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소.”
푸른 안개는 며칠간의 협상 끝에 정성국이 원하던 모든 사항을 얻어내어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정성국은 이번 일을 빌미로 에스파냐에 뜯어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땅이야 이미 에스파냐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 남쪽으로 국경선을 그어버린 상황이었으니.
에스파냐가 미치지 않고서야 멕시코 북부 지역 일부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더불어 북미지역이 워낙 광활해 이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남쪽으로 확장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조용한 곰이나 푸른 안개는 훗날을 생각해서 이번 기회에 서인도제도의 에스파냐 소유의 섬을 얻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정성국은 잠시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저들에게 섬을 얻어봐야 관리할 방법이 없었다.
현재 새진주의 조선소에서 건조되는 모든 선박은 새진주와 산 아구스틴을 오가며 물자를 옮겨야 했으니 말이다.
더불어 의외로 서인도제도에 에스파냐 소유의 섬이 많지 않은 것도 하나의 문제였다.
처음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 이후 에스파냐는 이 서인도제도를 장악하기보다는 안쪽의 거대한 신대륙에 더 관심을 쏟았다.
거대한 신대륙이 있는데 자잘한 섬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그 이후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이 서인도제도의 섬들을 차지했고.
이 때문에 현재 에스파냐가 제대로 소유하고 있고 훗날을 고려해 얻을만한 섬은 서인도제도의 섬 중 큰 면적을 자랑하는 대앤틸리스제도의 쿠바 섬, 히스파니올라 섬, 푸에르토리코 섬 정도였다.
헌데 정성국이 보기에는 에스파냐를 압박해 저 섬 중 하나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현 북미왕국의 상황에서는 이득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쿠바 섬이야 위치를 생각하면 플로리다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만큼 무척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쿠바 섬은 플로리다반도와 비견될 정도의 커다란 면적을 자랑하는 섬이었기에 이를 제대로 장악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물자를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플로리다 지역을 장악한 이후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정성국의 방침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 섬은 현재 북미왕국에 에스파냐에서 수입하는 고무가 자생하는 지역이라 이 섬을 얻는다면 나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은 현재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히스파니올라 섬을 처음 발견하고 항구를 건설한 에스파냐는 이후 신대륙에 건설된 식민지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최초에 건설된 섬 동쪽의 산토도밍고 항 주위만 발전하고 나머지 지역은 내버려 뒀다.
자연스럽게 섬 서쪽은 무법지대가 되었고 해적들이 들끓었고.
그러다 1650년대에 프랑스 해적들이 히스파니올라 섬 북서쪽의 조그만 섬인 토르투아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부 지역을 잠식해 들어갔고 1664년 루이 14세가 이곳을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하면서 에스파냐와 분쟁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지 못하고 후에 섬 일부는 프랑스의 영유권이라 인정하게 된다.
결국, 훗날에는 섬 서쪽은 아이티 공화국이, 동쪽은 도미니카 공화국이 세워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그런 만큼 북미왕국이 히스파니올라 섬을 얻게 된다면 바로 프랑스와 맞붙게 되니 손해였다.
푸에르트리코 섬은 면적은 크지 않지만, 가장 동쪽에 있어서 당장 관리하긴 어려웠고.
그런 만큼 에스파냐를 압박해 영토를 얻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은 정성국은 대신 최대한 많은 이권을 뜯어내라고 푸른 안개에게 이야기했었다.
정성국이 보기에 어차피 현 에스파냐의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배상하라고 이야기해봐야 우는소리를 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 때문에 푸른 안개는 로하스와 협상해 여러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먼저 현재 북미왕국 남쪽의 국경선 일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멕시코 원주민들을 대가 없이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는 멕시코 원주민들을 고용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매년 지불해아 하는 금액을 없애버린 것이다.
더불어 멕시코 원주민들을 고용할 수 있는 기간을 더 늘렸고.
