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209화 (209/850)

209화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송구합니다. 대감마님.”

감성우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정평화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평화는 오랜 고민 끝에 일단 감성우가 원상을 통해 북미왕국과 접촉해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이후에 조정에 이를 알리기로 했다.

정평화로서는 북미왕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기에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만약 조정에 북미왕국에 대해 알리고 이곳과 접촉해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북미왕국의 반응이 부정적이라면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감성우는 북미왕국이라면 조선과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확신했지만 이를 말할 수도 없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고.

그리고 개척촌에서 이천호 대방이 편지를 보냈는데 역시나 감성우의 예상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감성우의 예상보다 더한 반응이었는데 북미왕국의 외무청장이 이미 포로나이에서 대기 중이었으며 조선과 접촉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의 제안 덕분에 조선과 교류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영상 대감에게는 최근 북미왕국에서 이웃 국가와 접촉할 예정이었으며 원상이 식량을 구한다는 사실로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북미왕국의 외교 사절이 자신의 재량으로 동원할 수 있는 식량을 싣고 곧 조선에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이를 보고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 감성우는 곧바로 이천호의 속뜻을 파악했다.

이천호는 영상 대감이 조정을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을 쥐여주려는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에 감성우는 곧바로 영상 대감에게 찾아가 이를 알렸다.

그때까지도 고민했던 정평화는 감성우가 전해준 소식에 결심을 내리고 일단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서인 대신들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 서인 대신들은 정평화가 사사로이 타국과 접촉한 것에 기겁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는 자신들과 긴밀히 연관된 원상이 움직였다는 사실과 정평화의 말처럼 이미 파종 시기를 놓친 곳이 많아 기근이 예상되는 만큼 다른 곳에서 식량을 구하자는 정평화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상대가 청나라나 왜국이 아닌 조선과는 일면식도 없었던 북미왕국이었고 이 새롭게 이웃 국가가 된 북미왕국이 먼저 외교 사절과 식량을 보낸다니 마치 조공을 바치러 오는 모양새였기에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

정평화가 이렇게 서인 대신들을 설득할 때 감성우 역시 인정을 주고받는 남인들을 만나 만약 대기근이 도래한다 해도 해금령이 폐지된다면 식량을 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흘렸다.

이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해금령이 폐지된다 해도 그 많은 식량을 단기간에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결국 식량을 가져올 곳은 청나라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라 감성우는 충분히 만족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정평화는 조정에 이를 공론화시켰다.

그러면서도 정평화는 조정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했지만 자신이 설득한 서인들은 그렇다 치고 의외로 남인들도 크게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감성우가 나선 영향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들 역시 현 조선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평화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는 냉해 피해로 인해 한해 농사는 아예 가망이 없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고 삼남 지방에선 가뭄 때문에 작물이 말라비틀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판국이었으니.

이 때문에 예상되는 대기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타국에서 구하자는 정평화의 주장에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에 치욕을 안겨주었던 왜국이나 청나라였다면 반대했겠지만, 정태화가 거론한 나라는 조선과는 일면식도 없는 생소한 북미왕국이라는 나라였으니까.

이는 조선의 국왕인 이연(李棩)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인조는 청나라에 의해 치욕을 입었고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은 북벌을 주장한 만큼 상황이 정말 최악이 아닌 다음에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헌데 정태화가 거론한 북미왕국이란 나라는 그동안 교류가 없었기에 차라리 다행이었달까.

이에 이연은 정태화에게 북미왕국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그 후 일단은 북미왕국이 보낸다는 사절을 만나보기로 했다.

당장 기근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저들이 먼저 호의로 식량을 가져온다는데 그걸 막을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고 모양새도 나쁘지는 않았기에.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식량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일단 북미왕국의 사절을 만나 이야기해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대신들 역시 동의했고.

그렇게 조정에서 결정이 나자 정태화와 감성우는 안도하며 하루빨리 북미왕국의 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헌데 남쪽에서 드디어 비가 내린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조정에서는 비록 파종 시기는 놓쳤지만, 가뭄은 끝났으니 다행이라는 분위기도 잠시.

계속된 폭우로 인해 남쪽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조정 대신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진지하게 북미왕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대안이 전혀 없었을 때라면야 모를까 이젠 북미왕국이라는 대안이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니 일단 대화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정태화에게 대체 북미왕국의 사절들은 언제 나타나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슬슬 북미왕국의 사절이 도착하겠다고 예상한 시일이 지났는데도 제물포에는 북미왕국의 배가 도착하질 않았으니.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대신들은 정태화가 속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조선으로 오는 도중 태풍과 장마 때문에 북미왕국의 배가 침몰했을 거라 여겼다.

이에 정태화는 감성우를 불렀지만, 감성우 역시 답답하긴 매한가지였고 정확한 상황은 몰랐기에 그저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그러한 감성우의 반응에 정태화는 한탄했다.

