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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03화 (203/850)

203화

“아니 이게 무슨...”

삼돌이는 눈앞에 펼치진 광경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처음 밖으로 나올 때 만해도 싸늘한 기온과 입을 벌리면 나오는 입김에 놀라 이렇게 화들짝 논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

이제 막 익기 시작하던 보리에 하얗게 서리가 끼어있는 광경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이에 말문이 막혀 삼돌이가 멍하니 서 있을 때 근처에서 울먹이던 중년 사내가 삼돌이에게 다가와 하소연하듯 말했다.

“어이구야. 삼돌아. 이거 우짜냐. 큰일 났네. 이거 봐. 이거 다 얼어 죽은 거 아녀?”

삼돌이는 중년 사내의 손에 있던 보리 이삭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요새 날씨가 괴상하다지만 입하가 지난 지도 한참인데 뒤늦게 우박에 서리라니...”

지금은 24절기 중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立夏)는 한참 전에 지났고 들판은 푸르고 보리가 익는 시기라는 소만(小滿)이 지났다.

즉 태양의 위치를 고려하면 이미 여름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인데 냉해가 발생해 작물에 피해를 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삼돌아. 이거 우짜냐. 응? 가뜩이나 땅이 가물어서 쭉정이가 태반이었는데...하.”

그러면서 중년 사내는 손바닥에 있던 보리 이삭을 움켜쥐었다.

원래 이 시기쯤엔 보통 작년 겨울에 심은 보리가 익어가는 시기였다.

허나 올해는 이상할 정도로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가물었고 그 때문에 아직 보리엔 제대로 알곡이 들어서지도 않았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알곡이라도 제대로 익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박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렸다.

이를 생각하자 계속 한숨을 푹푹 쉬는 중년 사내였고 삼돌이는 그런 중년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돌쇠 아재. 비축해둔 식량은 있소?”

삼돌이가 보기엔 올해 농사는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곧 모내기를 시작할 시기인데 가끔 우박이 떨어질 뿐이지 비는 내리지 않아 땅이 푸석할 정도였으니까.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파종 시기가 지나기 전에 제발 비가 왔으면 하는 마음에 정화수를 떠놓고 밤마다 비는 집도 있었다.

하지만 삼돌이가 생각하기엔 이 전라도까지 우박과 서리가 내릴 정도면 올해 날씨는 무척이나 괴상하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잘해야 흉작일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 어쩌면 대흉작일지도 모르지.’

그런 만큼 무엇보다 비축해둔 식량이 중요했기에 이를 묻자 돌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별로 없어.”

이에 삼돌이는 놀란 표정으로 돌쇠를 바라보았다.

“아니. 감자나 고구마도 없소?”

곳곳에서 원상의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선인들에게 생소한 작물인 감자와 고구마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땅이 좋지 못한 곳에서도 생각보다 잘 자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원상은 은근슬쩍 이 작물들을 키울 때나 먹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퍼트리고 다녔고.

덕분에 감자와 고구마는 농민들에게는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줄 중요한 구황 작물이 되었다.

그리고 감자와 고구마가 퍼진 뒤로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조금이나마 수월해졌고.

“이미 다 먹었지. 그나마 잡곡 조금 있긴 한디...그것도 보릿고개 버틸 정도가 다여. 헌데 보리가 다 아작났으니...”

돌쇠의 말에 고개를 저은 삼돌이는 일단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이건 이미 아작났으니 당장 수확합시다. 한 톨이라도 건져야지.”

삼돌이의 말에 돌쇠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하아...그래. 그래야 긋지.”

* * *

“전하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실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조용한 곰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새김포까지 행차한 정성국을 보고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자 정성국은 손을 휘휘 저었다.

“뭐 겸사겸사 이럴 때 새김포에 들르는 거지 뭐. 개의치 말게.”

