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막 정박한 인급 함선에서 내리기도 전에 탐사대장인 이정호와 외무청 관리가 인급 함선에 올라 김봉길을 급히 찾았다.
이미 새진주에 도착했을 때 부사령관인 이정운이 선착장 한쪽에 잉글랜드의 선박이 보인다고 보고했었기에 상황을 짐작한 김봉길은 그들을 함장실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력 시범?”
“그렇습니다. 어차피 외무청에서는 북미왕국의 힘을 저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낫다는 방침이라고 하더군요.”
“흐음...”
이정호와 외무청 관리의 설명을 다 듣고 난 김봉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나쁘진 않네.”
김봉길의 반응도 나쁘지 않자 이정호와 외무청 관리의 안색 역시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아아. 외무청이 왜 그런 방침을 세웠는지는 자네들도 짐작할 것 아닌가. 현재 북미왕국은 저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확장하기 바쁘지.”
김봉길의 말에 이정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물론 전하께서는 최대한 빨리 이 북미지역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내쫓고 싶어 하시지만 현재 북미왕국의 사정상 무리지. 그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계시고.”
김봉길이 정성국의 의중을 언급하자 외무청 관리가 무척 흥미를 나타냈다.
“그러십니까?”
“아아. 시간이 흐를수록 저들이 현재 점유하고 있는 지역의 세력이 커지니까. 그러면 훗날 저들이 점유하고 있는 지역을 가져오기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하고.”
김봉길의 말에 이정호가 안색을 굳혔다.
애초에 에스파냐와의 전쟁은 해군만 동원되었고 북미왕국은 굳이 멕시코의 땅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북미 동해안 지역은 상황이 달랐다.
이곳은 결국 북미왕국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해군이 어느 정도 도와준다고 한들 최후엔 육군이 직접 점령해서 깃발을 꽂아야 했기에 시간이 흐르고 저들이 점유하고 있는 지역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봉길은 그런 이정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당장은 저들과 전쟁을 할 수가 없는데. 일단 새진주까지 철도가 깔리고 2함대가 저들의 해군을 쓸어버릴 정도로 규모가 커져야 가능하니 최소한 수십 년은 걸리겠지.”
“예.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족히 걸리겠군요.”
외무청 관리가 중얼거리자 김봉길은 맞는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래. 그런 만큼 저들에게 제대로 북미왕국의 힘을 보여주어 저들이 북미왕국을 의식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네. 북미왕국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다면 예전처럼 북미지역에서 영역을 확장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지요.”
“뭐...다만 북미왕국의 힘을 경계해 방어시설을 건설하고 병력을 더 보낼 수도 있겠지만...그 정도야 감수해야지. 아. 그리고 저들이 우리들의 기술을 훔치기 위해 노력할 테니 그 부분도 조심하도록 하게.”
김봉길이 이정호에게 당부하자 이정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걱정하지 마시지요. 매일 철저하게 총기 점검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분간은 병사 혼자서 움직이는 것도 금지하게.”
하지만 김봉길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덧붙였다.
이에 이정호는 안색을 찌푸리며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설마 병사를 공격해서 갑오 소총을 탈취할 수도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 질문에 김봉길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잖나. 그리고 서양인들의 탐욕을 조심하라고 전하께서도 누누이 이야기하셨으니.”
“알겠습니다.”
김봉길이 정성국을 언급하며 최대한 주의할 것을 당부하자 이정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포탄은 비싸기도 하고 당분간은 해군이 꽤 사용할 것 같으니 포격 훈련은 제외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조금은 아쉽긴 했지만, 갑오 소총을 사용한 사격 훈련만으로도 서양인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이정호였다.
“그리고 화력 시범에 사용할 탄환은 충분한가?”
정성국은 정예병을 육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과 실탄 사격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축하는 탄환 이외에도 분기마다 실탄 사격 훈련으로 반드시 소모해야 하는 탄환을 배정해주었다.
그리고 아직 이 탄환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정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탐사대에서 훈련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탄환 5만 발이 남아 있으니까요.”
이에 김봉길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5만 발이라고 해봐야...1인 당 10발이면 끝이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김봉길은 그래선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왕 보여주는 거 저들이 사용하는 화승총과 우리가 사용하는 갑오 소총의 위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해. 그러니 화력 시범에 참가하는 인원을 좀 줄이게.”
머스킷과 비교한다면 사거리 정확도 연사속도 등등 모든 면에서 우월한 갑오 소총이었지만 저들에게 제대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사속도라고 생각하는 김봉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갑오 소총의 연사속도를 보여주려면 1인당 10발을 발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긴 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1분 만에 훈련이 끝나버리는지라 좀 아니라고 생각했달까.
“흐음...갑오 소총의 정확도보다는 연사 능력을 보여주란 소리군요.”
“그렇지.”
이정호 역시 저들에게 확실하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갑오 소총의 연사속도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천명 정도로 추려야겠군요.”
그 정도면 1인당 50발 수준이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정호였다.
하지만 김봉길은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흐음...그건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인원은 3천 정도로 맞추고 대신 비상시를 대비해 비축해둔 탄환 중 10만 발 정도만 꺼내게.”
김봉길의 말에 이정호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건...”
하지만 김봉길은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것도 비상시야.”
이에 이정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천명은 너무 적지 않나 싶었으니까.
“흠...알겠습니다. 대신 그거 채워 넣으려면 당분간 사격 훈련은 어렵겠군요.”
