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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04화 (204/850)

204화

“오. 왔는가? 거기 앉게.”

사랑방에 들어온 원상의 도방 감성우는 조심스럽게 방 한쪽에 앉아 자신을 부른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감마님. 소인은 원상의 감 모라는 장사치옵니다.”

사랑방의 주인인 저 노인은 바로 현 조정의 영의정인 정태화였다.

정태화는 꽤 나이가 지긋한 인물로 1628년 인조 시절에 별시 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오른 후 육조의 참의, 참판, 판서를 모두 지내다가 1651년 효종 때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 관직 생활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 후 73년 중풍으로 면직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5번의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효종과 현종에게 신임을 받았고.

그런 정태화가 갑자기 청지기를 보내 원상의 책임자를 찾는다는 소리에 원상의 한양 지부를 맡고 있었던 감성우는 급히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잔뜩 굳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태화의 경우는 원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데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린 것이다.

정태화는 서인 출신이긴 하지만 꽤 중립적인 인사였고 집안도 대단할뿐더러 원상이 막 자리 잡을 때 이미 정승 반열이었기에 우회적으로 이 집안의 다른 인물들에게만 인정이라고 불리는 뇌물을 건넸을 뿐이지 정태화에게 직접 건넨 적은 없었는데 청지기를 보내 책임자를 찾았으니 켕기는 것이 없지 않은 감성우로서는 영 불안했던 것이다.

정태화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한 감성우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감 도방. 왜 내가 갑자기 원상의 책임자를 불렀는지 짐작이 가는가?”

이에 감성우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둔한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흐리는 감성우를 보고 정태화는 웃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장사치이니 조선 팔도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겠지. 아니 그런가?”

“...”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현 영의정인 정태화에게 적나라한 사실을 대답해봐야 좋을 것은 없다고 판단해 침묵을 택한 감성우였다.

정태화는 그런 감성우의 반응이 마땅치 않았던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선 팔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장사치들은 소식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정태화의 반응에 감성우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감마님.”

이에 정태화는 진지한 얼굴로 감성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선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심상치 않아. 전국에 가뭄이 들고 곳곳에서 서리와 우박이 내려 냉해 피해가 발생하고 있네. 파종 시기인데도 제대로 모를 심지도 못하는 실정일세. 그뿐인가? 최근 경기도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황충(蝗蟲)이 발생했다더군.”

최근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영 심상치 않았다.

물론 정태화가 관직에 오른 이후 조선의 사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호란을 겪기도 했고 가끔 흉년 때문에 기근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흉년이 들더라도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전염병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올해 경술년은 새해 벽두부터 안 좋은 징조가 보이더니 조선 팔도에 각종 이상 기후가 겹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한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서리와 우박으로 인한 냉해, 가뭄으로도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거기에 더해 메뚜기 떼가 나타나 경기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보고까지 올라오자 정태화는 이번 재난이 일반적인 재난이 아닌 국가의 존망이 달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미 24절기 중 망종(芒種)이 지나 하지(夏至)에 가까워지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문제는 이 정도로 국가적인 재난의 경우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주상에게는 현 상황의 심각함을 알리고 이런 상황에서 으레 하듯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자고 주청하긴 했지만 정말 그것으로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퇴청해서도 사랑방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원상을 떠올렸다.

정태화가 원상을 주목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한 10년 전쯤 서인 출신 관리 일부가 해금령을 폐지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이야기를 했었고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어 알아보니 그 뒤에 원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정태화는 한낱 장사치들이 돈을 이용해서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대경실색했지만, 자세히 상황을 파악해 보니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나라가 작고 물산이 풍부하지 않은 만큼 바다를 통한 교역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 주장은 당시 시기가 좋지 않아 바로 묻혔고 그 이후 원상은 더는 해금령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해서 정태화가 집안사람을 써서 조심스럽게 알아보니 원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개척촌이라는 곳을 발전시키데 집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속해서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

국가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마을을 조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상황이었으니까.

조정에 개척촌의 존재를 축소하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이곳을 발전시키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있는 원상 입장도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라 일단 지켜보았다.

만약 이곳에서 역모라도 꾸밀 기미가 보였다면야 바로 이를 들추었겠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원상과 연결된 고위 관리들도 적지 않아 괜히 조정에 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거기에 개척촌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지자 조정의 눈치를 보며 개척촌의 확장 역시 그만두었으니.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지속해서 조선 팔도의 유민들이 개척촌으로 모여 배를 타고 빠져나가는 것인데 어차피 유민들의 경우 조정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였고 조정이 우려하는 것처럼 원상이 이 유민들을 규합해 군대로 사용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냥 두고 보았다.

조정 역시 이 유민들을 정착시켜 양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도망쳐 치안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었으니 원상의 행동이 조선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간간이 원상의 소식을 듣던 정태화는 이번 국가적인 재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는 예전 원상이 주장했던 것처럼 부족한 식량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해 청지기를 보내 원상의 책임자를 이렇게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태화가 원상을 그렇게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감성우는 뜬금없이 자신을 불러 조선 각지에서 올라온 소식을 이야기해주는 정태화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대충 소식을 듣기는 했습니다만은...저같은 장사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감성우의 말에 정태화는 곧바로 대답했다.

“대기근이 닥칠 테니 대비를 해야 하네. 물론 이런 사태에 대비해 진휼청을 다시 정비해 두었네만...이런 국가적인 재난을 버티기엔 부족해 보이네.”

17세기는 소빙하기였기에 다른 시기에 비해 유독 기근과 전염병 같은 재난이 잦았다.

