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3월의 어느 날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여유롭게 넘기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열심히 지식을 쌓고 배워 훗날 그 지식을 북미왕국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또한, 그대들이 훗날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북미왕국을 더욱 발전시킬 테고. 허니 신명을 다해 배움에 임하길 부탁한다.”
정성국이 비교적 짧게 연설을 끝내자 이번에 입학하는 대학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그런 대학생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몇 번 흔들어주던 정성국은 단상에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이 대학교의 총장과 교육청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정성국은 단상에서 내려와 호위대장이 건네준 물통을 열어 물을 마신 후 중얼거렸다.
“어휴. 하루에 두 번이나 연설하려니 힘드네.”
오늘은 북미왕국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교 두 곳이 문을 여는 날이었다.
두 대학교의 정식 명칭은 국립 새한성 종합 대학교와 국립 새한성 사범 대학교로 훗날 다른 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고려해 정식 명칭에는 일부러 지명을 덧붙였다.
다만 명칭이 길어서 보통 새한성 대학교와 사범 대학교로 불리는 실정이었고.
아무튼, 같은 날 두 대학교가 설립되다 보니 정성국은 먼저 새한성 대학교에 들러 입학생들에게 설립 축하 연설을 한 후 곧바로 마차를 타고 이곳 사범 대학교에 도착해 설립 축하 연설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때 정성국에게 다가오던 총장은 정성국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음? 아니야. 총장 자네에게 한 말은 아닐세. 그보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혹시 이곳을 늦게 방문했다고 학생들이 불만을 표시하진 않던가?”
같은 날 두 대학이 동시에 문을 열었기에 정성국은 어느 대학을 먼저 들러 연설을 해야 하나 싶어 고민을 좀 했었다.
다만 인재를 가르치는 선생도 중요했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고급 인력을 키우는 것이었기에 새한성 대학교를 먼저 들렀고.
입학생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고 묻자 총장은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찌 감히 전하께 불만을 품겠습니까.”
옆에 있던 교육청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새한성 대학교와 사범 대학교는 전혀 다른 취지의 교육기관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먼저 새한성 대학교에 들렀다고 불만을 품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불어 북미왕국 백성들에게 정성국의 인기는 워낙 대단하기도 했다.
조선 출신 이주민들에게 정성국은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더는 굶을 걱정 없는 낙원으로 이끈 구원자에 가까웠고 원주민 출신들에게 정성국은 각종 작물을 들여와 풍족함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대정령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다.
더불어 기초 교육을 받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멕시코 지역이나 북미 동해안 원주민들의 사정을 알게 될수록 더 열렬하게 정성국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이 자신들의 입학을 축하해주기 위해 직접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작 방문 순서 따위로 불만을 품을 북미왕국 백성은 없다고 생각하는 교육청장이었다.
그런 교육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뭐 그렇다면야 다행인데...그보다 의외로 대학 풍경이 새한성 대학교와는 꽤 다르네? 난 새한성 대학교와 완전히 똑같거나 비슷할 줄 알았는데.”
정성국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 새한성과 새김포에 지어진 중등 교육 기관인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외형이 거의 비슷했다.
이 때문에 대학교 역시 둘 다 비슷한 유형의 건물로 지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외형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이에 교육청장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둘 다 같은 대학교인 만큼 똑같이 지을 생각이었습니다만...사범 대학교와 새한성 대학교는 설립 목적이나 방향성이 다른 만큼 건물의 외향을 최대한 다르게 해 주십사 개발청장님께 부탁했습니다.”
교육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활짝 웃으며 그의 판단을 칭찬했다.
“잘했어. 이렇게 대학마다 특색이 있어야지. 북미왕국에 달랑 2개뿐인데 똑같으면 좀 그랬을 거야. 내가 미처 신경 못 썼는데 잘 했어.”
“하하하. 전하께서 호평하시니 참으로 다행이군요.”
정성국은 발걸음을 옮겨 널찍한 부지 곳곳에 지어진 많은 수의 건물을 살펴보았다.
이 국립 새한성 사범 대학교는 전생과는 달리 하나의 독립적인 대학이었고 전생처럼 중, 고등학교 선생들만 육성하는 대학이 아닌 초등학교 선생까지 육성하는 대학이었다.
