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호오. 이건 돼지고기잖아?”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접시에 담긴 돼지고기 수육과 중식 느낌의 돼지고기 볶음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게 올라올 정도라면 돼지 수가 꽤 많아졌나 보네?”
국영 상단을 통해 새한성에 세운 서양 음식점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단지 음식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해 먹을 수 있게 조리법이 담긴 얇은 책자를 나눠주기도 했고.
애초에 국영 상단이 세운 서양 음식점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여러 식문화를 알려 북미왕국 백성들의 식습관을 조금 변화시키겠다는 것이었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덕분에 정성국은 서양 음식점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점들도 세울 생각으로 이렇게 가끔 시간을 내어 북미왕국에 알려지지 않은 요리를 맛보았다.
간간이 정성국이 아이디어를 던져주기도 했지만 이젠 숙수들이 알아서 요리를 개발하는 편이었고.
헌데 그런 자리에 돼지고기 수육이 올라오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이 북미 지역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여러 동물을 들여오긴 했지만, 돼지의 경우는 정성국이 들여오지는 않았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돼지의 경우는 오로지 고기를 위해 사육하는 만큼 당장 필요하지는 않다고 본 것이다.
육류 섭취가 부족하다면 모를까 북미왕국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가뜩이나 개척촌에서 이주 선단을 통해 들여올 것이 많은데 굳이 돼지를 가져와야 하나 싶었달까.
더불어 이 지역에는 없었던 동물이다 보니 혹시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고.
하지만 아카풀코 조약 이후 북미왕국의 영역이 확장되어 에스파냐가 지배했었던 산타페와 텍사스 지역을 얻게 되고 이곳에서 에스파냐가 들여온 것으로 추정되는 돼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장 돼지 일부를 가져와 축산 연구소로 보냈었다.
헌데 이런 자리에 돼지 요리가 올라왔다는 뜻은 축산 연구소에서 사육하는 돼지가 많아졌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 의외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숙수는 축산 연구소에서 돼지고기를 받으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알렸다.
“허. 그렇게 늘어났다고?”
“예. 번식이 무섭도록 빠르다더군요.”
“이건 나중에 연구청장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듣긴 해야겠군.”
정성국이 그런 소리를 할 때 하얀 들꽃이 수육을 한 점 먹고 평가했다.
“와...담백하네요! 소고기와는 또 다른 맛이네요?”
정성국은 김치에 수육을 싸 먹고 삼겹살이 생각나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먹으니 맛있네. 다만 돼지고기는 이렇게 삶은 것보다는 신선한 생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것이 더 맛있긴 한데...”
“그래요?”
정성국의 말을 하얀 들꽃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숙수를 바라보았다.
숙수는 하얀 들꽃의 눈빛에 움찔하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구워서 가져오도록 하지요.”
정성국은 나가는 숙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를 듣고 숙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리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정성국이 이야기한 대로 삼겹살 부위를 잘 구워 잘라 가져왔다.
이를 보고 하얀 들꽃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아...냄새 자체가 틀리네요.”
이에 정성국은 오랜만에 본 삼겹살을 보고 곧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지? 어디...음...맛있네. 먹어봐.”
하얀 들꽃은 잽싸게 정성국이 한 대로 잘 구워진 고기를 쌈장에 찍어 먹고 감탄했다.
“어머! 형님! 이거 너무 맛있어요!”
하얀 들꽃의 재촉에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맛본 전아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성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네? 고소하고.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는데? 오라버니는 어떻게 아셨어요?”
“나야 뭐...”
딱히 할 말이 없어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이 정성국이 돼지를 북미왕국에 들여오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인데 조선 사람들은 소고기를 좋아했지 돼지고기는 거의 먹지 않았다.
거기에 조선인들은 돼지의 경우 소와는 달리 일도 시킬 수 없어 비경제적이라 보았기에 민간에서는 많이 키우지 않았고 덕분에 소고기보다도 값이 비싸기도 했다.
덕분에 정성국도 조선 시절에는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못했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전아라는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정성국의 저런 반응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하얀 들꽃이 계속 옆에서 재촉했기에 추궁을 멈추고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댔다.
“와...이거 정말 맛있네요! 백성들도 하루빨리 이 돼지고기구이를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이거라면 조선 사람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할 것 같은데요?”
숙수가 맛있게 구워온 삼겹살을 해치워버린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축산 연구소의 보고부터 확인해봐야겠지만...”
* * *
곧 떠날 조용한 곰의 빈자리를 푸른 안개가 잠시 메꿔주기로 하면서 최근 새진주로 이동해야 하는 웅크린 늑대와 함께 여러 번 방문해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정성국의 이야기에 푸른 안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허어...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잉글랜드보다 프랑스가 더 문제 아닙니까?”
“아니에요. 장인어른. 프랑스 본토의 규모나 국력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현 프랑스 정부는 의외로 식민주의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요. 제가 이야기한 대규모의 육군을 양성하는 것도 다 유럽 내부의 세력 확장 때문이고요.”
정성국의 설명에 푸른 안개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까? 그건 다행이군요.”
“그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는 잉글랜드의 식민지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인구적으로도 무척 뒤떨어져 있고요. 그런 만큼 잉글랜드 식민지 문제만 잘 해결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정성국의 말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웅크린 늑대가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시선을 웅크린 늑대에게 돌려 손을 내저었다.