이 때문에 정태화는 만약을 대비해 진휼청을 다시 정비해 선혜청의 관리 아래에 두어 백성을 구휼하도록 정비했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그동안 조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국가적인 재난을 감당할 수는 없으리라고 보았다.

진휼청을 거론하는 정태화를 보고 감성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휼청이라...조선 제일 상단이라고 불리는 원상이니만큼 백성을 구호하는 데 일조하라는 뜻인가? 그렇다면야...’

생각을 마친 감성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원상 역시 기근이 발생하면 원상 소유의 창고에 비축해둔 식량을 모두 풀어 구휼미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정태화는 감성우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허어...그래? 역시 원상은 다른 장사치들과는 달라.”

정태화의 반응에 감성우는 내심 자신을 부른 용건이 이것이구나 싶어 안도하는 가운데 정태화가 다시 미소를 지우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아무리 원상이 조선 제일의 상단이라 하더라도...식량 자체가 많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않나?”

감성우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대기근이 예상되는 만큼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 그 때문에 자네를 부른걸세.”

“예?”

감성우가 정태화의 말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자 정태화는 입을 열었다.

“10년 전이던가? 얼핏 듣기로는 원상에서 해금령을 풀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다면서? 해금령을 풀어주면 대외무역을 통해 조선에서 부족한 것을 들여오겠다고 했었고. 아닌가?”

“어...그건...그렇습니다만...”

갑자기 10년 전 이야기를 들먹이는 정태화에 감성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정성국이 대방으로 있을 때 주장했었지만 해금령을 풀어주지 않아 포기하고 북미 지역으로 이주한 지도 한참이었다.

헌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내심 불안해진 감성우의 귓가에 정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후로 멀리서나마 원상의 행동을 지켜보았네.”

“...!”

정태화의 말에 감성우는 속으로는 기겁하면서도 애써 표정을 관리하느라 전력을 다했다.

그런 감성우의 귓가에 정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장사치지만 나름 믿을 수는 있다고 생각해 이야기하네만...만약 조정에서 해금령을 풀어준다면 강남 지방에서 쌀을 구해올 수 있겠는가?”

“으음...”

그제야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닫고 감성우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를 이렇게 저녁 늦게 부른 이유는 해금령을 폐지해줄 테니 민간 차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식량을 사 오라는 뜻이로구나.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데...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날릴 수도 없고 어쩐다...’

감성우가 보기에 당장 해금령을 풀어준다 해도 청나라에 가서 식량을 사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낌새를 보아하니 재물을 주고 식량을 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원상의 힘으로 식량을 구해야 하는데 당장 그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고 막상 돈이 있어도 민간 차원에서 막대한 식량을 사들이면 분명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청나라는 현재 해금령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물론 원상은 최근 청나라 상인과 거래를 터서 철광석과 석탄을 사들이고는 있지만, 이것도 자잘하게 나눠 받는 실정이었는데 여기서 막대한 식량을 추가하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 청나라를 오가는 선장들의 보고로는 청나라 역시 이상 기후가 발생해 강남의 감귤 농장들이 전멸했다는 보고도 있었으니 식량이 풍부할 것 같지도 않았고.

더불어 원상이 보유한 배 대부분은 이미 태평양을 오가고 있었기에 청나라로 보낼 배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현재 영의정인 정태화조차 현재 조선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대처하기 위해 해금령을 풀어준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조선과 북미왕국의 교역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해서 감성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건...쉽지 않습니다. 대감마님.”

“...그런가?”

정태화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감성우는 재빨리 입을 놀렸다.

“조정에서 쌀을 사들일 비용을 내어주진 않을 테니 천상 원상에서 대기근을 넘길 쌀을 사들여 가져와야 하는데 원상은 돈을 쌓아두는 상단은 아닙니다. 짐작은 하실 거라 믿습니다만...”

개척촌의 존재는 비밀이긴 했지만, 서인과 남인 일부는 모르지 않았고 정태화 역시 계속해서 원상을 지켜봤다는 이야기에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 이를 언급하자 정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개척촌 말이지? 알고는 있네. 원상이 돈을 벌어 그곳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퍼붓고 있다는 것쯤은.”

정태화의 대답에 감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송구합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당장 원상이 보유한 돈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기근을 넘길 정도의 곡식을 사들이고 이를 운반하는 것은...”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또한, 조정에서는 원상이 민간 차원에서 청나라에서 식량을 사들여오길 바라는 것이지요?”

“크흠.”

감성우의 질문은 조정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기에 정태화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감성우는 개의치 않고 계속 입을 놀렸다.

“헌데 현재 청나라는 명나라의 후신을 자처하는 동녕국 때문에 철저하게 해금령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치들은 알음알음 밀무역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그건 비싸고 부피가 작은 물품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식량처럼 부피가 큰 물품을 밀무역으로 들여오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정태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으음...허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대규모의 식량 수입은 어렵습니다. 더불어 얼핏 듣기로는 청나라 역시 이상 기온으로 인해 사정이 썩 좋지 않은 터라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로 식량을 가져오는 것을 두고 볼지 의문이라...”

감성우의 대답에 정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자네도 잘 알 텐데...”

청과 조선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서로의 악감정이 남아있어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형식적으로 청의 책봉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내심 이들을 오랑캐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소중화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청에게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정태화가 지적하며 고개를 젓자 감성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허면...다른 국가는 어떻습니까.”

“다른 국가라고?”

정태화는 감성우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북미왕국이란 국가입니다.”

“북미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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