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정성국은 궁궐에서 전아라와 하얀 들꽃과 함께 커다란 식탁에서 숙수가 직접 가져오는 접시 위에 올려진 음식을 보고 전생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알리오 올리오를 반겼다.
“오. 이게 에스파냐를 통해 가져온 밀로 만든 면 요리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숙수에게 가장 기초적인 파스타라 할 수 있는 알리오 올리오의 요리법을 알려주긴 했으나 몇 번 도전해본 결과 그가 기억하던 맛은 나지 않았다.
면이 문제라 생각한 정성국은 에스파냐를 통해 이탈리아의 밀과 종자, 파스타면 제조법을 어렵게 구해 숙수에게 전해주었고 그 결과 최소한 겉모양만큼은 그가 기억하던 스파게티와 무척 흡사했다.
이에 정성국은 곧바로 젓가락을 들어 스파게티를 집어 맛을 보았다.
“어디...음! 이야...제대로네. 이 기름도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것 맞지?”
“그렇습니다. 올리브라는 열매를 짜서 얻은 기름이라고 하더군요.”
지중해 사람들의 필수적인 식재료 중 하나인 올리브는 지중해 일대의 기후에서 자라기 적합한데 캘리포니아 기후 역시 이와 비슷해 올리브 농사에 적합했다.
올리브는 건강에도 꽤 좋은 열매였기에 올리브유를 구하면서 묘목까지 함께 구해 묘목은 농업 연구소에 넘겨 재배하도록 한 정성국은 옆에서 멀뚱히 생소한 알리오 올리오를 바라보고 있는 두 부인에게 음식을 권했다.
이에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오물오물 먹던 전아라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전아라의 행동에 정성국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왜? 별로야?”
정성국의 물음에 전아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음...좀 생소하네요. 살짝 느끼한 것 같고.”
“하하. 아무래도 조선의 면 요리와는 좀 다르긴 하지. 하얀 들꽃은 어때?”
전아라와는 달리 조금 더 맛을 보던 하얀 들꽃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평했다.
“음...향은 나쁘지 않은데...맛은 좀 심심한 것 같아요. 거기에 그냥 면만 먹는 느낌이라 조금 이상해요.”
의외로 두 부인이 알리오 올리오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며 숙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굳이 애써 먹으려고 하진 마. 다른 것도 있지?”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전하.”
숙수가 다른 음식을 가져올 때까지 정성국은 한쪽에 치워둔 알리오 올리오를 슬쩍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맛있긴 한데 약간 싱겁긴 하네. 이럴 때 파마산 치즈를 넣으면 딱인데. 아. 치즈라...슬슬 젖소를 구해봐야 하나? 젖소를 구하려면 덴마크와 교역을 해야 하나? 내 기억으론 덴마크가 서인도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세인트토머스 섬에 덴마크인이 정착했을 시기인가? 흐음...’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숙수가 다른 접시를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정성국은 접시 위에 올려진 전형적인 토마토 스파게티를 보고 자신이 먹고 있던 알리오 올리오가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거 하고 비슷한 요리야. 다만 토마토와 양파, 버섯, 소고기를 넣어 만든 소스...가 아니라 양념장을 첨가한 거지. 먹어봐.”
정성국의 권유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조심스럽게 토마토 스파게티를 덜어 오물거렸다.
그리고 전아라가 먼저 나쁘지 않다고 평했다.
“음...생소하긴 한데 저것보다는 나은데요? 양념장 때문인가?”
“저도 저것보다는 이게 더 맛있네요.”
토마토 스파게티를 호평하는 두 부인의 말에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 녀석하고...”
* * *
토마토 스파게티 이후에도 수많은 서양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절반은 정성국이 전생의 기억을 통해 숙수에게 설명한 음식이었고 절반은 이곳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에게 배운 그들의 전통 음식이었다.
그때마다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음식을 맛보고 평가했고.
준비한 음식이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식당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한입씩 맛보았지만, 워낙 많은 음식이 나와 어느덧 배가 부른지 인상을 찌푸리며 정성국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을 보고 슬쩍 웃은 정성국은 슬쩍 물었다.
“오늘 식사 어땠어?”
이에 전아라가 커피잔을 내려두면서 정성국을 보고 밝게 웃었다.
“대부분 생소한 맛이라 좀 아리송하긴 한데...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전아라의 대답에 하얀 들꽃도 옆에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매일 먹는 것이 아니고 가끔 먹는다면 괜찮아 보여요.”
“그렇지?”
두 부인의 대답에 만족한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물었다.
“헌데 오라버니. 오늘 선보일 요리들을 모두 파는 건가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호평받은 요리만. 종류에 맞게 적당히 분류해서 팔 생각이야.”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음...굳이 왕실에서 이런 서양 요리를 알릴 필요가 있나요?”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필요는 없지. 다만 백성들도 다양한 음식을 경험해보았으면 하는 의미에서 그러는 것뿐이야.”
그러면서 슬쩍 눈을 돌리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가 빤히 정성국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게 다인가요?”
“뭐...겸사겸사 대식 습관이 사라지면 더 좋고. 딱 한 끼로 나갈 테니. 그리고 밀 소모량을 더 늘리려고.”
초기의 개척촌 출신 이주민들은 정성국과 먹는 양이 비슷했지만, 최근 북미왕국에 유입되는 유민 출신 이주민들은 대식 습관이 남아있었고 북미왕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 역시 적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거기에 조선 출신 이주민 덕분인지 의외로 원주민들은 밀보다는 쌀을 더 좋아했고 밥을 주식으로 먹었다.
또한, 밀은 조선에선 쌀보다 훨씬 귀한 고급 식재료였기에 그만큼 민간에서 밀을 사용하는 요리법은 몇 가지 되지 않아 생각보다 밀 소모량이 적은 것도 문제였고.