그뿐만 아니라 현재 에스파냐에서 수입하고 있는 구아노나 고무, 철광석 같은 물품의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덕분에 북미왕국은 지금까지와 같은 물량의 도자기와 모피 등 사치품을 넘겨주는 대신 더 많은 물품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북미왕국이 수입하는 물품 대부분은 원주민들에게 부과하는 노역으로 캐내는 자원이다 보니 에스파냐로서도 큰 부담은 없었기에 고민없이 승낙했다.
원주민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노역을 조금 더 늘리면 그만이라 이 정도로 북미왕국을 달랠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에스파냐가 새진주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를 개선했다.
만약 누에바 에스파냐가 아카풀코에 도착한 물자를 베라크루즈로 옮겨 새진주에 공급했다면야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미왕국의 함대가 멕시코 지역의 서해안에 위치한 모든 항구를 불태운 이후로 이곳을 복구하기 위해 많은 물자가 필요한 상황이라 북미왕국에서 아카풀코로 보낸 물자가 서해안 곳곳으로 퍼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북미왕국이 더 아쉬운 입장이었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이었고.
하지만 기회가 왔으니 이를 지적하며 수수료를 인하할 것을 요구했고 로하스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푸른 안개의 요구가 끝나자 로하스는 내심 이렇게 협상이 마무리되어 기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히려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을 달래기 위해 에스파냐가 소유한 서인도제도의 섬 일부를 넘기는 것까지 허락했었으니까.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이 텍사스 지역에 진출해 새진주를 건설하는 것을 보고 언젠가 북미왕국이 유럽의 사정과 북아메리카 동해안의 상황을 파악하고 에스파냐에 항의할 거라고 생각했다.
에스파냐의 힘이 강하다면야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교류하면서 북미왕국의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북미왕국의 국력이 만만치도 않았고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생각보다 돈이 되는지라 분쟁이 생겨봐야 에스파냐에 좋을 것은 없다는 판단이 들자 자신의 의견을 본국에 알린 것이다.
아카풀코 조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북미왕국에 의해 아시아 무역이 막힌 상황이라 하루빨리 종전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안토니오 부왕이 임의로 결정했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기에.
그동안 누에바 에스파냐의 여러 관리가 꾸준히 북미왕국의 정보를 본국으로 보냈었기에 본국에서도 안토니오 부왕의 의견에 동의하고 북미왕국을 달래기 위해 쿠바 섬을 제외한 에스파냐가 소유한 섬 일부를 넘기는 것까지 허락했다.
그 외에는 북미왕국을 달래기 위해 넘겨줄 것이 마땅치 않았으니 말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에 섬을 넘겨주는 것은 에스파냐로서는 큰 부담이 없었다.
에스파냐에 가장 중요한 지역은 귀금속이 나오는 신대륙이었지 섬이 아니었다.
다만 이 섬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섬을 차지한 후 영역을 확장하며 뒤에서 사략 해적을 지원해 에스파냐의 부를 약탈하려 들었기에 뒤늦게 후회하며 경계했지만, 북미왕국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으니까.
그런 만큼 북미왕국에 섬 일부를 넘기고 그들의 불만을 무마해 신대륙에서 확실한 우군으로 삼자는 안토니오 부왕의 의견은 괜찮은 판단 같아 보였기에 허락을 한 것이다.
그랬기에 안토니오 부왕은 새진주에 잉글랜드의 배가 방문했다는 보고에도 나름대로 침착할 수 있었고 말이다.
로하스 역시 안토니오 부왕이 보낸 편지를 읽고 최대한 에스파냐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편지를 전해준 오를란도 시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섬을 넘겨야 에스파냐의 손해가 적을지 고민했었고.
헌데 북미왕국에 따로 섬을 내어주지 않고도 자잘한 이권을 내어주는 것으로 북미왕국의 불만을 무마시킬 수 있었으니 로하스로서는 기쁠 수밖에.
하지만 로하스는 내색하지 않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인 푸른 안개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이제 다른 안건을 논의해보도록 하지요.”