그러면서 정성국은 오히려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조용한 곰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용한 곰이 뱃멀미로 인해 고생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런 정성국의 표정을 보고 조용한 곰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간간이 새김포와 새한성을 오갔지만 아무런 문제 없었습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강을 항해하는 것과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네.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생각외로 쾌속선이 빠르지 않습니까.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요.”

하지만 정성국은 오히려 쾌속선에 타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요새 개척촌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조선 이주민은 대부분 천급 함선을 타고 온다.

조선 조정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만큼 무턱대고 이주민 숫자를 늘릴 수 없는 반면 시간이 흐르며 이주 선단 규모는 커지고 늘어나자 유민들의 쾌적한 이주를 위해 개척촌에서 그렇게 배려하는 것이다.

천급 함선이 더 빠르기도 하고 배의 크기가 크기에 조금이라도 덜 흔들리니 말이다.

그러나 쾌속선의 경우 크기가 작고 빠르다 보니 더 고될 것이 뻔해 보였달까.

하지만 처음으로 먼바다를 넘어 정성국의 고향인 조선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묘하게 들떠있는 조용한 곰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어려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알겠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하게.”

이에 조용한 곰은 듬직한 얼굴로 말했다.

“꼭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조선과의 협상을 이루어내겠습니다. 그때까지 보중하십시오.”

“그래. 아. 그리고 내가 준 편지는 원상의 대방과 3함대 사령관에게 건네주고.”

“알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조용한 곰은 날렵해 보이는 쾌속선에 올라탔고 미리 보일러를 예열해두었던 쾌속선은 곧바로 선착장을 빠져나갔다.

정성국은 선착장 위에서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쾌속선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선착장 한쪽에 정박해 있는 천급 함선들을 바라보고 뒤편의 호위대장에게 말했다.

“저기도 잠시 들르자.”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천급 함선들이 정박한 선착장으로 이동하자 그 선착장에서 선원들을 감독하고 있던 이주 선단의 총 책임자인 이대수가 급히 정성국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이구. 오셨습니까. 전하.”

정성국은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거 꽤 오랜만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새김포에서 지낼 때만 해도 이주 선단이 도착하면 가끔 선착장까지 나와 이주 선단의 총 책임자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물론 새한성으로 이주한 이후로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아무튼, 눈앞의 이대수는 꽤 오랫동안 이주 선단의 총 책임자로 활동해왔기에 익숙했다.

이에 정성국은 이대수와 잠시 잡담을 나누다 이곳에 온 목적을 기억하고 슬쩍 주제를 돌렸다.

“요새도 하와이 제도에서 바로 개척촌으로 이동하나?”

“그렇습니다.”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지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과는 달리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경우 태평양을 횡단해 이동했다.

그 때문에 하와이에서 보급한 이후 전생의 오키나와인 유구 섬의 나하 항에 들러 물자를 보급했었고.

다만 본토 북쪽의 아이누인들이 봉기하면서 나하 항에서 유구 국을 감시하던 사쓰마인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이주 선단을 미심쩍게 바라보았고 이 때문에 정성국은 이주 선단의 유구 섬 방문을 금지했었다.

“이주 선단을 노리는 해적들은 없고?”

정성국의 말에 씩 웃으며 답하는 이대수였다.

“감히 누가 노리겠습니까. 저 큰 배가 5척씩 뭉쳐 다니는데요.”

“그럼 다행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주 선단의 규모는 늘어갔고 이 때문에 5척 내외로 쪼개 여러 이주 선단을 구성해 정기적으로 태평양을 오가는 상태였다.

어차피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이주 선단은 해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천급 이주 선단은 그렇지 않았기에 혹시나 해 물었지만, 이대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이었다.

“이제 나하 항에는 들르지 않을 테니 그곳 사정은 잘 모를 테고...제주도 사정도 잘 모르지?”

아무래도 이주 선단이 오가는 항로와 제주도는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질문하자 이대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요? 그렇습니다. 제주도야 경로 바깥쪽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대마도야 먼발치서 지나치곤 합니다만 제주도는...”

