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쾌속선으로 전달된 보고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허. 정말 조선 사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영상 대감이 먼저 원상의 도방을 불러 해금령의 폐지를 언급할 정도라니.”
정성국은 개척촌과 포로나이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고 전생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꽤 당혹스러워했다.
물론 정성국에 의해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전생과 똑같이 흘러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조선의 경우는 변화가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영의정인 정태화가 먼저 한낱 장사치에 불과한 원상의 사람을 불러 해금령의 폐지를 언급하면서 외부에서 식량을 구하려고 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해금령을 철폐하려고 했을 때는 관심도 안 두더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조선 상황이 안 좋긴 한가 본데...’
정성국의 중얼거림에 보고서를 가져오고 잘 정리한 이후 나가려 호위대장이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허어...보고서나 최근 이주한 유민들에게 듣긴 했지만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상 대감이 먼저 원상을 불러 해금령의 폐지를 논의했다니 정말 조선 상황이 좋지는 못한 모양이군요.”
이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덕분에 조선과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한 만큼 외무청장님이라면 충분히 조선 조정을 상대로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호위대장의 말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조선 사정이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조선 대신들이 그리 만만한 인사들은 아니라...”
정성국이 기억하는 조선 대신들은 무척이나 완고한 사람들이었다.
경신 대기근이 한창일 때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자는 주장을 어찌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겠느냐면서 끝끝내 반대했었으니.
물론 이때 조선 조정에서 지원을 요청했다 한들 당시 조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청나라가 정말 쌀을 지원해줬을지는 의문이긴 했다.
하지만 당시 한양에선 백성들뿐만 아니라 양반들과 왕실 종친마저 죽어가는 상황에서 대기근을 진정시키기 위해 쌀을 수입하려는 요청조차 운송과 후환을 이유로 반대하고 명분과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며 반대했었으니.
이를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으로선 과연 조선 대신들이 조선 상황이 좋지 않다고 조용한 곰에 끌려다닐까 싶었달까.
‘잘못하면 자신들을 얕본다 생각해 더 튕길 작자들이라...그나마 영상 대감의 요청이 있으니 무작정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식량을 가득 싣고 가는 만큼 조선의 체면도 크게 손상되지 않으니 잘만 하면 교류는 가능할 것 같은데...’
정성국은 잠시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른 보고서를 펼쳐 읽으며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조용한 곰에게 믿고 맡겼으니 여기서 더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고...음?”
정성국이 새롭게 펼친 보고서에는 조선으로 출항한 선단이 풍랑으로 인해 마쓰마에 항으로 긴급 회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정성국은 가뭄 뒤에는 전국적인 장마 덕분에 조선 팔도에 수해 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대충 뭉뚱그려 조선 기후가 이상하니 수해에도 대비하라고 넌지시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 때문에 잘못하면 3함대가 그대로 수장당할뻔했으니.
‘젠장. 이것 때문에 상황을 봐서 가을 이후에나 들어가라고 했던 건데...큰일날뻔했네.’
정성국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인지 호위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이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조용한 곰이 탄 함대가 조선으로 향하다 기상이 심상치 않아 홋카이도의 마쓰마에 항으로 급히 회항하고 기상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중이라는군.”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조선은 한창 가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이젠 평소와는 다르게 폭우가 쏟아지는 모양일세. 그것도 계속해서.”
정성국의 대답에 호위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거참...”
“아무튼, 그래서 일단 마쓰마에 항에서 대기하다 기상이 좋아지면 다시 조선으로 향하겠다는 보고로군.”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나마 3함대가 풍랑에 휩쓸리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 말에 동의하던 정성국은 문득 생각이 나 급히 호위대장에게 명령했다.
“그러게 말일세. 아. 당장 새김포에 연락해서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 도착하면 출항을 막도록 하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평소 삼남 지방 정도만 걸치던 장마 전선은 이 시기 북상해 한반도 전체에 걸쳤고 태풍도 꽤 여러 번 한반도를 지나가며 큰 피해를 줬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남쪽으로 항해하는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출항은 당분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명령을 내리자 호위대장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나가려다 문득 멈춰 서서 질문을 던졌다.
“아. 알겠습니다. 헌데 지급 함선은 괜찮을까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급 함선이야 도중에 비바람을 피할 섬들이 많으니 그나마 괜찮을 걸세. 그리고 홋카이도만 해도 기상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하니. 북방 항로를 오가는 이주 선단은 상관없을 거야.”
더불어 현재 포로나이에 비축한 식량만으로는 조선에 닥친 대기근을 이겨내기는 어려웠기에 조금이나마 더 많은 식량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지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은 운행돼야 했다.
그런 정성국의 대답에 호위대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바로 새김포에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그 후 호위대장은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정성국이 시선을 돌려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었을 때 다시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호위대장이 호위대원에게 일을 시킨 건가 싶어 고개를 들자 관리청장이 집무실을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 관리청장. 자넨가.”
