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정태화는 감성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이 시기 조선 관리들이 국제 정세에 어둡고 또 관심이 없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인들에게 국제 정세란 오로지 중국과 일본에 국한된 문제였달까.
그나마 얀 벨테브레가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귀화하며 유럽에 대해 알리긴 했지만, 조선 관리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에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들 역시 유럽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조선 관리들은 이들 특유의 과장으로 여겨 믿지 않았고.
다만 정태화의 경우 몇 번이고 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다른 조선 관리들보다야 국제 정세에 밝은 편이었지만 그런 정태화조차 북미왕국이란 나라는 처음 들어보았다.
해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감성우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견문이 얕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북미왕국이라는 나라는 처음 듣는군. 그게 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정태화의 질문에 감성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해를 건너면 나오는 거대한 바다인 태평양까지 건너야만 나오는 나라이옵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음? 동해를 넘으면 왜국이 나오지 않나?”
“그 왜국은 섬이지 않습니까.”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혹시나 해 물었다.
“그렇지. 아...설마...왜국 동쪽 바다 너머에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왜국을 넘어 계속해서 동쪽으로 항해하다 보면 미대륙이란 곳이 나옵니다. 이 미대륙은 무척이나 거대한 대륙인데 이 북쪽에 자리한 나라가 바로 북미왕국이옵니다.”
“어...흐음...”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국 너머에 거대한 대륙이 있고 그곳에 북미왕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감성우의 대답이 무척 허황되게 들렸던 것이다.
더불어 곧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국가적인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데 왜 이런 생소한 나라를 언급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정태화의 표정을 살핀 감성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감마님! 제발 소인의 말을 믿어주시지요! 소인이 굳이 대감마님께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흐음.”
감성우의 말처럼 원상의 도방이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었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태화는 일단 감성우를 보고 묻기 시작했다.
“대체 왜국 너머에 존재하는 이 북미왕국이라는 나라를 원상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그건...”
* * *
“호오...이 북미왕국 사람들이 왜놈들에게 지배당하던 원주민들을 도왔단 말인가?”
정태화는 감성우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며 묻자 감성우는 슬쩍 입에 침을 바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대감마님. 왜놈들의 수탈을 더는 버티지 못한 아이누인들이 결국 봉기했고 당시 에조 지역의 섬을 탐사하기 위해 들렀던 북미왕국 사람들이 이를 안쓰럽게 여겨 그들을 도와 막부의 수군을 상대했습니다. 이에 막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덕분에 막부는 에조 지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해서 북쪽의 섬들은 이제 왜국의 영역이 아니지요.”
“허어...”
“그리고 아무리 왜국이 독립을 승인했습니다만 아이누 부족 연합의 처지에서는 강성한 왜국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했고...이제는 반쯤은 속국화된 상황이고요.”
이미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이야기하면 혹시 북미왕국이 섬들을 노리고 분쟁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할까 봐 적당히 둘러댄 감성우였다.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급히 물었다.
“음? 아! 설마 그게 6년 전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안색을 굳히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허어...자네가 한 말이 참인가?”
이에 감성우는 고개를 숙이고 입가에 침을 바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굳이 소인이 대감마님을 속일 연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한, 대감마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원상이 이를 알게 된 것 역시 밀무역을 하기 위해 에조 지역을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대놓고 속였다.
아이누 부족 연합을 도운 것은 북미왕국이라기보단 원상이나 개척촌에 가까웠으니까.
물론 원상이나 개척촌이나 북미왕국이나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다만 이를 말할 수야 없었기에 감성우는 이를 다 분리해 북미왕국의 일로 포장했다.
그런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는 탄식했다.
“허어...”
분명 6년 전 왜국에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이에 조정은 긴장했으나 동래 왜관을 통해 사정을 파악한 결과 그저 왜국 북쪽에서 큰 민란이 발생했었고 이를 잘 해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었고.
실제로 가까운 구주 섬의 동태는 평상시와 같았기에 그 말이 참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감성우의 말을 듣자니 실상은 전혀 다르지 않던가.
‘하긴...당시에도 왜인들의 말은 당최 믿을 수 없어서 내상을 통해 구주 섬의 분위기를 확인한 후에야 우리와 관계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넘어간 문제였으니...’
그러면서 정태화는 감성우의 이야기를 속으로 복기해봤지만, 감성우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크게 모순되는 부분은 없었다.
‘잠깐만. 설마...’
정태화는 감성우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원상이 유민들을 빼돌려 그곳에 데려가는 건가?”
정태화의 질문에 감성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대답해 보게.”
정태화의 재촉에 감성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원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유민을 빼돌리는 것을 아예 모르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밀무역을 진행하면서 아이누인들과 북미왕국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안정적인 교역을 위해 조그마한 포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동래의 왜관 같은 지역이지요. 그곳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양민을 데려갈 수는 없는 법이라 유민들을 데려갔습니다.”
감성우는 솔직히 시인했다.
다른 인사였다면 모르지만, 정태화는 꽤 중립적인 인사였고 생각이 유연한 편이었다.
