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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87화 (187/850)

187화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선실로 들어온 선원이 선실 침대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책을 보고 있는 젊은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특별 대사님.”

“왜 그러는가?”

“곧 있으면 새진주에 도착합니다. 이를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젊은 사내는 선원의 보고에 화색이 돌며 급히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오오! 그런가? 알려줘서 고맙네. 곧 나가도록 하지.”

“예.”

선원이 선실을 나가자 젊은 사내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젊은 사내 클레멘트 코트렐은 곧바로 겉옷을 챙겨입고 선실 밖으로 나가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시아에서 올라온 보고를 통해 북미왕국의 항구 위치를 파악한 찰스 2세는 곧바로 북미왕국의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다만 대서양을 넘어야 했기에 비교적 젊은 클레멘트가 특별 대사로 임명되어 자메이카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오랜 항해 끝에 자메이카에 도착한 클레멘트는 자메이카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해군의 배를 타고 새진주라는 북미왕국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코트렐 경. 나오셨소.”

이 배의 함장이 클레멘트를 보고 들고 있던 망원경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클레멘트는 함장이 건네준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유럽에 여러 소문이 파다한 북미왕국의 땅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런던에는 아시아에 청나라가 있다면 북아메리카엔 북미왕국이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 내심 기대했던 클레멘트는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볼품없는 항구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곳이 바로 그 북미왕국의 도시인가? 흐음...”

그런 클레멘트의 반응에 미리 망원경을 통해 항구를 관찰했던 함장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지요? 거대하고 웅장한 항구를 기대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에 클레멘트는 망원경에 눈을 떼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항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 런던에선 북미왕국의 소문이 무성하다 보니 너무 기대한 것 같습니다. 딱 개발 초기의 식민지 항구와 흡사한 풍경이로군요. 별다른 볼품도 없고.”

“뭐 워낙 이런저런 말이 많은 북미왕국이니까 기대할 수밖에 없긴 하지요.”

함장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클레멘트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선착장 부근을 살펴보다 다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선착장도...두 곳이 다 비어 있군요.”

이에 함장은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건 나도 조금 아쉽더군요.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불태워버렸다는 그 강력한 북미왕국의 해군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함장의 말에 클레멘트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것도 그렇고 마법으로 움직인다는 소문까지 도는 저들의 선박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저들의 선박은 아예 없으니 이거 허탈하군요.”

클레멘트는 특별 대사로 임명된 이후 잉글랜드에서 유럽 내에 떠도는 북미왕국의 정보나 소문은 모두 수집해둔 보고서를 몇 번이고 정독했다.

그리고 다른 소문도 황당했지만, 마법으로 움직이는 배가 있다는 소리에 보고서의 신뢰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다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 정도로 저들의 배가 특이하거나, 혹은 대단하다는 방증이었기에 실제로 저들의 배를 보고 싶었는데 텅 비어 있는 선착장을 보니 허탈하기 그지없고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클레멘트를 보고 함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 소문은 나도 진실이 좀 궁금하긴 합니다. 그러니 경의 역할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적당히 협상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어보세요. 선착장까지 만들어둔 것을 보면 저들의 배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함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어차피 협상은 자신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클레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도 그렇군요. 그래야겠습니다.”

* * *

한참 새진주의 관사에서 뒹굴거리던 게으른 곰은 갑작스러운 병사의 보고에 무거운 몸을 끌고 망루로 올라갔다.

망루 위에서 망원경을 꺼내 멀리서 다가오는 선박을 확인한 게으른 곰은 당분간 편하게 지내긴 글렀음을 직감하고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확실히 저건 에스파냐의 배가 아닌데.”

“그렇습니다. 선임 조장님. 어떻게 할까요?”

병사의 물음에 인상을 찡그린 게으른 곰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휴. 딱히 해적선처럼 보이지는 않지만...만약을 대비해 일단 전투태세를 갖추고 경계하도록 하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반응할 수 있게. 그리고 새진주 외곽에 주둔해 있는 경비대 쪽에도 바로 알리고.”

“알겠습니다.”

게으른 곰의 명령에 재빨리 망루를 내려가는 병사를 보고 게으른 곰이 소리쳤다.

“그리고 외무청 관리에게도 알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게으른 곰이 선착장 근처에서 경비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 외무청 관리가 급히 선착장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해서 게으른 곰은 빠르게 남은 명령을 다 내리고 외무청 관리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숨을 헐떡이던 외무청 관리는 게으른 곰의 인사를 대충 받으면서 선착장 근처로 다가오는 선박 위에 걸려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저건...잉글랜드의 선박이로군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게으른 곰이 중얼거렸다.

“잉글랜드라...북미 동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그 나라로군요.”

“그렇지요. 서인도 제도에도 저들의 항구가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해서 조만간 접촉해볼 생각이었는데...저들이 먼저 이곳에 올 줄은 몰랐군요.”

“음? 북미왕국과 접촉하기 위해 저들이 왔다고 보십니까?”

의아한 기색을 하는 게으른 곰을 보고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아. 잉글랜드와는 저 서쪽의 아시아 지역에서 접촉이 있긴 했습니다. 선임 조장도 커피는 아시죠?”

“아. 새한성에서 한창 유행이라는 잠을 달아나게 하는 검은 차 말입니까?”

게으른 곰이 커피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았기에 자신도 안다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외무청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예. 그거요. 그 커피라는 차는 저들을 통해 들여온 겁니다.”

“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는 게으른 곰을 보고 외무청 관리가 덧붙였다.

“그리고 예전에 저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알려주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아마 우리와 접촉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외무청 관리의 확답에 혹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까 싶어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게으른 곰은 안도했다.