이미 협상을 대부분 마무리한 상황이라 푸른 안개는 무슨 소린가 싶어 동작을 멈추고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안건?”
“그렇습니다.”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푸른 안개를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에스파냐와 귀국 간의 비밀 군사 동맹입니다.”
“동맹? 귀국과 말이오?”
로하스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푸른 안개는 무척 부정적인 기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푸른 안개가 알기로 유럽에서는 워낙 전쟁이 빈번하다고 알고 있었다.
헌데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유럽에서 에스파냐가 전쟁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 역시 그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허니 푸른 안개는 동맹이란 말에 무척이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자신들을 속이려 들었던 에스파냐 아닌가.
그런 푸른 안개의 반응에 로하스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일반적인 공수 동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흐음?”
로하스의 말에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 팔짱을 낀 푸른 안개였다.
이에 로하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에스파냐는 귀국에 북미지역에 대한 권리를 넘겼지요. 문제는 우리가 넘긴 이 권리에 약간의 하자가 있었고 말입니다.”
로하스의 말에 푸른 안개는 슬쩍 투덜거렸다.
“약간은 아닌 것 같소만...뭐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에 쓴웃음을 머금은 로하스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우리가 북미지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훗날 귀국이 북미지역을 장악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더불어 북미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유럽의 나라들과 충돌도 생길 테고 말입니다.”
충돌을 강조하는 로하스를 보고 푸른 안개가 질문을 던졌다.
“귀국이 바란 것은 아니고요?”
푸른 안개의 질문에 로하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귀국이 그렇게 생각할까 봐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북미지역에 한정된 비밀 군사 동맹을요.”
“으음?”
“우리 에스파냐는 북미지역에 대한 권리를 모두 귀국에 넘긴 이상 북미지역은 북미왕국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북미왕국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로하스의 말에 왠지 끌려가는 느낌이라 떨떠름한 기색으로 수긍하는 푸른 안개였다.
“그건 그렇소만...”
“하지만 현재 북미 동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걸림돌이 되겠지요. 물론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로하스의 말에 푸른 안개는 로하스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예. 만약 북미지역을 장악하는 문제로 귀국이 다른 나라와 충돌하게 되면 우리 에스파냐는 귀국을 돕겠다는 의미로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 협상을 통해 귀국에 보상한 것과는 별개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서 말입니다.”
로하스가 덧붙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푸른 안개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본 후 질문을 던졌다.
“흐음...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북미지역에 한정된 비밀 군사 동맹이라면 에스파냐가 아닌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역을 타국이 침공해도 우리는 귀국을 도울 의무가 없다는 뜻이오?”
푸른 안개의 질문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로하스였다.
“그렇습니다. 북미지역에 한정된 동맹이니까요.”
“흐음...”
로하스의 대답에 푸른 안개는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우리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군. 어차피 충돌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승리할 테니 우리 쪽에 붙어 적당히 거들어주고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 같아 보이는데...’
저들의 속셈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러한 동맹을 맺어두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푸른 안개였다.
유럽에서야 에스파냐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이곳에선 가장 덩치가 큰 세력이 바로 에스파냐였으니까.
그런 에스파냐가 만약의 사태에서 북미왕국의 편을 들어준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최소한 병력이나 군함이라도 일부 분산시켜줄 테니.
거기에 에스파냐의 상황 때문에 북미왕국이 전쟁에 휘말릴 일도 없어 보였고.
그렇게 계산을 끝낸 푸른 안개는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하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고했다.
“좋소. 그럽시다. 단 비밀을 확실히 지켜야 할 것이오. 이 일로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오. 그런 만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이것이 알려진다면 우린 부인할 것이오. 알겠소?”
정성국은 분명 북미지역 전체를 장악할 뜻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쟁은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다.
그런 만큼 이 동맹이 유럽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것은 없겠다고 판단한 푸른 안개가 차가운 표정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로하스는 다 이해한다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