“끙...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판이니...혹 북미왕국의 배가 오다가 풍랑에 휩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

감성우 역시 불안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 사람들은 거대한 바다를 넘나들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난 자들입니다. 허니 괜찮을 겁니다.”

“허나 아직 소식이 없지 않은가.”

부정적인 정태화의 대답에 감성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나다 한들 한창 거친 바다를 헤쳐 이곳까지 오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조선 바다가 심상치 않으니 잠시 풍랑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 아닐까 합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후우...부디 자네의 말이 맞았으면 싶군. 전라도와 경상도는 수해로 인해 이미 들판이 강이 될 지경이라고 하니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들여오지 못한다면 정녕 이 조선이 흔들릴 테니 말일세.”

* * *

“괜찮으십니까? 외무청장님?”

뱃멀미를 심하게 했던 조용한 곰을 정일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그나마 육지에서 휴식을 취하니 많이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정일신은 아직도 창백한 조용한 곰의 안색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도 안색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만...차라리 이번 협상은 투로시노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투로시노는 충분히 협상을 진행할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만 만약을 대비해 저 역시 함께 가야 합니다. 더불어 조선의 관리들은 노회하다고 하니 젊은 투로시노만 보내기엔 좀 걸리기도 하고.”

조용한 곰의 단호함에 정일신은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허면 다음 항해 때는 지급 전선을 동원할까요? 한 척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배가 클수록 덜 흔들리는지라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함대 사령관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저 역시 동의했었으니까요.”

“흐음...”

원래 정성국은 조선과 접촉할 때 3함대를 동원하라고 이야기했었다.

북미왕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보여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3함대 사령관인 정일신은 그 명령에 반대했는데 홋카이도 남쪽 바다를 아예 비워두기는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비록 잠깐 3함대가 자리를 비운다 하더라도 왜국이 바로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지금도 이따금 어부로 위장해 북쪽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니까.

더불어 조선의 상황과 한양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최근 방문했던 원상의 김명규도 개척촌으로 돌아가기 전 지나가듯 원상 덕분에 이젠 조선인들도 익숙한 범선보다는 기선이 더 생소하지 않겠느냐며 인급 전선만 동원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었고.

이에 조용한 곰은 정일신과 김명규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범선인 지급 전선 4척은 홋카이도로 이동해 남쪽 바다를 순찰하고 기선인 인급 전선 8척만 대동하고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김명규가 급히 전해준 사실에 조선과의 협상이 수월하게 풀리겠구나 싶어 곧바로 인급 전선에 식량을 최대한 채우고 선단을 구성해 바로 출발했다.

헌데 출항해 조선으로 향하던 도중 파도가 심해지고 남쪽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한 것을 확인한 정일신이 이대로 조선으로 향했다가는 위험할 거란 판단에 급히 선단의 방향을 돌렸다.

다행히 정일신의 판단은 늦지 않아 선단은 점점 거칠어지는 바다를 뒤로하고 큰 피해 없이 가까운 홋카이도의 마쓰마에 항으로 회항할 수 있었다.

“그보다 날씨는 어떻습니까?”

조용한 곰은 자신의 상태보다 조선과의 협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질문을 던지자 정일신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인급 전선 한 척을 보내본 결과 아직도 남서쪽에 비구름이 몰려 있다더군요. 파도도 무척이나 거칠고. 덕분에 당분간 조선으로 출항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일신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하필 이럴 때...”

이미 먼저 개척촌으로 돌아간 김명규에게 북미왕국이 방문할 거라고 알린 날짜는 지났기에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일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습니까. 날씨가 그런 것을...그나마 심상치 않아 보여 바로 회항한 것이 다행이었지요. 계속 조선으로 향했다면 분명 3함대도 풍랑에 의해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그러면 조선에 무상으로 건네줄 식량조차 줄어들었을 테니 나중에 조선에 이를 설명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정일신의 말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조선과의 협상도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안 좋은 날씨에 배를 띄워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정일신의 판단은 분명 옳았다.

이에 조용한 곰은 아쉬움을 지우며 말했다.

“그렇군요. 약속을 지키려고 무리하게 항해했다 식량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늦는 것이 낫지요. 헌데 언제쯤 출발할 수 있을지 짐작은 되십니까?”

조용한 곰의 물음에 정일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보통은 여름이 지나갈 때쯤이면 태풍과 장마가 멈추긴 하는데...올 조선의 기후는 무척이나 이상한지라 이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조용한 곰은 안색을 살짝 흐리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그럼 굉장히 늦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요.”

정일신 역시 안색을 흐리자 방 안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이를 느낀 조용한 곰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뱃사람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쾌속선을 타고 왔을 때도 뱃멀미 때문에 힘들었지만, 이번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게 죽겠다 싶었는데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 생활하니...”

“하하하. 뱃멀미야 오래 타면 결국 익숙해지니까요.”

정일신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익숙해지긴 하는 겁니까?”

“그럼요. 대부분은 익숙해집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배에서 생활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지금 바로 정박한 배에 오르시는 건?”

정일신이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조용한 곰은 사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사양하도록 하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