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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93화 (193/850)

193화

“오! 보기엔 그럴싸하네.”

정성국은 숙수가 급히 만들어 온 스펀지케이크를 보며 그렇게 평했다.

“그렇습니까?”

숙수가 반색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그가 가져온 마치 빵처럼 보이는 스펀지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지만 어차피 북미왕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기에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에 괜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든 정성국이 숙수에게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전에 에스파냐인들에게 서양 음식들을 배울 때 케이크에 관한 이야기도 얼핏 들었기에.

이에 숙수는 에스파냐인들에게 배운 스펀지케이크를 만들었고.

정성국이 원했던 것은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장식의 케이크들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정성국은 티테이블에 놓인 커다란 스펀지케이크를 자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바라던 것하곤 좀 차이가 있긴 한데 어디 보자. 음...그냥 먹어도 맛있네.”

처음에 정성국이 투덜거릴 때는 살짝 긴장한 숙수였지만 정성국이 먹고 나서 맛있다고 평하자 숙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찮습니까?”

정성국은 다시 포크를 들어 스펀지케이크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어 마치 커다란 도넛처럼 보였던 이 스펀지케이크는 의외로 퍽퍽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응. 괜찮네. 설탕이 들어가서 그런지 조금 달짝지근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커피랑 먹으면 딱 좋겠어.”

“에스파냐인들은 이 위에 꿀을 듬뿍 뿌리고 과일로 장식하기도 한다더군요. 다만 전하께선 너무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으셔서...”

“아아. 그렇지. 잘 했네. 이 위에 꿀을 뿌리면 너무 단맛이 강할 것 같아.”

정성국은 스펀지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얼굴에는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 때문인지 숙수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조금 다른가 보지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혼자서라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 생크림 케이크나 뷔슈 드 노엘 같은 케이크를 원했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크림은 만들기도 어렵고 보관도 문제였다.

더불어 이렇게 만들어놓고 궁에서만 먹을 것이 아니라 왕도 백성들도 맛보게 상점에서 팔려면 젖소를 확보하기 전에는 크림을 사용하는 케이크는 꿈꾸기 어려웠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신경 쓰지 말라고 숙수에게 손을 내저었다.

“응. 근데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오히려 이건 찻집에서 커피와 함께 먹을 다과로 팔 수도 있으니 괜찮아 보이고. 뭐 크림을 사용하는 건 재료도 그렇고 보관도 어려우니까.”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들은 숙수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 만들어보겠습니다만...”

“에이. 됐어. 나중에 젖소를 구하게 되면 그때 부탁함세.”

그때 집무실이 열리며 푸른 안개가 들어오다 티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먹는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급히 커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안개를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음? 이건...”

“아. 스펀지케이크라고 에스파냐인들이 먹는 일종의 다과입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푸른 안개가 들어오자 숙수는 조용히 정성국에게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이에 정성국은 숙수가 나가기 전에 외쳤다.

“아. 이거 몇 개 더 구워서 아라와 하얀 들꽃에게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건네준 케이크를 먹던 푸른 안개는 가족을 챙기는 정성국을 보고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흠...맛있군요. 부드럽고 달짝지근하고. 이것도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입니까?”

정성국이 최근 밀가루의 소모량을 늘리기 위해 서양의 이런저런 음식들을 만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묻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예. 밀가루와 설탕, 달걀이 들어갔지요. 서양 다과의 한 종류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설탕이라...그 하와이 제도에서 재배하는 작물 말이군요.”

하와이 제도의 오하우섬에서는 북미왕국의 권유로 각종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지만 가장 상품성이 좋은 것은 바로 사탕수수였다.

다만 처음에 북미왕국이 전해준 종자가 많지 않아 몇 년간은 사탕수수의 재배면적을 늘리는 데 집중했고 최근 들어 꽤 많은 사탕수수를 수확할 수 있었다.

덕분에 최근 북미왕국에서 설탕이 조금씩이나마 유통되기 시작했고 말이다.

“예. 최근 사탕수수 재배면적이 많이 늘어 수입되는 물량이 무척 많아졌습니다. 해서 백성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간식거리를 생각 중이긴 한데 쉽진 않군요.”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웃으며 눈앞의 스펀지케이크를 가리켰다.

“이것도 맛있습니다만...”

“의외로 손이 많이 가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잠시 잡담을 나누던 정성국과 잡담을 나누던 푸른 안개는 슬슬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그보다 전하. 잉글랜드의 외교관이 새진주에 도착했다면서요?”

“아. 예. 그렇습니다.”

“허면 슬슬 에스파냐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푸른 안개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오히려 정성국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흐음...일단 상황을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요.”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푸른 안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기존의 함대는 분리되어 3함대가 아시아에 배치되어있는 상황이라...저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고 버틴다면 아무래도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그렇다고 저들과 선을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성국의 대답에 푸른 안개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저들은 우리에게 쓴맛을 제대로 보았을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최악을 대비해야죠.”

“그렇긴 합니다만...”

