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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96화 (196/850)

196화

하얀 들꽃은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고 눈을 살며시 뜨며 고개를 돌렸다.

어제 함께 잠들었던 정성국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하얀 들꽃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 한쪽에 커다란 창문 근처에 정성국이 서 있었기에 하얀 들꽃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르려다 문득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정성국의 안색이 심각해 보였기에.

이에 의문이 든 하얀 들꽃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국에게 다가갔지만, 정성국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심각한 얼굴을 하고 하염없이 창밖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불안해진 하얀 들꽃은 잠시 그런 정성국을 옆에서 바라보다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전하?”

“아. 일어났어?”

생각에 잠겨있던 정성국은 그제야 하얀 들꽃이 이미 일어나 자신의 옆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하얀 들꽃은 정성국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여요. 혹시 에스파냐와의 협상 때문인가요?”

하얀 들꽃이 생각하기에 당장 정성국이 저렇게 근심할 정도의 큰일은 에스파냐와의 협상 정도였기에 묻자 정성국은 슬쩍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아. 아니야. 장인어른이 직접 가셨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외교적인 협상은 이제 외무청 관리들이 더 잘하는 것을.”

정성국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외무청 관리들은 대부분 협상에 능숙한 대추장들이 많았기에 정성국이 적당히 지침만 제시해주면 능숙하게 협상을 진행해서 결국 정성국이 원하는 바대로 협상을 진행해 나갔으니까.

특히 외무청의 고위 관리들은 협상 경험도 많았고 정성국이 혹시나 해 기억하고 있던 유럽의 사정과 흐름 등을 이야기해주었으니 몰라서 당하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런 정성국의 대답에 하얀 들꽃이 고개를 갸웃했다.

“허면...”

정성국은 괜찮다는 데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치지 못하는 하얀 들꽃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딱히 없다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어?”

이에 하얀 들꽃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무척요.”

“흐음...”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하얀 들꽃이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묻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구정이라 앞으로의 일을 조금 걱정했었는데 얼굴에 다 드러났나 보군. 이거 조심해야겠는데?’

오늘은 음력으로는 1월 1일, 즉 경술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 이야기는 곧 조선에선 기상 이변이 발생한다는 뜻이었고.

더불어 북미왕국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푸에블로 부족이 자리 잡은 산타페 인근도 기상 이변 덕분에 흉년이 든다고 알고 있었다.

물론 산타페 인근에 흉년이 든다 하더라도 전생처럼 푸에블로 족의 인구가 급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을 먹일 식량이야 충분했으니까.

다만 정성국이 내심 걱정하는 것은 북미 내륙의 산타페 인근에도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면 세계 곳곳에서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는 뜻과 같았기에 이 캘리포니아 지역도 기상 이변에 안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동안 비축해둔 식량이 많아 북미왕국 전체에 기상 이변이 발생해 농사를 망치더라도 1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점이랄까.

더불어 새한강 인근에서만 식량 대부분을 생산하던 시절과는 달리 이젠 넓은 북미왕국 영역 곳곳에서 식량이 조금씩 생산되는 만큼 실제 몇몇 지역에 기상 이변이 발생해 농사를 망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생각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하얀 들꽃의 시선을 깨달은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품 안에 안으며 슬쩍 둘러댔다.

“그냥 올 한해도 별 탈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생각?”

정성국이 적당히 둘러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하얀 들꽃은 내색하지 않고 정성국의 품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그러고 보면 음력으로는 오늘이 새해로군요?”

“그렇지. 경술년의 시작이지.”

그러면서 다시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긴 정성국이었다.

이를 확인한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품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하. 올해도 좋은 일만 가득할 거에요.”

그런 하얀 들꽃의 모습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다.”

* * *

“그게 정말인가? 한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원상의 대방인 이천호는 한양에서 출발해 이제 막 개척촌에 도착한 행수가 허겁지겁 달려와 전해준 소식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행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대방 어르신. 새해 벽두부터 햇무리가 보여 불길하다고 입방아를 찧었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달무리와 햇무리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으니...”

“으음...”

평소에 자주 관측되는 현상은 아니지만, 햇무리와 달무리는 종종 관측되곤 했다.

보통은 다음날 큰비가 내리는 징조로 여기는데 이것이 새해 벽두부터, 그것도 연달아 계속 나타난다면 당연히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이해한 이천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행수가 한양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알게 된 사실을 전해주었다.

“거기에 전라도에선 땅이 흔들렸다는 말도 돌고 있고요.”

“허어...”

“그리고...”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말을 조심하는가?”

이천호가 행수를 재촉하자 행수는 주변을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양을 떠나기 전에 한양 인근에서 붉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한양 사람들은 대부분 보았을 겁니다. 그 때문에 양반들조차 나라에 무슨 큰일이 닥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판국입니다.”

“허어...그런 기사가...”

개척촌에서도 가끔 햇무리가 보이긴 했지만,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이천호였다.

더불어 개척촌의 경우는 인구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보다는 원상에 소속되어 일하는 편이라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았기에 분위기도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고.

이 때문에 이천호는 모르고 있었는데 행수의 말을 들어보니 다른 곳의 분위기는 무척 뒤숭숭한 듯 보였다.

