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북미왕국의 사격 훈련을 참관한 후 잉글랜드인들 대부분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잉글랜드의 배로 돌아갔다.
그리고 배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함장실로 들어온 클레멘트와 함장은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침묵에 빠져 있었다.
“후우. 우리가 잘못 본 것이 아니지요?”
클레멘트가 한숨을 쉬며 말문을 열자 함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탄식했다.
“이거 정말 예상외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북미왕국의 소문은 대부분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데...오히려 축소된 편이었다니...”
이에 클레멘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이 화약 무기를 쓴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무려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소문은 없었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북미왕국의 기술은...정말 대단하군요. 후장식 소총이라니...”
유럽에도 후장식 소총에 대한 개념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이를 실제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장식 소총을 만들려면 총기 뒤쪽에 연소 가스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압력을 버텨낼 수 있는 장전 폐쇄기를 만들 기술력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한 정은 만든다 쳐도 양산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헌데 이들은 이미 후장식 소총을 대량 생산해 병사들에게 장비시켰을 정도였으니 북미왕국의 국력이 자신들의 상상보다 더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함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면서 감탄했다.
“북미왕국의 기술력과 공업력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 후장식 소총을 대량으로 만들어 군에 보급할 정도라니...거기에 보셨습니까? 그렇게 사격을 하는데도 연기가 거의 없더군요.”
“아...그랬군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클레멘트는 함장의 말에 이를 알아차린 듯 입을 벌렸다.
“저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화약과는 조금 다른 화약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화약을 이야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전 일상적인 사격 훈련에 그렇게 많은 화약을 사용할 수 있는 북미왕국의 재력에도 놀랐습니다”
이 시기 화약은 꽤 비싼 편이었기에 실전에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병사를 훈련시키겠다고 화약을 사용해 실탄 사격 훈련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사들이 총기를 다루는 숙련도는 낮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유럽의 어느 국가나 사정은 비슷했다.
잉글랜드 역시 훗날 인도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이곳에서 나오는 초석을 이용하기 전까지는 화약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헌데 북미왕국은 일상적인 훈련에 그렇게 많은 화약을 소모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 말에 함장은 조금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렇군요. 대충 계산해봐도 4, 50발은 쏜 것 같은데...”
“허허...4, 50발이라...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탄환을 쏟아부었다니...”
함장의 말에 헛웃음을 짓는 클레멘트였다.
분명 사격 훈련을 한 시간 자체는 길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은 탄환을 날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란 것이다.
그런 클레멘트를 보고 함장은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보았던 북미왕국의 전술을 분석했다.
“처음 일자로 길게 늘어섰을 때만 해도 일상적인 사격 훈련이었기에 저러한 대형을 취했다고 생각했는데...막상 저들이 사격하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아마 저들은 실전에서도 그렇게 일자로 설 겁니다.”
“그렇지요. 사격 속도가 워낙 빠르니 굳이 2열, 3열을 구성할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함장의 말에 동의한 클레멘트는 본국에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 함장을 바라보고 물었다.
“혹시 분당 사격 속도가 추측되십니까? 전 너무 놀라서...”
이에 함장은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글쎄요...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분당 8발에서 9발 정도인 것 같습니다.”
클레멘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잉글랜드의 숙련된 병사들이 보통 분당 3발 정도를 발사했으니 너무 차이가 났다.
이에 클레멘트는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허어...그럼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제대로 전력을 비교하려면 저들의 병사 수에 3배는 곱해서 계산해야겠군요.”
그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함장이었다.
“그렇습니다. 분명 사격 훈련을 진행하던 병사들은 용기병일 테고...”
“그렇지요. 사격 훈련 중에도 평상시처럼 선착장 주변에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전에 목격한 용기병 5천은 우리 기준으론 용기병 1만 5천에 해당하는 전력...후우.”
함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자 클레멘트 역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침묵했다.
그렇게 잠시 한숨만 쉬던 클레멘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함장에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협상을 끝내야겠어요. 알아낼 것은 대충 알아냈으니 저들과 충돌이 벌어지기 전에 런던에 알리는 일이 급선무 같습니다.”
“예. 저들의 대포나 배를 구경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저들의 기술력을 짐작해보면 만만치 않을 것 같고.”
함장의 말에 클레멘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저들은 대포도 후장식 대포일까요?”
그 말에 함장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추측이긴 한데...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의외로 저들 군함에 포구가 많지는 않았거든요?”
“그랬습니까?”
이에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저들의 기술력을 확인하니 만약 저들이 사용하는 대포가 후장식 대포라면 아무래도 기존의 대포보다 연사속도가 빠를 테니...”
“끙...”
함장의 말에 다시 기운이 빠진 듯 축 늘어진 클레멘트를 보고 함장은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바로 선원들에게 알려 출항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그보다 코트렐 경. 떠나기 전에 우리가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럴 생각입니다. 런던에서도 북미왕국에 사실을 통보하는 것은 저의 선택에 맡긴다고 했었고. 런던에 돌아가 보고하고 무언가 대책을 세워 다시 이곳에 대사를 파견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그 사이 저들이 식민지를 공격할까 걱정되니 말입니다.”
클레멘트의 말에 동의한 함장은 함장실을 나가기 전 그에게 말했다.
“그 때문에 북미왕국이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최대한 에스파냐를 탓하십시오.”
이에 클레멘트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으득. 물론입니다.”
