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쨍그랑!’
자고 있던 이천호는 무언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잠기운이 싹 가시는 것을 느끼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집무실로 나서자 집무실 벽면에 있는 커다란 창문이 깨진 것을 보고 이천호는 한숨을 내쉬며 등불을 켜고 바닥을 살폈다.
이천호가 예상한 대로 유리 잔해 가운데 하얗고 동그란 모양의 우박이 보이자 고개를 저었다.
“또 깨졌군. 유리를 교체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 2주 전에도 새벽녘에 갑작스럽게 우박이 내려 이 집무실의 커다란 유리창이 우박에 의해 손상된 적이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이상 기후로 인해 조선 팔도에서 우박이 떨어진다는 것을 보고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개척촌에도 우박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니 충격이 컸었다.
보고로만 들었을 때는 이상 기후에 의해 농민들이 어렵겠구나 싶어 걱정은 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직접 우박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보니 올해 날씨가 무척 괴이하다는 것을 확실히 실감했다고나 할까.
헌데 하지(夏至)를 넘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한다는 소서(小暑)에 가까워지는데 다시 우박이 내리는 광경을 보니 이천호는 자신도 모르게 앞날이 걱정되어 중얼거렸다.
“큰일이군. 큰일이야...”
* * *
“대방 어르신. 아...이번에도 유리가 깨졌군요.”
아침이 되자 김명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저번처럼 우박으로 인해 유리가 깨지지 않았나 싶어 창가 쪽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유리창 일부가 깨져 있었기에 김명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천호는 그런 김명규를 보고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나무로 막아두는 건데 판단을 잘못했네.”
이에 김명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가 넘었는데도 또 우박이 떨어질 거라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그나마 유리창을 통유리가 아닌 조그마한 유리를 합쳐 만들었기에 일부만 교체하면 되니 다행이지요.”
통유리창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성국은 유리가 깨질 것을 염려해 중간에 틀을 만들고 자잘한 유리를 합쳐 유리창을 만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일부가 부서지면 유리창 전체를 교체할 필요 없이 깨진 부분만 교체하면 그만이었고.
이에 이천호 역시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 그보다 지금도 우박이 간간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새삼 걱정이 되는군. 이곳이야 상관없네만 삼남 지방은...”
이천호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명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박이 문제겠습니까. 조선 팔도에 가뭄이 들어 아직도 모내기하지 못하거나 모를 심었어도 물이 없어 모가 말라 비틀어지는 판국인데요.”
이미 파종 시기는 지났다.
다만 워낙 땅이 가물어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던 농민들도 있었고 더는 기다리지 못해 일단 모를 심은 농민들도 있었다.
더불어 어느 정도 수리 시설이 정비된 지역에서는 곧바로 모를 심었지만 계속되는 가뭄에 물이 줄어들어 걱정이 태산이었고.
이를 언급하는 김명규의 말에 이천호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흐음...”
올해의 작황은 무척이나 안 좋을 것이 너무나도 뻔해 보였다.
헌데 비축한 식량은 많지 않아 대기근이 예상되니 답답할 수밖에.
더불어 최근 개척촌으로 유입되는 사람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다만 조선 팔도의 유민들이 개척촌에 몰려드는 것은 아니고 개척촌 인근의 백성들이 개척촌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이런 이상 기후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들이 보기에 올해는 이상 기후가 만연해 아무리 보아도 작황이 무척 좋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결국, 대흉년이 들고 기근이 발생할 테니 상황이 좋은 개척촌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에 행정청 내부에서는 조정의 눈치가 보여 고심했지만, 행정청의 수장인 윤휴가 나서서 그들을 호되게 호통쳤다.
기근이 발생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무엇을 고민하냐면서 말이다.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 나중에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더라도 일단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윤휴의 선언에 행정청은 전염병을 우려해 이들을 행정청의 임시 일꾼으로 고용해 식량을 내어주면서 개척촌 인근에 그들이 살아갈 조그마한 마을을 건설하게 했다.
