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며 지금껏 자신들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가길 원했으니까.
이 때문에 정성국은 나바호 족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이들이 장악한 지역은 내륙인만큼 당장 중요하진 않았기에 괜히 이들을 건드렸다 분쟁이 생겨 발목 잡힐 바엔 당분간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고.
“북미왕국이 산타페 지역을 통치하는 방식 때문이라더군요.”
“음?”
“저들은 갑자기 등장한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처럼 푸에블로 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운을 뗀 푸른 안개는 정성국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바호 족은 최소한의 교류를 하면서 산타페 지역을 통치하는 북미왕국을 관찰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식은 기존의 에스파냐와는 전혀 달랐고.
에스파냐처럼 강제로 신을 믿으라 강요하지도 않았고 보호비의 명목으로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지도 않았다.
더불어 에스파냐처럼 철제 농기구 등을 값비싸게 팔지도 않았고.
북미왕국이 산타페 지역에 진출한 이후 산타페 지역 원주민들이 점점 생활 수준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보일 정도라 이를 바라보는 나바호 족은 내심 복잡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번에 산타페 지역에 가뭄이 들어 작물이 말라비틀어지자 리오그란데강을 통해 계속해서 식량을 가져와 식량을 풀기 시작하자 산타페와 가까운 곳에 살던 나바호 족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푸에블로 족이 내심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나바호 족과 접촉해 식량 일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자 산타페 지역 인근의 나바호 족 추장들이 나서서 북미왕국에 합류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바호 족 추장들이 모두 모여 의논한 끝에 결국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을 결정했다고 푸른 안개가 이야기하자 이를 듣던 정성국은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허어...그렇군요.”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푸른 안개는 미소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최근 산타페 지역에서 철도 부설 현장에서 일할 건설 노동자들을 모집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푸른 안개가 인근 나바호 족 추장과 친한 외무청 관리를 통해 알게 된 비화를 슬쩍 이야기했다.
“그때 건설 노동자들이 받는 널리 월급이 알려지면서 산타페 지역이 꽤 시끌벅적해졌었는데 이 내용을 몇몇 나바호 추장들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거부하는 나바호 족 추장들에게 이를 알리자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정성국은 북미 동해안이나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나바호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당면한 문제를 지적했다.
“아무튼, 잘 되긴 했는데...나바호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되면 더 많은 식량을 산타페로 옮겨야겠군요.”
“그렇지요. 나바호 족도 북미왕국에 합류한 만큼 지원해야 하는 식량의 양은 늘어난 셈이라...”
푸른 안개가 동의하면서 말을 흐리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성국이 중얼거렸다.
“리오그란데강 근처에 건설한 식량 창고에 비축된 양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듯싶은데...”
이를 듣고 푸른 안개는 곧바로 대답했다.
“관리청장에게 알아보니 비축된 식량이 조금 부족해서 새나주에서 식량을 운송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
이미 조처를 해 두었다는 푸른 안개의 보고에 정성국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 푸른 안개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나바호 족의 추장들이 자신들도 이제 북미왕국에 합류했으니 이곳에서도 건설 노동자들을 모집해달라고 요청하던데 어쩌시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좋은 일자리를 빨리 늘리긴 해야겠네요.”
그런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가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요.”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개발청장과 관리청장을 불러 논의해 본 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