북미왕국의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선생은 모두 육성하는 대학이었기에 새한성 대학교에 비교한다면 당장 지어져 있는 건물이 배는 많아 보였다.
북미왕국에 당장 필요한 것은 고급 인력이긴 한데 문제는 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별로 없고 이들이 전적으로 학교에 붙어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많은 인원을 모집할 수 없었던 새한성 대학교와는 달리 사범 대학교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많은 인원을 모집했다.
당연히 이들이 수업받고 4년간 지내는 기숙사 건물 등 많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워낙 부지가 넓기 때문인지 꽤 한적해 보였지만 말이다.
“거기에 꽤 널찍하고.”
“전하의 말씀대로 대학교의 경우는 훗날을 생각해 최대한 부지를 넓게 잡았습니다.”
“잘했어. 당분간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기보단 기존의 대학교를 최대한 키워야 할 테니. 부지야 클수록 좋지.”
현재 북미왕국의 교육 정책은 초등 교육 기관의 질을 높이고 중등 교육 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집중해 있었다.
북미왕국의 사정상 어쩔 수 없었고.
정성국의 말에 교육청장이 동의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요. 이곳 부지가 전부 개발된 이후에나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게 될 테니...한 수십 년간은 새로운 대학교가 설립될 리 없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운데요?”
“음? 글쎄...그건 두고 봐야겠지?”
정성국의 대답에 교육청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
정성국이 보기에 새한성 대학교는 몰라도 사범 대학교는 생각보다 빠르게 규모가 늘어날 듯싶었다.
워낙 많은 선생이 필요하기도 했고 현재 북미왕국 곳곳에서 단기 교육을 받고 교육청에서 계속 보내주는 책으로 독학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재교육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를 대충 이야기해주자 교육청장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군요. 당장 북미왕국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야 하는 새한성 대학교의 확장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쩝. 어쩌겠어. 당장은 북미왕국의 기초 역량을 늘린다 생각해야지.”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그렇게 잡담을 하며 대학 구경을 대충 끝냈을 때 교육청장이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개척촌에도 없는 이런 고등 교육 기관이 최초로 북미 지역에 건설되다니...참으로 북미왕국의 앞날은 밝은 것 같습니다.”
“음? 하하하.”
아쉽게도 이번에 설립된 새한성 대학교와 사범 대학교는 북미왕국 최초로 설립된 대학일지언정 북미 대륙에 최초로 설립된 대학은 아니었다.
북미 지역에는 이미 대학이 존재했다.
이곳이 아닌 잉글랜드 식민지에.
1636년 뉴잉글랜드 지방에 북미 지역 최초의 대학이자 전생의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의 전신인 하버드 칼리지가 이미 존재했으니까.
‘뭐 아직은 제대로 된 학자들을 양성하기보단 청교도 목사를 양성하는 시절일 것 같긴 한데...’
전생의 하버드 대학이란 명성은 시간이 흐르고 종합 대학으로 변모한 이후에 생기게 되지만 북미 지역 최초의 대학교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성국은 훗날 북미왕국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얻게 되면 하버드 대학은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긴 했다.
‘뭐 껍데기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지. 협상을 통해 얻든 무력을 통해 얻든 교수나 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테니. 하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겠지. 보안도 생각해야 하니 그 교수들에게 북미왕국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도 영 걸리고.’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에 의해 퍼진 과장된 소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헌데 저들이 북미왕국이 실제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인구도 200만이 안 되며 군사는 합쳐 3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북미왕국은 부유하고 기술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에스파냐나 잉글랜드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를 얻어내기 위해 전쟁마저 불사할 것이 뻔해 보였다.
‘하루빨리 2함대가 커져야 안심할 수 있을텐데...뭐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니 어쩔 수 없나?’
* * *
정성국은 집무실에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 지혜로운 나무? 이거 꽤 오랜만이네.”
“그렇군요. 한 3년 만인가요?”
지혜로운 나무는 처음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결심한 네 부족 중 하나인 윈투 족의 대추장이었다.