* * *
“이것으로 협상은 끝났군요. 이 협상으로 우리 북미왕국과 잉글랜드는 꾸준한 교류를 통해 더욱 가까워질 것 같군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클레멘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외무청 관리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렇지요. 헌데 협상도 마무리되었으니 슬슬 떠나야 하는데 귀국에 한가지 알릴 것이 있습니다.”
“음? 무엇입니까?”
외무청 관리는 사격 훈련을 참관하고도 별말 없이 협상을 빠르게 끝낸 클레멘트에게 어떻게 북미왕국이 슬슬 해적 토벌을 나선다는 것을 흘려야 할지 고민 중에 갑자기 진중한 분위기로 말을 하자 혹시나 하였다.
“귀국은 에스파냐와 맺은 아카풀코 조약으로 이 북아메리카 지역 전체가 귀국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외무청 관리는 클레멘트가 아카풀코 조약을 언급하자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북아메리카 지역? 아. 북미 지역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만...”
“물론 에스파냐가 이 북아메리카 지역 전체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것을 아카풀코 조약으로 귀국에 넘겼다면 이를 인정하겠습니다만...문제는 에스파냐는 이 북아메리카 지역 전체를 소유한 적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플로리다 지역 정도가 에스파냐의 영토였지요.”
그러면서 슬쩍 외무청 관리의 눈치를 살피는 클레멘트였고 외무청 관리는 애써 인상을 구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무슨...그 소리는 귀국은 북미 지역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입니까?”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기세의 외무청 관리를 클레멘트는 손을 내저었다.
“무조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북아메리카 전체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기엔 걸리는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걸리는 점?”
외무청 관리가 좀 진정된 듯 보이자 클레멘트가 내심 안도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이 북아메리카 지역은 빈 땅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 북아메리카 지역 전체가 북미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건설한 식민지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지라...저 에스파냐처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허허...이것 참...”
클레멘트가 대답하자 외무청 관리는 처음 듣는 소리인 양 연기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의외로 저자세구나. 사격 훈련을 참관해서 그런가? 어째...잘만 하면 큰 다툼없이 저들이 장악한 지역을 가져올 수도 있어 보이는데...’
하지만 외무청 관리는 영토 협상을 할 정도의 권한은 없었기에 생각을 접고 클레멘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에스파냐는 이곳을 신대륙이라 부르며 저 동남쪽 일부를 제외한 모든 곳이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다만 유럽이라는 곳에선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과 어차피 북미왕국의 영역은 자신들이 소유했을 뿐 아직 진출하지 못한 지역이라 바로 넘겨준다는 말에 더는 피를 보고 싶지 않아 그냥 마무리한 것인데...그게 거짓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이에 클레멘트는 기회다 싶어 바로 입을 열었다.
“유럽에서 이 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공식적인 국가는 에스파냐입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는 이 신대륙 전체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지요. 하지만 유럽에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카풀코 조약은 사기에 가깝지요.”
그러면서 에스파냐의 험담을 마구 늘어놓는 클레멘트였다.
이를 가만히 앉아 듣던 외무청 관리는 손을 들어 클레멘트의 말을 막았다.
“허. 그 정도면 됐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겼던 에스파냐와는 너무 다르군요. 당장 이 문제는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귀하는 왜 지금까지 침묵했던 것입니까?”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없는 클레멘트는 슬쩍 둘러댔다.
“귀국이 에스파냐가 전해준 거짓된 정보를 맹신하고 있다는 정보에 함부로 진실을 알렸다가 분쟁이 생길까 저어했던 탓입니다. 그 때문에 정말 귀국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제가 직접 온 것이고...”
그렇게 말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클레멘트를 보고 외무청 관리는 내심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귀국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왕도에 전달하도록 하지요. 다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이곳 새진주에서 귀국과 교역을 진행하는 것은 미루도록 하지요.”
이미 짐작했었기에 클레멘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혹시나 해 질문을 던졌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무역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도?”
이에 외무청 관리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그 무역은 중간에 중개인이 껴 있는 상황이라...일단은 진행될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기에 클레멘트는 슬쩍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 * *
함장이 선미루 위에서 새진주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는 클레멘트에게 말을 걸었다.
“새진주는 이미 보이지도 않는데 뭐하시는 겁니까?”
“아. 함장님. 북미왕국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흠.”
함장 역시 실제로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멘트가 바라보던 새진주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길 잠시.
함장의 귓가에 클레멘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미왕국을 적으로만 놓고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지만...반대로 생각해서 저들을 우리의 동맹으로 만든다면...아니. 최소한 저들의 무기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우리 잉글랜드의 앞날은 밝지 않겠습니까?”
이에 함장은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야 참으로 좋겠지만 과연 저들이 무기를 넘겨줄까요?”
하지만 클레멘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들은 북아메리카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한다면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포기한다면 굳이 충돌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뜻은...”
함장이 시선을 돌려 클레멘트를 바라보았다.
“저들은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원하고 우리는 저들의 무기를 원합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거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씩 웃으며 함장을 바라보는 클레멘트였다.
“과연 런던에서 그런 결정을 내릴까요?”
“전 보고서에 그러한 의견을 첨부할 생각입니다. 현재 잉글랜드의 상황에서 북미왕국에 맞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긴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이득이라도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북미왕국도 자신들을 속인 에스파냐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테니 잘만 하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
함장은 그런 클레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저도 보고서를 쓰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