더불어 조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킬만한 인사도 아니었고.
예송논쟁 당시에도 정태화는 송시열의 주장을 듣자마자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큰 파국이 올 것을 직감하고 곧바로 송시열에게 찾아가 경국대전을 꺼내 들며 설득했다.
기년복(1년)을 택하긴 하겠는데 네 주장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경국대전에 적혀있기 때문이라면서.
경국대전에는 아들이 죽었을 때 부모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법이었기에 남인들은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서인들은 비록 이유는 달라졌지만, 기년복을 관철할 수 있었기에 동의했다.
물론 허목과 윤선도 등 남인 일부는 불복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현종이 나서 기년복을 채택한 이유는 오로지 경국대전 때문이라며 논의를 일축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잡음은 나왔을지언정 대규모의 사화가 발생하지는 않았고.
그런 정태화였기에 이 일도 솔직히 이실직고하면 적당히 넘어가리라 판단한 감성우였다.
원상이 한둘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지속해서 대규모로 유민을 빼돌린 터라 이를 공론화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상관 중에서도 몇몇은 이를 모른 척하고 있었으니 정태화의 성향상 이를 공론화해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더불어 조선의 현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하고 대기근이 닥칠 것을 우려해 천한 장사치인 자신을 직접 불러 식량을 구할 방도를 찾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감성우의 생각이 맞았던지 정태화는 고개 숙인 감성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묻어두겠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유민 문제 때문이 아니니까.”
정태화의 말에 감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이에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입가를 씰룩이던 감성우의 귓가에 정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원상이 어떻게 북미왕국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겠네. 헌데 이 북미왕국은 본토 위치를 생각해보면 무척 멀리 떨어져 있고 이 섬들은 풍족하지 않을 것 같은데...과연 식량을 구할 수 있는가?”
감성우의 이야기를 듣자니 이 북미왕국 본토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더불어 왜국이 순순히 북쪽 섬을 넘겼다는 뜻은 그 섬들의 가치가 낮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왜국은 그리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도 아니었고 한번 패하자 바로 독립을 승인했다는데 이는 탐욕스러운 왜국답지 않은 처사였다.
하지만 저 에조 지역이 별다른 가치가 없다면 모든 이야기가 설명된다.
감성우 역시 에조 지역에 관해 설명하기를 북쪽에 있는 추운 지역이라고 했고.
헌데 이 지역에서 조선의 대기근을 버틸 정도의 막대한 식량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싶은 정태화였다.
이 질문에 감성우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북미왕국 본토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북미왕국 사람들은 이 에조 지역에 기근이 닥치면 곧바로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해 에조 지역에 식량창고를 건설하고 본토에서 가져온 식량을 비축해두었습니다. 반쯤 속국화된 상황이다 보니 이곳의 원주민들이 굶는 것을 걱정한 탓이지요.”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는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였다.
“오! 그게 참말인가?”
이에 감성우는 슬쩍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이는 에조 지역의 원주민들을 위한 식량이니만큼 함부로 창고를 열어 이곳의 식량을 우리에게 넘기진 않을 겁니다. 더불어 에조 지역의 원주민들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라 식량이 많은 편도 아니고요.”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가 신음을 흘렸다.
“흐음...”
“허나 그것만 하더라도 최소한...원상이 밀무역을 통해 청국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보다는 월등히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공식적으로 청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만약 조정에서 정식으로 청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쳐도 과연 청국이 이를 허락할지도 의문이니 청국은 제외하고...왜국 역시 식량이 풍족한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감성우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 정태화였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 현 상황에선 북미왕국과 접촉해 식량을 가져오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만 이곳에 비축된 식량을 몽땅 꺼내려면 원상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들과 협상을 해보겠습니다만...”
감성우가 말을 흐리자 정태화는 신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흐음...공식적으로 이 북미왕국이란 나라에 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건가?”
이에 감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원상만으로 나라에서 비축해둔 창고를 열 수야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흐음...”
감성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정태화였다.
상황을 들어보니 이 에조 지역에 북미왕국이 건설했다는 식량창고는 일종의 상평청이나 진휼청으로 보였기에 이곳의 식량을 가져오려면 북미왕국 조정에서 허락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원상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나서는 것이 맞았다.
다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조정에서 의논해야 할 문제였기에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 정태화는 감성우를 보고 입을 열었다.
“처음 내가 예상한 것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감성우는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잘 알았기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감마님.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옵고 일단 사람을 보내 비공식적으로나마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겠습니다.”
감성우의 말에 흐릿한 미소를 짓던 정태화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러게. 아. 자네가 언급했었던 그 지도를 보내줄 수 있는가?”
감성우가 북미왕국과 처음 접촉했을 때의 이야기를 적당히 지어내면서 그들이 파악한 세계 지도를 원상에서도 입수했다고 슬쩍 이야기를 흘리긴 했었다.
정성국도 그렇지만 감성우 역시 조선이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를 기억하고 언급하는 정태화를 보고 감성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감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