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670년 새해가 되었지만 새한성은 무척 평온했다.
북미왕국에서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사용했지만, 원주민들은 해가 바뀐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조선인들은 음력으로 계산해 구정을 지냈다.
정성국 역시 딱히 그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심심한 새해는 뭔가 아닌 것 같아 조만간 무슨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다고 여기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2살이 된 정안문은 방바닥에 주저앉아 정성국이 만들어준 블록을 쌓고 무너뜨리길 반복하고 있었고 1살인 정나리는 하얀 들꽃의 품에서 정성국을 보고 방긋 웃으며 손을 들고 아빠라고 불러 정성국의 입술이 귀에 걸리게 했다.
북미왕국에서는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는 달리 생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센다.
태어나면 0살로 치고 첫 돌이 지나야 1살로 치는 것이다.
이는 나중을 생각해 미리 체계를 갖춰놓은 것인데 어차피 훗날엔 대부분 이러한 만 나이를 사용하는 만큼 미리 이렇게 정해두는 것이 혼란이 없을 거라 여긴 탓이다.
전생에서 한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국제 표준에 따라 만 나이를 사용하지만, 관습적으로 세는 나이를 사용하는 터라 여러 불편함을 초래했으니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였다.
괜히 그냥 내버려 뒀다가 조선인들의 나이를 세는 방식이 원주민들에게 퍼져 고착되면 나중에 이를 다시 수정하는데 큰 행정력이 소모될 테니 미리 대비했달까.
처음엔 조선인 출신 관리들이 좀 구시렁대긴 했지만, 어차피 북미왕국에선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서양에 맞춰 서력으로 계산했기에 오히려 이러한 셈법이 나이를 계산하는 데 편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불만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젠 백성들에게도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고 말이다.
“전하.”
“응?”
한창 정성국이 나리의 통통한 볼을 매만지고 있을 때 시녀가 다가와 정성국에게 방문자가 있음을 알렸다.
이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정성국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정성국을 기다리고 있는 푸른 안개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장인어른? 설마 오늘 가시게요?”
외투까지 걸친 것을 보면 먼 길을 떠날 모습이었기에 이를 묻자 푸른 안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내일 새김포에서 새진도로 가는 배편이 있으니 지금 출발해야지요.”
이에 정성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끙...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 잠시만요. 하얀 들꽃과 나리를...”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나리를 데려오려 하자 푸른 안개가 괜찮다는 듯 제지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전하.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새진도에 잠깐 다녀오는 것인데요. 그리고 어제 이미 인사를 해 두었고요. 그럼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에스파냐를 압박해 최대한 이득을 챙겨보겠습니다.”
푸른 안개가 정성국을 보고 고개를 숙이자 정성국은 활짝 웃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믿겠습니다.”
* * *
로하스는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오. 푸른 안개! 정말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예. 오랜만이군요.”
푸른 안개는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로하스와 근황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러십니까? 손녀라...한창 사랑스럽겠군요.”
그동안 푸른 안개가 왜 새진도에 방문하지 않았는지 충분히 이해한 로하스는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 로하스의 말에 푸른 안개는 정나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허허허.”
“헌데 그럼 그 손녀분은...북미왕국의...?”
궁금한 표정으로 로하스가 슬쩍 말을 흐렸다.
이에 푸른 안개가 웃으며 대답했다.
“음...그대들 식으로 치면 공주님이라고 해야겠지요?”
“오. 그렇군요. 그럼 푸른 안개를 자주 보긴 어렵겠군요?”
새로운 정보를 확인한 로하스가 농담처럼 말을 하자 푸른 안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그렇지요. 한창 재롱을 피우는 손녀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데 이곳에 오고 싶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이런 협상은 다른 외무청 관리에게 맡기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푸른 안개의 대답에 로하스가 웃으며 농처럼 말을 던졌지만 푸른 안개는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워낙 큰일이니.”
“큰일이라...”
푸른 안개가 진지한 분위기를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갈 기세이자 로하스는 살짝 당황하며 주제를 돌리려 했다.
푸른 안개가 새진도에 도착했다기에 오랜만에 만나 가볍게 인사 정도만 할 생각이었지 진지한 이야기나 협상은 이후에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고 그를 도와주러 새진도에서 머무는 오를란도와 동석해 그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기에.
하지만 푸른 안개는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난 말입니다. 그대들을 꽤 대우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미왕국은 이들을 해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해적은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에만 해도 저들과는 제대로 말이 통하지도 않았기에.
하지만 북미왕국은 이들을 죽이는 대신 탄광에서 일을 시켰고 자유가 조금 제한되었을 뿐이지 먹을 것도 풍족하게 베푸는 등 생활 환경이 나쁘지도 않았다.
이는 로하스도 인정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푸른 안개는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질문을 던졌다.
“헌데 최근 새진주에서 희한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에 로하스는 대화를 미루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푸른 안개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을 짓자 로하스는 쓴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잉글랜드의 선박이 새진주에 정박했다는 사실은 저도 전해 들었으니까요.”
“흐음...”
“이 때문에 북미왕국에서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만간 외무청 관리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헌데 이렇게 푸른 안개가 직접 오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로하스의 대답에 푸른 안개는 불쾌하다는 듯 안색을 찌푸렸다.
“오해? 무슨 오해란 말입니까? 그럼 잉글랜드인이 전해준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겁니까?”
로하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대답했다.
“관점의 차이라는 겁니다.”
“관점의 차이라...”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겠다는 표정의 푸른 안개였고 로하스는 기회다 싶어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애초에 유럽에서 공식적으로 이 대륙을 발견한 나라는 에스파냐고 이를 교황이 인정해 이 대륙 대부분을 에스파냐의 땅으로 인정했다고.