그렇게 투덜거리는 이정호를 보고 피식 웃은 김봉길은 시선을 돌려 외무청 관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치들은 아직 북미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슬쩍 떠봤는데 별말은 없더군요.”
“그래?”
김봉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외무청 관리가 자신이 추측한 것을 이야기했다.
“일단은 북미왕국의 정보 수집이 우선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협상도 질질 끌었고. 뭐 저 역시 탐사대장님과 함대 사령관님이 복귀하기만을 내심 기다렸기에 모른 척했지만요.”
그러면서 슬쩍 미소짓는 외무청 관리를 보고 김봉길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탐사대가 화력 시범을 보이고 나면 아마 반응이 있을걸세. 없다면 조만간 해적 소탕에 나설 거라고 슬쩍 흘리게. 그럼 무슨 반응이 있겠지.”
그러면서 씩 웃는 김봉길을 보고 외무청 관리 역시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대충 끝나고 곧장 훈련을 가장한 화력 시범의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정호와 잉글랜드의 특별 대사를 어떻게 꾀어서 화력 시범을 보여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그를 따라나서는 외무청 관리에게 김봉길이 급히 당부했다.
“아.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증기기관은 철저하게 함구하도록 하게.”
이에 외무청 관리는 생각을 멈추고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북미왕국 기술의 핵심인데 그걸 알릴 이유가 없지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아까 보니 에스파냐의 선박도 있던데 이왕 비싼 탄환을 사용해 화력 시범을 보이는 거 에스파냐 친구들도 부르게.”
어차피 에스파냐는 후장식 소총의 존재는 알고 있었기에 에스파냐를 부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에 외무청 관리는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 * *
오후에 클레멘트를 만나 협상을 진행하기 전에 잡담을 나누던 외무청 관리는 클레멘트의 말에 기회다 싶어 속으로는 반색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그러니까 우리 북미왕국의 전선을 탑승해 구경하고 싶으시단 겁니까?”
외무청 관리의 표정이 딱딱해지자 클레멘트는 큰 의미는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애써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기해 보여서 뱃사람으로서 호기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마냥 기다리기 심심하다면서요. 그 말을 듣자니 저도 호기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하하하.”
그러면서 크게 웃는 클레멘트를 보고 외무청 관리는 단호한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흐음...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타국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전선을 개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외무청 관리의 반응을 보고 글렀다고 생각한 클레멘트는 곧바로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고...”
그러면서 변명을 하려는 클레멘트의 말을 끊고 슬쩍 떡밥을 던지는 외무청 관리였다.
“다만 심심하다면...조금 있다가 육군의 훈련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걸 멀리서나마 참관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볼거리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클레멘트는 변명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고 반색했다.
비록 가장 궁금한 저들의 선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저들의 훈련을 보고 군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혹시 이것이 미끼인가 싶어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클레멘트의 반응에 내심 쾌재를 부른 외무청 관리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일반적인 훈련이라 원주민들도 멀리서 구경하곤 하니까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클레멘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함장에게도 연락해야 하니 협상은 조금 미뤄도 되겠습니까?”
잔뜩 달아오른 클레멘트를 보고 외무청 관리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시지요.”
* * *
클레멘트가 북미왕국의 군대가 훈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 함장뿐만 아니라 심심했던 잉글랜드의 선원 대부분이 나섰다.
그리고 슬슬 출항할 것 같았던 에스파냐인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잉글랜드인들이 모여있는 목책과 떨어진 곳에 나타났고.
처음에만 하더라도 목책 위에서 보이는 북미왕국 병사들의 모습에 웃고 떠들며 흥미롭게 구경하던 서양인들이었다.
대열을 이루며 이동하던 3천 명에 가까운 북미왕국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일자로 정렬한 후 3등분으로 나뉘어 양 날개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동시에 이동해 반 포위하는 느낌으로 움직이자 병사들의 움직임에 다들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타타타타타탕!’
처음 총소리가 들릴 때만 해도 웃고 있던 서양인들은 점차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타탕!’
총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혹시 일자로 늘어섰을 뿐이지 교대로 사격하나 싶어 망원경을 들어 살펴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북미왕국의 병사들은 일제히 총을 쏘고 재장전한 후 다시 일제히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3천 명의 병사가 일제히 총을 발사한 후 재장전하고 다시 총을 들어 일제 사격을 하는 모습은 장관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물론 북미왕국의 병사들은 실전에선 이러한 일제 사격을 하진 않는다.
애당초 이곳엔 그럴 상대도 없고 후장식 소총을 들고 라인 배틀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다만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정호가 명령해 적당히 동작을 나누고 맞추어 속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일제 사격을 할 뿐이지.
이 때문에 오히려 연사속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절도 있는 모습으로 기계처럼 동작을 반복해 계속해서 사격하는 북미왕국의 병사들은 엄청난 정예병처럼 보였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정호였다.
그리고 서양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처음에만 하더라도 목책 위에서 웃고 떠들며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바라보던 서양인들의 얼굴은 사격이 진행될수록 하얗게 질려있거나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총소리가 멎자 목책 위는 한참 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소총 사격 훈련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어떠십니까. 구경할 만은 하지요?”
그 적막 속에서 외무청 관리가 나타나 별것 아닌 듯 슬쩍 웃으며 클레멘트에게 말을 건네자 클레멘트는 잔뜩 굳은 얼굴로 힘겹게 외무청 관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예. 그렇군요. 좋은...구경거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