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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92화 (192/850)

192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책을 펼쳐 휙휙 넘기며 중얼거렸다.

“흐음...괜찮네. 이게 육군 연구소에서 이번에 집필한 서적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군사청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더 많은 지휘관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정성국이 명령해서 군사청에서는 제대로 된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 대학을 설립하려고 준비했었다.

다만 문제는 대규모 병력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성국 역시 전생에 사병 출신이었기에 병사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지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무리였고.

이 때문에 일단 군사 대학의 설립을 뒤로 미루고 연구소를 세워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의 군사학이나 전쟁을 기록한 책을 구해 번역하는 일에 힘쓰게 했다.

그나마 유럽에선 최근까지 계속 여러 전쟁이 일어났기에 자료는 꽤 풍부한 편이었다.

더불어 군사제도 역시 한창 발전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전까지 유럽 각국의 군사제도는 대부분 상비군을 유지하기보다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만 용병들을 고용해 전쟁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유럽의 왕들은 하층민에게 무기를 쥐여주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고 무역으로 부유한 자유 도시들의 경우는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군사로 만드는 것보다 그들이 생업에 종사해 버는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조는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이 보여준 전투력을 보고 바뀌게 된다.

당시 스웨덴은 가난한 국가였기에 용병을 모집할 돈이 많지 않았고 부족한 병력 일부를 스웨덴 백성들을 징병해 국민군으로 만들었다.

헌데 이 국민군은 용병들보다 사기도 높았고 일정한 수준의 군기를 유지하기도 쉬웠다.

덕분에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스웨덴군을 모범으로 삼아 군사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스웨덴군이 강력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군의 전술 단위를 쪼개 군의 유연성과 기동성을 강화한 것이었는데 이러려면 필요한 것이 바로 수많은 장교였다.

전술 단위가 작아질수록 이를 지휘하는 장교의 숫자가 기존보다는 더욱 많이 필요했기에 유럽 각국은 이때부터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유럽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군사학에 관련된 양질의 서적을 구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쉬웠고 말이다.

정성국은 아예 유럽의 뛰어난 인재들을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들을 이곳으로 불러와야 하는데 유럽에 퍼진 북미왕국의 소문 덕분에 유럽 각국은 북미왕국의 국력을 무척 고평가하고 있었기에 실체가 알려지면 득 본단 실이 많아 보여 일단은 포기하고 에스파냐를 통해 여러 서적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가르칠 책이 생겼으니 미뤄두었던 군사 대학을 설립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군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 급히 정성국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에 정성국은 그 진중한 조용한 곰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음? 무슨 일 있나?”

“그렇습니다. 전하. 잉글랜드에서 외교관을 보냈다고 합니다.”

“음?”

조용한 곰의 말에 놀란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건네준 새진주의 외무청 관리가 보낸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보고 중얼거렸다.

“새진주에 잉글랜드의 선박이 정박했고 그 안에는 특별 대사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정성국은 잠시 보고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조용한 곰에게 물었다.

“흐음...아직 새진주에 외무청 고위 관리는 없지?”

새진주의 위치를 고려하면 새진주에 어느 정도 권한이 있는 외무청의 고위 관리가 상주할 필요성이 있었다.

새진주의 위치상 시간이 흐를수록 새진주를 방문하는 유럽 국가들의 외교관과 협상할 일이 많을 텐데 새한성과 새진주의 거리를 고려하면 그때마다 지침을 내리거나 고위 관리가 오갈 수는 없었기에.

이 때문에 정성국은 외무청에 이야기를 해 두었지만, 그가 기억하기로 아직 누굴 보낼지 정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 조용한 곰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년에 날씨가 풀릴 때쯤 보낼 생각이었는데...지금이라도 보낼까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보고서를 들어 흔들었다.

“글세...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저들이 중요한 협상을 위해 새진주에 왔다면 이미 그에 대한 보고와 지침을 내려달라고 했겠지.”

“그렇긴 합니다.”

조용한 곰이 수긍하자 정성국은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일단은 그냥 두고 보게. 그리고 이제부터 새진주에서 오는 보고는 바로 보고를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이 고개를 숙이자 정성국은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군사청장에게도 말했다.

“군사청에서 올라오는 보고도 마찬가지네.”

“알겠습니다. 전하.”

* * *

멕시코 시티에 머물던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이 급히 집무실을 방문해 전해준 편지를 꺼내며 가쁜 숨을 내쉬는 보좌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베라크루즈에서 긴급한 보고가 올라왔다고?”

“그렇습니다. 부왕전하.”

“흐음...”

안토니오 부왕은 봉인된 밀랍을 떼고 안쪽의 편지를 눈으로 빠르게 읽으면서 중얼거렸다.

“새진주에 잉글랜드의 선박이 방문했다? 그리고 외교관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북미왕국 외무청 관리와 협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숨을 좀 고른 보좌관은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반응했다.

“저들이 텍사스와 플로리다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미 예상했던 일 아니겠습니까.”

그랬다.

어차피 유럽에 북미왕국 도자기가 유행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 때문에 최근 들어 북미왕국의 항구를 찾기 위해 서인도 제도를 방문하는 상선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텍사스와 플로리다 지역으로 진출하고 새진주에서 북미왕국의 선박들이 건조되어 멕시코만과 대서양을 오가기 시작한 만큼 다른 서양 세력이 북미왕국과 접촉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때문에 조만간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와 맺은 아카풀코 조약이 어떤 관점에서 보면 기만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챌 거라 예상했고 이에 대한 대비책도 미리 세워두었고 말이다.