다른 대추장들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후 적당한 교육을 받고 외무청에 합류했지만 지혜로운 나무는 당시 이주민들이 사용하는 커다란 배가 움직이는 원리를 궁금해했고 결국 다른 대추장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바로 연구청에 소속될 수는 없었기에 정성국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정성국은 나이가 있어 쉽지 않으리라 봤지만 의외로 지혜로운 나무는 뒤늦게 배우는 새로운 지식을 빠른 속도로 습득해 나갔고 결국 3년 전 연구청에 연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었다.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만났던 기억이 떠오른 정성국이 웃으면서 지혜로운 나무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어떻게 지냈나.”
“저야 항상 그렇듯 연구청에서 마련해 준 조그마한 연구실에서 북미왕국의 기술을 공부하느라 바빴지요.”
지혜로운 나무의 대답에 정성국은 별 기대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 성과가 좀 있나?”
“그렇습니다. 전하.”
“어? 정말로?”
정성국은 무척 놀란 기색으로 지혜로운 나무를 바라보았다.
처음 동력 기관에 흥미를 보이던 지혜로운 나무는 연구청에 소속되면서 더 많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더불어 정성국의 배려로 어지간한 자료는 다 열람할 수 있었고.
연구청에서는 자료의 열람도 자격과 평가에 따라 철저하게 제한되었지만 지혜로운 나무가 이 지식을 빼돌려 서양에 팔아먹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기에 풀어준 것이다.
덕분에 북미왕국에 존재하는 기술 대부분을 접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나무가 관심을 둔 것이 바로 전자기학에 관한 내용과 발전기였다.
발전기 자체는 개척촌 시절 정성국이 이미 조악하게나마 만들어 두었다.
대략적인 발전기의 원리는 이미 알고 있었고 증기기관을 발명한 이후였기에 이를 응용해 만들어 둔 것이다.
이를 사용해 염화칼륨 수용액을 전기분해 해서 뇌관에 들어가는 염소산칼륨을 만들 수 있었고.
다만 딱 거기까지였는데 당장 전자기학을 연구할 사람도 없었고 발전기를 개량해 전기를 만들어봐야 사용할 곳도 마땅히 없었다.
화약 제조 공방에 필요한 발전기는 정성국이 만든 조악한 발전기로도 충분했고.
이 때문에 정성국이 예전에 끄적여 두었던 전자기학에 관련된 공식들과 발전기에 대한 자료 등은 연구청 깊숙이 묻혀있었는데 지혜로운 나무가 이것을 발견하고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자연현상인 번개와 이 전기가 같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나.
아무튼, 정성국은 이를 뒤늦게 보고받았지만 지혜로운 나무였기에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 지혜로운 나무는 성향이 학자에 가까웠기에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다만 지혜로운 나무가 정성국이 적어둔 전자기학에 대한 원리와 공식들을 이해해 어떤 성과를 거둘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는데 성과가 있다는 지혜로운 나무의 대답에 놀란 것이다.
그런 정성국을 보고 지혜로운 나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실제 발전기를 관찰하고 또 만들어본 것이 꽤 도움이 되었지요. 헌데 전하께서 책에 적어두신 수력 발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는데 왜 만들지 않았나 싶어서 말입니다. 더불어 다른 자료는 더 없나 싶고요.”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전기가 실제 만들어지면 실생활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 이를 연구할 인력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지. 더불어 지금이야 고무 덕분에 피복 전선을 사용하고 있지만, 개척촌 시절에는 대나무 안에 전선을 넣어 사용했기에 불편하기도 했고. 그리고 전자기학에 대한 자료는 자네가 열람한 자료가 다일세. 나머지는 자네가 연구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겠나.”
정성국의 대답에 지혜로운 나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아. 그렇군요. 허면 제가 이를 계속 연구해도 되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물어 무엇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일세!”
“그리고...조금 더 연구해보고 조그맣게 댐을 세워봐도 되겠습니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마음껏 연구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지원을 요청하게. 최대한 도울 테니.”
지혜로운 나무는 정성국의 전폭적인 지원 의사에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정성국은 그런 지혜로운 나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은 공돌이가 하나 더 생긴 셈이라 내가 더 감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