북미 지역 전체를 생각해보면 쌀농사보다는 밀농사가 더 적합한 만큼 식단을 조금 조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음식점을 생각한 정성국을 보고 고개를 젓는 전아라였다.
“조선 사람과 비교하면 북미왕국 사람들은 적게 먹는 편이잖아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북미왕국 사람들 대부분이 대식가나 다름없었으니까.
조선 사람들이 냉면 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퍼 올려 먹는다면 북미왕국 사람들은 딱 냉면 그릇만큼만 밥을 먹는 수준이랄까.
이 때문에 전생처럼 국가에서 밥그릇의 크기를 통제할까도 생각했지만 아직은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일단 그냥 두고 보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그래도 아직 내가 보기엔 너무 많이 먹는 느낌이라.”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정성국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 소식했기에 많은 사람이 걱정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성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답이 없었다.
자신을 비롯한 개척촌 사람들은 정성국 덕분에 자연스럽게 먹는 양이 줄긴 했지만 이건 예외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의 기준에 맞추시면 어떻게 해요. 오라버니는 너무 소식하셔서 탈인데.”
“에이. 내가 무슨 소식을 한다고. 나처럼 적당히 먹어야 오래 사는 법이야. 이것도 꾸준히 교육하긴 해야 하는데...”
이미 북미왕국의 식량은 풍부했고 조선과는 달리 먹거리가 풍부해지고 열량이 높은 육류나 어류를 자주 먹는 상황에서 전처럼 대식하게 되면 각종 질환에 시달린 확률이 높았다.
이 때문에 적당량의 식사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지만, 위생과는 달리 이것은 그냥 권고에 불과해 백성들에게 먹히지는 않았고 말이다.
다만 조선에서처럼 어미가 자식들의 배를 만져보고 들어갈 구석이 있다면 꾸역꾸역 먹이는 일은 줄어들어 그나마 교육의 성과가 있다고 만족할 수 있었달까.
이에 투덜거리는 정성국을 모른척하며 전아라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요리를 만들어 파는 주막의 일에도 직접 관여하실 건가요?”
이에 정성국은 기겁하며 손사레를 쳤다.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어. 평국이한테 넘겨야지. 찻집을 만든 경험이 있으니 잘 하겠지. 그리고 주막이 아니라 음식점이라고 부를 생각이야. 서양 음식점. 음...너무 직관적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도련님은 무척...바쁘시지 않나요?”
“음? 아. 명목상으로는 평국이한테 넘기는 거지만 실질적으론 제수씨가 알아서 잘 할걸? 찻집을 관리하는 거 보니 잘하더만.”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아. 동서가 찻집을 관리하고 있죠?”
“응. 그러니 아예 제수씨에게 국영 상단 휘하의 찻집과 식당은 다 맡겨볼까 해.”
정성국의 말에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하얀 들꽃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어...그럼 저도 슬슬 복귀할까요? 전하?”
갑작스러운 하얀 들꽃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정성국은 이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응? 하하. 아니야. 네가 정말 일하고 싶을 때 복귀하도록 해. 그리고...당장은 아이들이 어린 만큼 난 좀 말리고 싶네.”
하지만 하얀 들꽃은 옆에 있는 전아라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형님은 간간이 일하시는데 전 그렇지 않아서 왠지 죄송해서...”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은 눈을 크게 뜨고 급히 전아라를 바라보았다.
“응? 일? 설마 궁에서 연구해?”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전아라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대학생들을 가르칠 서적을 집필 중이에요. 종합 대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쳐야 하는데 마땅한 서적이 없다고 교육청장님이 부탁하셔서요.”
정성국이 개척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들은 적당히 개편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과서가 되었기에 대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제대로 된 전문 서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교육청장에게 듣긴 했다.
이에 정성국이 조금 도와줄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자신 역시 자신이 전공한 학부의 전공 서적을 만들 수는 있어도 다른 학부의 전공 서적은 읽지 않았기에 모든 전공 서적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방관했다.
다행히 교육청장은 꽤 괜찮은 대안을 가져왔는데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들에게 이를 맡기는 방안이었다.
해서 승낙했는데 전아라가 책을 집필 중이라니.
‘뭐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네. 어차피 종합 대학교의 선생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으니 전아라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할 테고. 안문이를 생각하면 아라가 궁에서 아이와 함께 지냈으면 하지만 아라의 능력을 생각하면 인력 낭비나 다름없으니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 정도라면야.”
하지만 전아라는 정성국의 속마음을 알아챈 건지 살포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문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진 궁에 남아있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종합 대학교의 선생으로 일 할 생각은 아니에요. 그냥 전문 서적을 집필하는 것일 뿐이죠. 교육청장님도 이해해 주셨고요.”
아직은 아이의 육아와 훈육은 전적으로 어미가 도맡아야 하는 시대였고 전아라의 아이는 차기 국왕감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교육청장으로선 전아라를 종합 대학교의 선생으로 임명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다.
그저 전아라가 뛰어난 연구원인 만큼 이에 관련된 전문 서적을 집필해달라고 간곡히 청했을 뿐.
이를 웃으면서 설명하는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겸연쩍은 미소를 짓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원한다면 연구청에 복귀해도 상관없어. 다만 전처럼 밤을 새워가며 연구만 안한다면야...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막을 생각 없어.”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그리고 옆에서 빤히 정성국을 바라보는 하얀 들꽃의 눈길에 정성국은 잽싸게 한 손을 풀어 하얀 들꽃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건 하얀 들꽃. 너도 마찬가지고. 정말 일을 하고 싶으면 복귀하고 아이와 함께 지내고 싶으면 계속 이렇게 지내도 충분해. 알았지?
그제야 하얀 들꽃 역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