“그렇긴 하지. 흐음...”

안토니오 부왕이 안색을 살짝 찌푸리자 보좌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왕전하? 왜 그러십니까?”

안토니오 부왕은 들고 있던 편지를 다 읽었는지 다시 편지를 접어 편지 봉투에 넣으면서 말했다.

“보고서 끝부분에 북미왕국 육군의 실탄 사격 훈련을 선장이 직접 참관했다고 하는군.”

“아...원주민들이 기겁했다는 바로 그 사격 훈련을 말입니까?”

북미왕국이 원주민들을 노리고 진행했던 화력 시범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에 당연히 주변에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에스파냐 역시 늦게나마 이에 대한 소문을 접할 수 있었고.

어차피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화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많이 놀라진 않았다.

더불어 포로들에 의해 이미 저들이 후장식 소총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다만 직접 전투를 치르면서 알게 되었던 북미왕국 해군과는 달리 육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아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를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었고 북미왕국 육군 역시 해군처럼 만만치 않아 보였기에 북미왕국과는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는 결론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이를 기억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보좌관을 보고 안토니오 부왕이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문제는 거기에 선장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인들도 참관했다고 하네.”

안토니오 부왕의 대답에 보좌관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잉글랜드가 북미왕국의 무력을 직접 확인했다면...우리의 생각처럼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게 말일세. 쯧.”

애당초 북아메리카 지역을 북미왕국에 넘기며 에스파냐가 바랐던 것은 북미왕국과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충돌이었다.

더불어 상황을 봐서 다시 북미왕국을 공격해 북아메리카 지역을 되찾을 생각을 하기도 했고.

하지만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생각외로 에스파냐에 이득이 되고 북미왕국의 국력이 예상보다 대단해 보였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만약 북미왕국이 잉글랜드나 프랑스와 충돌할 때 에스파냐가 개입한다고 해도 결국은 북미왕국이 승리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 나왔기에.

또한, 북미왕국에 승리를 거둬도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북미왕국의 영역은 줄어들지만 결국 그 자리를 에스파냐가 차지하는 것이 아닌 잉글랜드나 프랑스와 함께 차지할 테고 그렇게 되면 언젠간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식민지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든, 아니면 본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자연스럽게 식민지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든지 말이다.

그럴 바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이 멕시코 이북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오히려 여유가 생겨 북쪽에 배치된 병사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었으니.

이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생각을 바꾸어 북미왕국이 타국과 충돌하면 북미왕국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어차피 북미왕국이 승전할 것이 뻔해 보였으니 함께 참전해 승리의 과실을 챙기겠다는 속셈이었다.

특히 멕시코와 남미에 집중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서인도 제도에 어느새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진출해 충돌하고 있었기에.

헌데 잉글랜드가 북미왕국의 사격 훈련을 목격한 이상 어떻게든 북미왕국과의 충돌을 회피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나마 오만한 루이 14세의 프랑스라면 북미왕국과 충돌할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이긴 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는 북미왕국과의 영역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 당장 충돌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고.

이에 혀를 차는 안토니오 부왕이었다.

“그보다 잉글랜드의 외교관이 분명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테니 북미왕국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겠어. 특히 북미왕국이 새진주를 방문한 에스파냐인들을 사격 훈련에 참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는 것이 좀 걸리는군.”

부왕의 말에 보좌관은 인상을 흐리며 확인했다.

“권유요? 우연히 사격 훈련에 참관한 것이 아니라 북미왕국에서 먼저 권유했다고 합니까?”

“그렇다더군. 그리고 에스파냐의 선장이 새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잉글랜드의 선박이 정박해있었고.”

안토니오 부왕의 대답에 보좌관은 표정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그럼...잉글랜드 놈들이 아카풀코 조약에 대해 말을 하긴 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우리에게 압박을 주려고...어라? 헌데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는 선장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답니까?”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라 의아한 표정으로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는 보좌관을 보고 안토니오 부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별말은 없었다더군.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이에 잠시 생각에 잠긴 보좌관은 확실하진 않다는 말을 먼저 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 새진주에 상주하는 외무청 관리는 고위급 관리는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하진 못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에스파냐 역시 그동안 북미왕국과 계속 교류해왔기에 북미왕국의 관리들은 고위급 관리와 일반 관리로 나뉘며 그 권한과 책임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언급하는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그것 외엔 저들의 행동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애써 수긍했다.

“흐음...일리는 있군.”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행동에 보좌관은 계속 입을 열었다.

“다만 저들이 사격 훈련을 참관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은 우리를 압박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는 만큼...”

보좌관이 말을 흐리자 안토니오 부왕이 알았다는 듯 손을 들었다.

“아. 역시 그렇지? 그럼 바로 새진도로 연락을 하게.”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새진주에서 북미왕국이 잉글랜드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보좌관을 보고 안토니오 부왕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리고 지금 새진도에 머무는 친구가 북미왕국에 포로로 잡혔던 그 함장이었지? 그 친구에게 협상을 맡겨도 될까? 군인 출신이잖나. 차라리 오를란도 시장을 임시 대사로 임명하는 것이 나을까?”

보좌관은 아카풀코 조약 당시 로하스를 만나본 적이 있었기에 잠시 머릿속에서 그를 떠올려보고 말했다.

“로하스가 군인 출신이긴 하지만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북미왕국의 사정에 밝고 특히 외무청 고위 관리이자 왕족인 푸른 안개와 친분이 있는지라 그에게 맡기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새진도에서 머물면서 일을 잘했고요. 다만 불안하시다면 오를란도 시장을 보내 보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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