말을 흐리는 이대수를 보고 정성국은 슬쩍 본론을 이야기했다.

“흐음...그럼 이번 항해에는 제주도에 잠시 들르는 것이 어떻겠나.”

“제주도에요?”

정성국의 생뚱맞은 명령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이대수였다.

“그렇네. 제주도에는 원상의 창고도 없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비상시에 잠시 들르는 곳일 뿐이지요. 헌데 그곳엔 왜...”

경신 대기근 당시 기상 이변은 제주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주도의 경우 피해가 더욱 막심했다.

이 시기 제주도는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애초에 토양 자체가 농사에 적합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제주도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여러 특산품이 존재했고 각종 공납과 노역에 시달리다 못한 제주 사람들이 섬을 빠져나가 진상품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아예 제주 사람들을 섬에 가둬버린 것이다.

인조 때 내린 출륙금지령이 바로 그것인데 이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제대로 된 배가 아닌 테우라고 불리는 뗏목을 타고 어업에 종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술년에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고 해일로 인해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와 농작물은 고사하고 풀뿌리, 나무뿌리 할 것 없이 모두 죽어버리자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제주 목사가 급히 본토로 연락해 식량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경신 대기근 이후 제주도의 백성 숫자는 거의 절반이 줄어들었고.

이를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은 제주도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했고.

“조선의 기후가 영 심상치 않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정성국의 말에 이대수는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개척촌을 출발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썩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 내해를 오가는 인급 함선 선장들의 말론 분위기가 영 흉흉하답니다. 흉년이 들 거 같다면서.”

“그래. 그러니 제주도도 비슷할 것 같아서 말일세. 더불어 제주도는 워낙 식량이 귀한 곳 아니던가.”

적당히 둘러댄 정성국이었지만 그의 말 자체는 일리가 있었기에 이대수는 왜 정성국이 제주도에 잠시 들리라고 한 것인지 이해했다.

그가 기억하는 정성국은 굶주린 자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자애로운 인물이었으니까.

조선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제주도 사람까지 챙기려 드는 정성국을 보고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허면 그곳에 잠시 들러 이주 선단에 싣고 있는 식량 일부를...?”

이에 정성국은 슬쩍 이대수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했다.

“그렇네. 자네가 적당히 둘러대고 식량 일부를 내려놓게. 한...1만 석 정도? 문제는 출륙금지령인데 제주도를 방문하는 선박을 막는 것은 아니잖나.”

정성국의 말에 이대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비상시엔 종종 방문하니까요. 그리고 제주 사람들을 배에 태우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인급 함선 선장들이 간혹 들르니까요. 이 배들도 일단은 원상 소속이다 보니.”

“그런가? 그럼 믿어도 되겠지?”

정성국의 물음에 이대수는 가슴을 텅텅 치면서 호언장담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전하. 제가 적당히 잘 둘러대겠습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인물에게 식량을 맡겨두겠습니다.”

정성국은 그런 이대수를 믿음직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다시 슬쩍 목소리를 낮춰 당부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지만...태풍을 조심하도록 하게. 조선의 기후가 영 심상치 않으니.”

개척촌에서 올라온 보고에는 이상 기후로 인해 서리와 우박, 가뭄이 문제라는 보고뿐이었지만 곧 미친 듯이 비가 내리고 연달아 태풍이 올라올 것이다.

이 때문에 조용한 곰을 통해 개척촌에 장마와 태풍을 대비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상황을 봐서 다음번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경우 이곳에 붙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나마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이주 선단은 중간에 비바람을 피할 곳이라도 있었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불안해서 몇 번을 당부하자 이대수는 한나라의 왕이 되었어도 여전히 소탈하고 정이 많은 정성국을 보고 내심 감동하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최대한 안전하게 항해하겠습니다.”

“그래. 제발 그래 주게. 자네들은 중요한 인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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