덕분에 개척촌 인근은 꽤 부산해졌고 곳곳에 조그마한 마을들이 들어서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개척촌 인근의 백성들이 모여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유민들도 개척촌에 몰려들 것이라 예상되는 만큼 행정청과 원상의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신음을 흘리는 이천호였다.
그런 이천호의 반응에 김명규는 무거운 집무실의 분위기를 바꿀 겸 품에서 서찰을 꺼내 들었다.
“그보다 한양에서 온 보고입니다. 무척 급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어디 보세.”
이천호는 김명규가 넘겨준 서찰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찰을 읽을수록 점점 놀란 표정을 짓자 김명규는 원상의 한양 지부에서 보낸 서찰에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있길래 저러나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천호는 정신없이 서찰을 읽고 또 읽다가 서찰을 내려놓으며 감탄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허어...”
이런 반응에 김명규가 급히 물었다.
“대방 어르신? 대체 그 서찰에 무엇이 적혀있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십니까?”
이에 이천호는 정신을 차리고 김명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영상 대감이 감 도방을 찾았었다는군.”
“예? 영상 대감이 왜?”
영의정 정태화는 원상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명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천호가 웃으며 말했다.
“조정에서도 현 조선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는 의미겠지. 해서 해금령을 풀어준다면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를 타진했다고 하네.”
“헉!”
이천호의 말에 김명규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해금령의 해제라니.
이는 원상의 숙원과도 같은 문제였다.
헌데 영상 대감이 먼저 원상의 도방을 찾아 이를 거론했다니 김명규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그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까?”
언제나 냉철한 김명규가 얼빠진 모습을 보이자 슬쩍 웃은 이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영상 대감은 해금령을 풀어주면 원상이 민간 차원에서 청나라의 식량을 들여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를 언급했다는데...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조선에서 해금령을 푼다 하더라도 청나라는 해금 정책을 유지 중이었기에 영상 대감의 생각처럼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의 식량을 가져오기는 어려웠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김명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허면...?”
이에 이천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서 감 도방이 그 대안으로 북미왕국을 언급했다는군. 허허허.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최근 포로나이에 본국의 외무청장께서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나?”
최근 쾌속선을 타고 북미왕국의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 직접 포로나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이천호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에 이천호는 무척 놀랐는데 비록 정성국의 편지로 인해 정성국이 조선의 현 상황을 심상치 않게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북미왕국의 외무청장이 직접 포로나이까지 올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미왕국에서 곧 조선과 접촉할 예정이라는 뜻이었기에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급히 김명규를 포로나이에 보냈었고.
김명규는 조용한 곰과 만나 북미왕국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정성국이 보낸 각종 재난에 대비하라는 편지도 가져왔었고.
“그렇습니다. 일단 조선 상황을 파악하고 적당한 시기에 3함대에 식량을 가득 싣고 제물포로 향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잘 되었어. 감 도방이 이렇게 물꼬를 터 주었으니 잘만하면 큰 충돌이 발생하지도 않고 조선 백성들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 같군.”
이에 김명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잘못하면 침공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럽게 타국이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면 분명 이를 경계할 것이 뻔해 대기근이 시작된 이후에나 움직일 생각이었고 그것조차 가능성은 반반이었으니...”
북미왕국의 계획은 단순했다.
포로나이에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다 기근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식량을 미끼로 조선의 문호를 열어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북미왕국이 최근 아이누 섬에 진출해 이웃 국가가 되었기에 단순히 인사차 방문했을 뿐이라고 알릴 생각이었다.
다만 조선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가져온 식량 일부를 무상으로 넘겨 조선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남길 생각이었고.
더불어 협상을 통해 조선에서 교역을 허락해준다면 더 많은 식량을 지원해 줄 수 있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이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정성국 역시 조용한 곰과 의논했을 때 조선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반반 정도로 보았다.
전생에서도 조선 조정에서 실제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처음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올해가 아닌 내년 여름 아사자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으니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
다만 북미왕국의 경우 청나라와는 달리 악감정은 없다는 것과 북미왕국의 배를 통해 조선 팔도에 식량을 운송해줄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한다면 기근에 의해 실질적으로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조선 정부가 북미왕국을 꺼림칙하게 여겨 당장 이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일단 돕겠다는 의사를 알려둔다면 내년에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조선 정부가 악감정이 남아있는 청나라가 아닌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일단 접촉해보라고 조용한 곰을 보냈달까.