이에 에스파냐인들은 모두 이 커다란 대륙을 에스파냐의 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협상 당시엔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몇몇 국가에서 이에 불복하고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들었고 최근 들어 에스파냐의 상황이 썩 좋지 않기에 일단 두고 보고 있었을 뿐이지 저들이 건설한 식민지를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고 둘러대며 말했다.
“땅에 떨어져 있는 금덩어리가 있다면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그것이 배가 아파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 로하스의 말에 푸른 안개는 차가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금덩이에는 이미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북미왕국도 그렇고 제가 알기로 멕시코 지역에도 원주민들의 나라가 존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즈텍 제국을 거론하는 푸른 안개의 말에 로하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음...물론 우리 에스파냐는 원주민들이 세운 나라를 존중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인신 공양을 비롯해 식인 풍습이 존재했기에 문명국으로서 이를 두고 볼 수는 없었지요. 이들에게 핍박받는 주변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개입한 결과일 뿐입니다.”
“흐음...”
인신 공양과 식인 풍습을 거론하며 이를 막기 위한 개입일뿐이라고 주장하자 푸른 안개는 멈칫했다.
멕시코 지역의 원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아즈텍 제국을 거론해 에스파냐를 더욱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로하스의 말 때문에라도 이를 가지고는 에스파냐를 압박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의 짐작대로 로하스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북미왕국을 거론했다.
“그리고 북미왕국 역시 문명국으로서 식인 풍습을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듣기로 전에 새진주에 군을 집결시킨 것도 주변 원주민 부족 중에 식인 풍습이 존재하는 부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새진주에서 진행한 화력 시범을 저들이 이미 파악했을 것이라 짐작하긴 했지만, 왜 그랬는지 그 원인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내심 떨떠름한 푸른 안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푸른 안개가 수긍하자 로하스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말했다.
“인신 공양이나 식인 풍습 같은 전근대적인 풍습을 막는 것은 문명국의 의무입니다. 우리 에스파냐는 그러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누에바 에스파냐를 건설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멕시코 지역에서 더는 인신 공양이나 식인 풍습이 존재하지 않지요.”
“흠...”
결국, 푸른 안개는 이 부분은 더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손을 들었다.
이에 로하스는 웃으며 덧붙였다.
“또한, 북아메리카...아니. 북미지역 역시 북미왕국의 존재를 깨닫고 그 땅의 주인은 북미왕국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넘겨주었고요.”
로하스의 말에 기회를 잡은 푸른 안개가 슬쩍 고개를 저으며 반격에 나섰다.
“글쎄요...그건 좀 어폐가 있군요. 당신들이 그냥 넘겨준 것이 아니지요. 당시 우리 북미왕국과 귀국 에스파냐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귀국이 먼저 협상을 원했지요. 아닙니까?”
푸른 안개의 말에 로하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내심 혀를 차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그대들의 관례하고 들었고...그대들은 그 대가를 지불할 돈이 없어서 대신 땅을 내준 것 아닙니까. 헌데 사실은 그 땅이 당신들 것이 아니었으니...”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푸른 안개를 보고 로하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우리가 북미지역을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지만, 북미왕국의 존재를 파악하기 전에는 분명 에스파냐의 소유였습니다!”
하지만 푸른 안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그게 의미가 있긴 합니까?”
이에 로하스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푸른 안개가 사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교황님께서 인정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인정한 사실입니다. 이것만 해도 유럽에선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로하스의 말에 푸른 안개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
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로하스였다.
30년 전쟁 이후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 역시 추락한 지 오래였으니까.
또한, 30년 전쟁 이후로 등장한 신흥 강대국인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 등은 북미지역을 빈 땅으로 생각했지 에스파냐의 영토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로하스를 보고 푸른 안개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만약 당신들이 떳떳했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북미 동해안 지역에 잉글랜드나 프랑스의 식민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이에 한참을 침묵하던 로하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기는 했지만, 우리의 땅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여겨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하스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하던 푸른 안개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직시했다.
“흐음...결국, 귀국이 의도적으로 우리 북미왕국을 기만한 것을 인정은 한단 뜻이지요?”
푸른 안개의 말에 놀란 로하스가 급히 입을 열어 변명하기 시작했다.
“기만이라기보다는...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정을 조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갑작스럽게 귀국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우리는 재산상의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에 종전 협상에서 귀국에 넘겨줄 것이 거의 없었고요. 그나마 귀국이 만족할만한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북미지역의 권리였지요.”
이에 푸른 안개는 냉소하며 말했다.
“애당초 우리는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뻔히 존재하는데 무슨. 다만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인정한다는 소리에 차후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자 넘겨받은 것이지요. 헌데 실제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권리에 불과하니 우리는 사기를 당한 셈 아닙니까?”
푸른 안개의 말에 로하스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엔 우리가 유일하게 넘길 수 있었던 북미지역의 권리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귀국이 알게 되면 협상이 실패할까 두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조금 포장했던 것이고요.”
일단 로하스가 에스파냐의 잘못을 인정했기에 더는 압박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조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에 로하스는 기회다 싶었는지 푸른 안개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분명 귀국에 우리 에스파냐가 넘긴 북미지역의 권리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를 다른 것으로 보상하겠습니다.”
로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하스가 그 말을 꺼내길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푸른 안개는 씩 웃었다.
“흐음...그래요? 귀국이 그렇게 배려를 한다면야 이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럼 무엇으로 보상할지 한번 논의해볼까요?”
“어라?”
로하스는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