더불어 행수 역시 꽤 불안한 표정이었고.

이에 이천호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조선 팔도가 뒤숭숭하다면야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허니 전국 팔도에 있는 원상 지부에 연락해서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변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이천호의 명령에 행수는 이곳에서 잠시 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로 달려나가려 했다.

그런 행수를 보고 이천호가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각지의 창고 관리도 확실히 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이천호에게 인사를 한 행수가 방을 나가자 커다란 방 안에 혼자 있게 된 이천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수가 전해준 소식에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탓에 왜 그런가 싶어 생각에 잠긴 이천호는 작년에 원상에 전해진 정성국의 명령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정성국은 모르는 것이 없고 이치에 통달한 신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식량을 최대한 비축하고 만약을 대비해 공터와 천막 등을 충분히 비축해두라는 명령을 내리자 내심 왜 이런 명령을 내리나 궁금하기도 했었고.

헌데 이렇게 새해부터 불길한 징조들이 조선 팔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왠지 정성국은 사전에 이를 예측하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이천호는 한참 동안 방안을 맴돌다 유리창을 통해 개척촌의 평화로운 정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설마...별일은 없겠지?”

* * *

2월이 되자 새진도에서 푸른 안개가 협상을 마무리하고 새한성으로 돌아왔다.

새한성에 도착하자마자 정성국에게 보고하기 위해 집무실로 찾아온 푸른 안개를 정성국은 기꺼이 반겼고.

푸른 안개가 정성국이 원하던 사항을 모두 관철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성국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푸른 안개의 협상력을 칭송했다.

푸른 안개는 그런 정성국의 말에 슬쩍 웃은 후 에스파냐가 제의한 비밀 군사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를 듣고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밀 군사 동맹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전하. 저들이 먼저 제안하더군요.”

그러면서 자세한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한 푸른 안개였고 이를 주의 깊게 듣던 정성국은 푸른 안개의 설명이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썩 나쁠 것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장인어른께서 설명한 대로라면 나쁠 것은 없군요.”

정성국의 반응에 푸른 안개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렇지요?”

“예. 일반적인 공수 동맹이라면야 모를까 이건 북미 지역에 한정했기에 우리가 에스파냐를 도울 의무는 전혀 없으니까요. 이건 그냥 만일의 경우 우리가 잉글랜드나 프랑스와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명분으로 끼어들겠다는 뜻 같은데요?”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비밀 군사 동맹을 체결한 것이고요.”

이에 정성국은 중얼거렸다.

“흐음...역시 저들은 결국 우리 북미왕국과 잉글랜드나 프랑스와 충돌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지요. 저들이 건설한 식민지를 우리에게 그냥 내어줄 리는 없고...그렇다고 우리 북미왕국이 저들에게 내어줄 것도 마땅치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요.”

그러면서 정성국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은 최대한 빠르게 북미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한 잉글랜드나 프랑스를 내쫓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저들은 계속 이주민을 보내 주변을 장악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행동해야 했다.

특히 현재 북미 동해안의 잉글랜드 출신 이주민은 고작 10만으로 짐작되지만 약 100년 후 미국이 독립할 당시의 인구는 약 240만에 달했다.

저 인구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이주민들이었고.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무리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저들을 식민지에서 몰아내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정성국은 전쟁보다는 가능한 한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 싶긴 했다.

문제라면 푸른 안개의 말처럼 저들에게 내어줄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북미왕국에 금은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현물 거래로 안 되려나? 어차피 땅 파서 만드는 도자기로 결제하면 참 좋겠는데...쩝.’

정성국이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푸른 안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선 썩 내키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이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요.”

정성국의 정론에 고개를 끄덕인 푸른 안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요.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잉글랜드라면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아. 새진주에서의 일 때문입니까?”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협상하며 로하스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잉글랜드의 육군은 규모가 작은 편이더군요.”

푸른 안개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섬나라고 강력한 해군 덕분에 침공당할 일이 없으니 의도적으로 병력을 줄인 것뿐입니다. 그리고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해군을 하선시켜 싸울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걸 고려하면 적은 편은 아니지요.”

정성국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푸른 안개는 그래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하기엔 잉글랜드와는 협상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목격한 북미왕국의 군사력을 생각하면 전면전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물론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야 다르겠지만...에스파냐조차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짓궂게 웃는 푸른 안개를 보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지요. 그보다 에스파냐는 아예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겁니까?”

“조금 의아하게 여기고 있긴 합니다. 계속 멕시코 원주민을 고용하려 하고 새나주와 새진주 사이에 건설하는 마을에도 북미왕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거의 없고 주변 원주민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니까요. 이 때문에 로하스가 지나가듯 묻기도 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급히 푸른 안개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푸른 안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적당히 둘러댔지요. 북미왕국 백성들은 거주의 자유가 있다고. 더불어 북미왕국 백성들은 다들 고향이나 잘 발전된 왕도에서 살고 싶어하지 최근 확보한 변방으로 이주해 살고 싶어하진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로하스도 수긍하더군요. 향수병만 아니었다면 자신도 북미왕국에 남았을 거라면서요.”

“하하하. 아주 잘 둘러대셨군요.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장인어른. 당분간은 푹 쉬시지요.”

“허허.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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