이런 정성국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하는 이천호와 김명규는 이를 듣고 이보다 나은 방법이 마땅히 없어 보였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마음이 무겁긴 했다.
북미왕국이 함대를 이끌고 제물포에 나타나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침공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기에.
물론 북미왕국에서는 조선 조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강화도 인근에 함대를 정박하고 한 척만 제물포로 이동해 접촉을 시도할 생각이었지만 조선 조정이 과연 그런 북미왕국의 행동을 보고 안심할까 싶긴 했다.
더불어 이 방법이 먹히려면 조선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해야 했는데 그때부터 협상을 시작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끝나진 않을 테니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는 않을 거라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그나마 원상이 조선 팔도에 감자와 고구마를 보급해 비축 식량이 많아져 아직은 버티고 있었지만, 기상이변으로 인해 제대로 보리나 밀을 수확하지도 못해 곧 기근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는 상황이었다.
헌데 상황이 바뀌었으니 이천호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감 도방이 아이누 섬의 식량 창고를 언급하며 정식으로 북미왕국과 교역의 물꼬를 틀 것을 영상 대감에게 진언했다고 하네. 다만 현 조정이 이를 받아들일까 싶긴 한데...”
이천호의 말에 김명규가 동의했다.
“그렇지요. 그동안 존재조차 모르던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셈이니...아무리 현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여도 당장 이를 결정하진 못할 겁니다. 반대도 심할 테고.”
김명규의 말처럼 결국은 명분의 문제였다.
조선은 지금까지 북미왕국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고 북미왕국과 교류한 적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사고가 유연하거나 현실적인 몇몇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반대할 것이 뻔했다.
더불어 타국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은 달리 이야기하면 타국에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것을 주상과 대신들이 수용할 것인가.
당장 조선에 엄청난 대기근이 닥쳤다면야 명분을 따지겠느냐만 현재는 대기근이 예상될 뿐이지 당장 대기근이 일어난 상황도 아니다 보니.
하지만 이천호는 꽤 밝은 표정으로 김명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감 도방이 이야기해둔 것이 있으니 이를 잘 이용해 구실을 만든다면 조정에서도 결사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네.”
이에 김명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천호를 바라보았다.
“예? 뭐라고 했기에?”
“원상 민간 차원에서 조선의 상황을 일부 알리고 식량을 구해보겠다고 했네. 이를 잘만 다듬으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서 이천호는 김명규에게 방금 자신이 생각한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미왕국이 원래 계획했던 것을 조금 더 매끄럽게 다듬자는 것이다.
북미왕국은 최근 아이누인들의 요청에 따라 왜국 북쪽의 섬에 진출했고 이웃 국가에 인사차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원상을 통해 조선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식량을 가득 싣고 왔다고 알린다면 조선 조정에서도 무작정 이를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더불어 감 도방이 미리 영상대감에게 이를 알린다면 조선 조정에서도 북미왕국의 함대를 침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말이다.
북미왕국의 처음 계획과 거의 비슷했지만 감 도방이 먼저 민간 차원에서 북미왕국을 통해 식량을 수입하겠다고 이야기한 덕분에 겉으로 보기엔 모양새가 괜찮아진 것이다.
그렇게 조선 조정과 협상의 물꼬를 튼다면 그다음은 북미왕국 외무청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고.
더불어 원상을 통해 아이누 섬의 식량 일부를 가져오고 또 이런 식으로 식량 일부를 가져온다면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 기근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가 줄어들 것 같았고.
그런 이천호의 생각에 김명규 역시 동의했다.
“아. 그렇군요. 계획은 거의 똑같은데, 감 도방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덕분에 겉으로 보기엔 모양새가 나쁘지 않군요. 그러면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포로나이로 가서 외무청장님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김명규를 보고 이천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게. 나는 한양의 감 도방에게 보낼 서신을 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