“아. 미안하군. 자네에게 부담을 주고자 한 말은 아니야. 그리고 자네의 협상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한 걸세.”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잉글랜드와의 협상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동안 전하와 나눈 대화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웅크린 늑대의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웅크린 늑대는 주로 원주민들과 협상하는 편이긴 했지만, 협상엔 도가 튼 인사였고 정치적인 식견도 나쁘지 않았다.
더불어 작년 겨울부터 새진주에 갈만한 인사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준비해왔었으니 정성국으로선 믿음이 갔다.
오히려 더 이야기해봐야 사족이 되니 주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기회가 되면 덴마크와도 접촉해 보게.”
“덴마크요? 저쪽 북유럽에 존재하는 나라 아닙니까?”
웅크린 늑대의 말에 정성국은 웃으며 서인도 제도가 그려진 지도를 꺼내 동쪽의 한 섬을 가리켰다.
“아. 아마 이곳에다 식민지를 건설 중이라고 들었네.”
“아...그렇습니까?”
엄밀히 말해 아직 서인도 제도 동쪽에 위치한 세인트토마스 섬은 덴마크의 식민지는 아니었다.
다만 이제 막 덴마크인이 정착하고 있는 시점이었달까.
그러다 덴마크 서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하지만 이를 자세히 설명해봐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을 것이 확실하니 대충 둘러댄 정성국은 계속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급한 일은 아니니 자네가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고...어차피 북미왕국의 이름이 알려진 이상 이곳에 드나드는 상인들이 혹시 새진주를 방문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헌데 전하께선 이들에게 무엇을 얻어내길 원하시는 겁니까?”
“이들의 본국에서 소를 좀 수입했으면 싶어.”
“소를요?”
웅크린 늑대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정성국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선에서 들여온 소와는 전혀 다른 품종의 소거든. 젖이 많이 나와 우유를 얻을 수 있는 소. 뭐 저들의 본국에서 들여오려면 무척 비싼 값을 줘야겠지만...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여왔으면 하네.”
“흐음...알겠습니다.”
정성국의 명령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웅크린 늑대였다.
“아. 이건 정말 급한 일은 아니니까 그냥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진행해 주게.”
“알겠습니다.”
* * *
“아직도 비가 내리지 않는 건가?”
이천호 대방의 말에 원상에서 전해지는 정보를 먼저 확인한 김명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물과 냇가가 마른 곳도 있답니다.”
“허어...그런데 우박은 간간이 떨어진다면서?”
이천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김명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헌데 제대로 된 비는 내리지 않으니 농민들이 답답해합니다. 더불어 평안도 지역에는 계속해서 서리가 내려 작물이 상해 정말로 큰 흉년이 발생할 듯싶습니다.”
김명규의 말에 이천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이천호도 이상기후를 확실히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긴...개척촌에서도 아침에 무척 쌀쌀하고 입김마저 나왔는데 평안도는 오죽할까. 이러다 삼남 지역에서도 서리가 내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이천호의 말에 김명규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마는...”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번 이상기후는 워낙 심상치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김명규의 귓가에 이천호의 한탄이 들려왔다.
“그래. 삼남 지방엔 서리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만 평안도가 흉작이라면 삼남 지방이라도 괜찮아야 하는데 이 지역들도 땅이 가물어서 정말 걱정이군. 조금 있으면 파종을 해야 할 시기인데 말일세.”
“그 때문에 한양에서도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김명규의 보고에 이천호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 최소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나 보군.”
“그렇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각지의 서낭당에도 관원을 파견해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성과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천호의 중얼거림에 내심 기우제는 미신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김명규조차 이번 기우제가 성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원상을 통해 조선 팔도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종합해 파악해보니 자신의 예상보다 현 상황이 심각해 보였기에.
그러면서 김명규는 긴장된 표정으로 이천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최소한 평안도에는 여러 기상 이변이 겹쳐 흉년이 확실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기근이 발생할 것 같은데 평안도의 창고에 있는 식량은 어쩔까요?”
이에 이천호는 굳은 기색으로 김명규에게 되물었다.
“역시 그럴까? 감자 같은 구황 작물도 큰 소용이 없던가?”
이천호의 질문에 김명규는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구황 작물이라도 냉해를 버틸 수야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제 막 올라오던 감자 싹이 다 시들었답니다. 그나마 작년에 수확해둔 감자로 인해 보릿고개를 버틸 수야 있겠지만...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그동안 원상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조선 팔도에 열심히 퍼트리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기후에는 아무리 추위에 강한 감자라 하더라도 버티질 못했다.
물론 감자의 경우 감자 씨눈이 괜찮다면 다시 싹이 나긴 했지만, 생육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생과는 달리 원상이 퍼트린 감자와 고구마로 인해 굶주림을 면하고 조금은 풍족해졌던 조선 백성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비축 식량이 넘쳐나 아무런 소득 없이 1년을 버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이를 설명하는 김명규의 말에 이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상황을 봐서 아사자가 발생할 것 같으면 창고에 비축한 식량을 풀도록 하게.”
이천호의 명령에 김명규는 안도하면서도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이천호를 바라보았다.
“헌데 괜찮겠습니까? 본국에선 식량을 함부로 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천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허락받았네.”
“휴우. 다행이군요.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련지...”
평안도의 창고에는 잡곡이 3만석 정도 비축되어 있었다.
그나마 작년에 그동안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쌀을 잡곡으로 바꾸어 비축량을 늘렸기에 가능했었던 비축량이었다.
하지만 저 잡곡을 모두 푼다 하더라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기에 김명규가 걱정스러워하자 이천호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