그런 게으른 곰에게 외무청 관리가 살짝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혹시 탐사대가 언제 돌아오는지 아십니까?”

산타페를 기점으로 활동하던 탐사대는 원주민들에게 식인 풍습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전원이 새진주로 집결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덕분에 텍사스 지역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북미왕국에 합류했지만, 이는 북미왕국의 힘을 두려워했기에 결정한 일이었기에 만약 탐사대가 다시 산타페로 돌아간다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탐사대의 본부를 새진주로 옮겼고 이따금 텍사스 전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훈련을 겸해 텍사스를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탐사대장이 탐사대 대부분을 데리고 새진주를 떠났고.

이에 게으른 곰은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해보다가 대답했다.

“순찰하러 떠난 지도 꽤 오래되었으니...빠르면 1주, 늦어도 2주 내엔 새진주로 돌아올 겁니다.”

게으른 곰의 대답에 외무청 관리는 안색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으음...2함대도 다시 돌아오려면 2주는 족히 걸릴 테니...최대한 시간을 끌어봐야겠군요.”

게으른 곰은 그런 외무청 관리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잉글랜드는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충돌할 여지가 다분했고 그런 상대에게 힘을 과시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북미왕국이 에스파냐를 상대하면서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것도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의 존재를 몰랐던 탓이 무척 크다고 생각하는 게으른 곰이었기에 급히 물었다.

“저들에게 북미왕국의 힘을 과시할 생각입니까?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이에 외무청 관리는 게으른 곰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대충 짐작하고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현재 서양에서 북미왕국은 에스파냐가 떠들어댄 덕분에 꽤 강국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숨겨봐야 오히려 다른 서양 나라들이 오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외무청의 판단이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저들에게 북미왕국은 꽤 강력한 국가라고 알려져 있으니 굳이 힘을 숨길 이유는 없지요. 오히려 힘을 숨긴다면 저들이 오판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외무청 관리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게으른 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습니다. 그럼 순찰을 나간 탐사대와 2함대가 귀환할 때까지 저들이 우리를 얕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탐사대와 경비대를 완전 무장시키고 산 아구스틴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 중인 새진주 외곽의 경비대 역시 새진주로 불러와 외국인 전용 선착장 주변에 배치해둬야겠군요.”

게으른 곰의 말에 외무청 관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경비대 일부를 호위로 붙여둘 테니 항상 대동하십시오.”

“알겠습니다.”

* * *

처음 새진주에 당도한 잉글랜드의 선박은 가까운 텅 빈 선착장에 정박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손을 흔들면서 이를 막고 그들은 오른편의 외국인 전용 선착장에 대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잉글랜드의 선원들은 이내 병사들의 행동을 눈치챈 것인지 병사들이 가리키는 외국인 전용 선착장에 정박했다.

새진주의 경우 위치 때문에 서양의 선박도 드나들 확률이 높았다.

이는 전염병이 유입될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였기에 새김포처럼 선착장을 2개로 나누고 외국인 전용 선착장 주변에는 목책을 세워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했다.

더불어 안쪽도 몇 개의 구역을 나눠 목책으로 구분해두었고.

외무청 관리는 병사들을 대동하고 외국인 전용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박한 잉글랜드의 선박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꽤 화려한 복식의 젊은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에스파냐어는 가능하십니까.”

이에 젊은 사내는 활짝 웃으며 유창하게 에스파냐어로 대답했다.

“오. 에스파냐어를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말이 통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헌데 당신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에스파냐의 깃발과는 다른데?”

외무청 관리의 물음에 젊은 사내는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대답했다.

“아. 잉글랜드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전 잉글랜드 특별 대사인 클레멘트 코트렐이라고 합니다.”

이에 외무청 관리는 내심 움찔했다.

서양의 대사라는 직책은 외무청의 고위 관리급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렇게 젊은 사내가 고위 관리라는 말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특별 대사면...임시로 대사로 임명했다는 것 같은데...아. 귀족 출신인가 보군.’

“특별 대사라...그런 분이 이곳엔 무슨 일로? 아. 설마 교역에 대해 논의하러 오신 겁니까?”

외무청 관리의 물음에 클레멘트는 크게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

“하하하. 교역뿐만 아니라 북미왕국과 잉글랜드 간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여러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클레멘트의 대답에 외무청 관리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협상이라면 2주 정도의 시간을 끄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일 테니 말이다.

“협상이라...좋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우리 북미왕국의 규칙을 따라주셨으면 합니다만.”

“흐음...일단 들어보고 불합리한 규칙이라면 거부하겠습니다.”

클레멘트의 대답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외무청 관리가 이야기했다.

“그러시지요. 일단 외국 선박이 이 선착장에 정박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관문 옆의 목욕탕에서 깨끗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가능합니다.”

“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거론하는 외무청 관리를 당혹스럽게 바라보는 클레멘트였지만 외무청 관리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는 전염병을 예방하려는 조치이니 이 규칙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배 안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물과 식량은 항구 관리인에게 이야기하면 구할 수 있습니다.”

이에 클레멘트는 당황했다.

씻는 것과 전염병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클레멘트는 잠시 고민하다 혹시 북미왕국이 자신들의 하선을 막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싶어 질문을 던졌다.

“으음...한 가지만 묻겠소. 이곳에 에스파냐 선박도 드나듭니까?”

이에 외무청 관리는 무슨 의미로 던진 질문인지 파악하고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에스파냐인들도 똑같은 규칙을 따릅니다. 다만 몇몇 에스파냐인들은 씻는 것이 귀찮다며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짐을 하역하고 싣고 떠나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자유입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이곳에 머무르다 보면 에스파냐 선박을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덧붙이자 클레멘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알겠습니다. 일단은 따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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