정성국의 말은 정론이었기에 할 말이 없어진 푸른 안개가 애써 수긍하는 가운데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한 곰과 군사청장이 집무실로 들어오다 푸른 안개를 보고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전하. 아. 푸른 안개도 여기 계셨군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들고 있는 보고서로 짐작되는 종이를 보면서 물었다.

“음. 두 분이 급히 달려온 것을 보니 새진주에서 연락이 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조용한 곰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넘겨주었다.

정성국은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내린 후 보고서를 티테이블에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흐음...외무청과 군사청의 대응은 나쁘지 않은데 하필 잉글랜드의 선박이 정박해있을 때 에스파냐의 선박이 새진주에 도착했다라...”

그러면서 정성국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자 집무실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 정성국은 결정을 내린 듯 눈을 뜨며 푸른 안개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군요. 장인어른이 새진도로 가셔야겠습니다.”

정성국은 어지간하면 에스파냐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분명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을 속이려 한 것은 무척 괘씸하긴 한데 현재 북미왕국의 사정상 에스파냐가 버틴다면 저들을 강하게 압박할 수단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1함대를 움직이는 정도랄까.

그것으로 에스파냐가 숙이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커진다.

자연스럽게 새진주의 건설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고 현재 북미왕국 남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노동력도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흐지부지 넘길 수도 없었다.

잉글랜드의 선박이 새진주에 정박해있다는 것을 에스파냐에서 확인한 이상 이제 북미왕국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텐데 그냥 넘어간다면 당연히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할 테니까.

그러다 북미왕국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면 더 골치가 아파질 테고.

곧 조선에서 벌어질 일에 집중해야 하는 정성국으로선 썩 달갑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런 것을 어쩌겠는가.

이에 정성국이 결단을 내리자 푸른 안개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그런 푸른 안개를 보고 쓴웃음을 지은 후 덧붙였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는 모두 잊고 최대한 저들을 압박하세요. 결코, 얕보여선 안 됩니다.”

정성국의 말에 푸른 안개는 기뻐했지만 군사청장은 기겁하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전하. 그러다 저들과 충돌이 생긴다면 끝장입니다.”

이에 정성국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어 군사청장을 달랬다.

“괜찮습니다. 저들은 아마 적당히 변명하고 무언가를 내주며 굽힐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흥미를 나타내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정성국은 반반이라고 보았는데 조용한 곰의 생각은 달랐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저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당연히 북미왕국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그런 만큼 원주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진주에서 진행한 화력 시범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고 새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탐사대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흐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성국 역시 탐사대를 동원하면 에스파냐를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육군의 경우 잘못하면 정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북미왕국의 무기가 우월하다 해도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제외하고 있었을 뿐.

“저들이 우리의 정보를 캐내려는 것처럼 우리 역시 저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누에바 에스파냐의 전력을 생각보다 대단하진 않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17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을 보유했던 에스파냐는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힘이 약해지며 병력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에스파냐는 지켜야 할 곳이 아직 많았기에 병력을 더욱 쪼갤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조용한 곰은 누에바 에스파냐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만약 북미왕국이 육군으로 누에바 에스파냐를 침공한다면 이미 기독교를 믿는 원주민들과 친에스파냐 성향의 혼혈인들이 앞다투어 나설 것이 뻔했다.

더불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나오는 귀금속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에스파냐는 어떻게든 지원군을 보내려 할 테고.

“하지만 본국이나 저기 페루 부왕령에서의 지원도 고려해야지. 더불어 병력이야 징집해 확 늘릴 수도 있고.”

정성국의 지적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조용한 곰이었으나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은 탐사대를 무시하긴 어려울 겁니다. 탐사대는 기병으로 이루어진 만큼 북쪽에서 빠르게 내려와 저들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책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조용한 곰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조용한 곰은 덧붙였다.

“더불어 1함대라면 멕시코 서해안을 다시 한번 불태울 수도 있고 2함대 역시 꽤 부담스러울 겁니다.”

“그건 좀...2함대라고 해봐야 인급 전선 2척뿐이네만...”

정성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옆에 있던 군사청장 역시 동의하는 기색으로 옆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조용한 곰은 웃으며 예전 일을 상기시켰다.

“인급 전선 한 척이 아무런 피해 없이 저들의 교역 선단을 요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인급 전선은 포탄도 버텨냈었고요. 저들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흐음...”

“만약 저들이 버틴다면 1, 2함대와 탐사대 전원이 남하할 텐데 그걸 저들이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군.”

솔직한 생각으로 2함대는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인급 전선의 전투력은 뛰어났지만 정말 에스파냐가 마음먹고 대포가 달린 선박을 모두 끌어모아 인해전술을 펼친다면 답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용한 곰의 말대로 인급 전선 한 척에 교역 선단이 농락당했던 에스파냐는 2함대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 보였다.

결국, 에스파냐로선 1, 2함대와 탐사대가 몹시 부담스러울 테니 버티거나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조용한 곰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군사청장 역시 조용한 곰에 일리가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그러자 푸른 안개가 웃으면서 정성국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럼 결론은 난 것 같고...저들을 압박해 무슨 이득을 취할까요?”

그렇게 정성국은 크리스마스에도 밤늦게까지 집무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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