관리청장은 정성국에게 다가오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호위대장이 급히 달려나가던데...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닐세. 조선의 바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라 혹시나 해서 이주 선단의 출항을 막으라고 한 것뿐이야.”
그러면서 개척촌과 포로나이에서 온 보고를 대충 이야기해주자 관리청장은 이렇게 일이 진행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연신 희한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관리청장의 용건을 확인했다.
“헌데 무슨 일로 온 건가?”
정성국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관리청장은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전에 회의 안건 중에 산타페 지역에서 철도 부설에 참여할 건설 노동자를 고용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에 관리청장은 살짝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이게 문제라고 해야 할지...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습니다.”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응? 지원자가 많다고?”
“그렇습니다. 저희는 한 5천 명 정도만 모집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기존의 멕시코 원주민들도 있으니까.”
철도 부설 공사에 투입되는 인원은 약 3만 정도로 잡고 있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3교대로 나누어 계속해서 공사를 진행해 최대한 빠르게 철도를 부설할 수 있다고 여긴 탓이다.
물론 북미왕국 남부의 새나주-새진주 경로를 따라 북미왕국에 고용되어 일하는 멕시코 원주민의 수는 이보다 많았지만, 당장 이들이 도로를 정비하고 병영과 마을 주변을 개척하는 것도 중요했기에 일부를 새로 모집할 생각이었던 것이고.
“예. 근데 거의 5만 명 가까이 몰려들었답니다.”
헌데 모집 인원의 10배에 달하는 지원자가 몰렸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기겁했다.
“허어? 그렇게 사람들이 몰렸다고? 그렇게 산타페 지역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건가?”
정성국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는데 고작 건설 노동자를 모집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렸다면 산타페 지역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산타페 지역에 사는 원주민의 수가 많은 편이라 자연스럽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관리청장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비록 가뭄으로 인해 작물 태반이 말라 비틀어져 기근이 닥칠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행정청에서 산타페 지역의 가뭄 때문에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알렸고 리오그란데강을 통해 열심히 식량이 운송되는 광경을 목격한 산타페 지역의 주민들은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관리청장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다행이군. 헌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린 거지? 5만이면 거의 그곳에 사는 젊은 남성의 절반에 가깝지 않나?”
이에 관리청장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수입이 나쁘지 않으니까요. 비록 북미왕국이 여러 작물을 전해준 이후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농사의 경우는 기후에 영향을 많이 받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건설 노동자들은 개척단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고 이 월급으로 꽤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흐음...대신 산타페 지역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나.”
관리청장의 말마따나 건설 노동자는 개척단에 소속된지라 월급이 박하지는 않다.
다만 이번에 모집하는 건설 노동자의 경우 철도 부설에 동원되는 만큼 4년간 고향 방문조차 쉽지 않은지라 이상하다는 듯 묻자 관리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젊은 친구들도 많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아...“
정성국이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내뱉자 관리청장이 덧붙였다.
”산타페 지역 젊은이들이 가장 원하는 일자리는 바로 소총으로 무장한 북미왕국의 병사이긴 합니다만 현재 산타페에 설립된 훈련소에서는 1년에 천 명 정도만 모집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체력이 아닌 다음에야 훈련소에 입소해 병사가 되는 것은 어렵고 해서 차선으로 건설 노동자가 되려는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것 참...”
물론 전생과는 상황도 병사나 건설 노동자의 대우나 인식도 전혀 다르긴 했지만, 젊은이들이 병사와 건설 노동자들이 되길 원한다는 관리청장에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리청장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더불어 숙식까지 제공하니 산타페 지역 젊은 친구들 태반이 몰려들었다더군요. 그 때문에 산타페에서는 이번에 모집하는 건설 노동자의 수를 조금 늘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흐음...개발청에서는 뭐라던가?”
이에 관리청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하께서 언급하신 4년의 기한을 맞춰야 하니 건설 노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던데요?”
정성국이 새나주-새진주 경로의 철도 부설 공사를 4년 만에 끝내라고 명령한 것이 내심 부담스러웠는지 건설 노동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개발청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많이 배정해주면 그 인력을 활용할 수는 있고? 전에 보고받기로는 3교대로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려면 기술자와 관리직이 더 필요하다는 보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정성국의 지적에 관리청장은 이미 이에 대해서도 알아본 것인지 곧바로 대답했다.
“전에 새한성-새나주 철도 부설에 참여했던 건설 노동자들 일부를 관리직으로 올린다더군요. 그러니 가능할 것 같답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북미 지역 곳곳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숙련된 건설 노동자가 많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더불어 4년 안에 새나주-새진주 구간의 철도 부설을 완료할 수 있다면야 어떤 지원이라도 해줄 수 있었고.
“허. 그래? 그럼...개발청에서 원하는 대로 해주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