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184화 (184/850)

184화

“사령관님. 산 아구스틴에 도착했습니다.”

선장실로 찾아와 보고하는 이정운을 보고 김봉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휴. 다행이군. 이번엔 별다른 일은 없어서.”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이정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항해에서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하던 해적들을 확인했었기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급 전선의 전투력이라면 해적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다만 새진주의 조선소에서 또 다른 인급 전선이 건조된 이후 인급 전선 2척과 수송선 3척에 병사들과 물자들을 가득 싣고 항해 중이었기에 해적에게 공격받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별다른 일이 없었기에 안도한 이정운이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요. 아. 그리고 선착장에 에스파냐의 선박이 정박해 있더군요.”

“그래? 이거 의왼데? 새진주에 물자를 하역하던 에스파냐 선박에 통보하기는 했지만, 우리보다 먼저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김봉길을 보고 이정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저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저들의 통신 체계와 선박의 속도를 내심 가늠해보던 김봉길은 이정운의 말에 별다른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그렇긴 하지. 그럼 바로 선착장에 모든 배를 정박시키고 병사와 물자를 하역하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이정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장실을 나가려 할 때 김봉길이 급하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만약을 대비해 인급 전선은 교대로 보일러를 예열시켜두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증기기관은 보일러 안의 물이 끓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보일러를 예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만약을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김봉길이 이야기하자 이정운은 바로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속 연료가 소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요새를 정비하고 그곳에 가지고 온 60mm 화포 8문을 설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봉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증기기관은 어차피 보일러를 데우기만 하면 그만이라 돌아갈 때는 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일단 별말 하지 않고 이정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김봉길이 묻자 이정운은 곧바로 대답했다.

“한 척은 선착장이 아닌 만 입구에 정박해 두고 망루를 통해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만약 해적이 나타난다 치더라도 인급 전선의 방어력과 화포를 생각하면 큰 문제는 되지 않겠죠.”

화포가 달린 부유 요새로 써먹겠다는 이정운의 대답도 나쁘진 않았기에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 * *

선착장 인근에서 목이 빠지게 북미왕국의 선박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산 아구스틴의 병사들이 환호했다.

“저기 북미왕국의 함대다!”

“오오! 드디어!”

“드디어 이곳을 떠난다!”

“와아아!”

하지만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에스파냐 선박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한 이 선박의 선장이 갑판 위에서 망원경을 꺼내 이곳을 다가오는 북미왕국의 함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흐음...북미왕국의 배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안 그런가?”

이에 부선장이 바로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선장님. 신기하지요. 하지만 저들이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으니...”

에스파냐인들은 그동안 북미왕국의 무기와 선박에 무척 관심을 보였고 이 때문에 이를 캐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런 사실을 떠올린 부선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선장이 피식 웃었다.

“뭐 무척이나 중요한 기술이니만큼 이해하지 못할 처사도 아니긴 하지만...쯧. 처음에는 부왕전하의 판단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저들과 교류하면 할수록 부왕전하의 선택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갑작스러운 선장의 말에 부선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허면 선장님께서는 저들과 협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겁니까?”

이에 선장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부선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들과 전쟁을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판단 자체는 동의해. 하지만 아무리 에스파냐의 손해를 줄이기 위함이라지만 북미왕국을 속여야 했을까 싶네.”

“아...”

그제야 선장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부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이 새진주라는 항구를 통해 대서양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이상 언젠가는 타국과 교류할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북미왕국을 속였다는 것이 알려질걸세. 그러면 과연 북미왕국이 가만히 있을까?”

“그건 그렇군요. 북미왕국이라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부선장의 말에 선장이 손뼉을 쳤다.

“그거야!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저들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으니 저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내어줘야겠지.”

“그렇겠지요.”

에스파냐로선 무엇보다 중요한 식민지인 누에바 에스파냐 바로 위쪽에 자리 잡은 북미왕국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해군이 압도적이라면 본토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 한번 싸워볼 만하지만, 오히려 해군에서 밀리는 상황이다 보니 북미왕국과의 전쟁은 어려웠다.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양국의 우호에 더 도움이 되었겠지.”

“아...저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된다면...”

“그래. 북미왕국의 무기나 저런 선박을 들여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에스파냐는 다시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부왕전하의 선택이 아쉽다는 걸세.”

이에 부선장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신대륙의 강국이 될 것이 뻔한 북미왕국과 우호적이었다면 저들과 동맹을 맺고 신대륙을 노리는 다른 국가들을 내쫓을 수도 있었겠네요.”

부선장의 말에 선장은 격하게 동의했다.

“그래! 바로 그렇지! 뭐...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렇게 아쉬워해 봐야 바뀔 것은 없지만 말일세.”

부선장은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선장을 보며 슬쩍 그의 등을 밀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보고서를 통해 선장님의 생각을 위에 알리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흐음...이번에 돌아가면 그래야겠군. 아. 자네는 슬슬 출항 준비를 하게. 병사들이 배에 모두 승선하면 바로 출항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선장님.”

* * *

“그 친구들은 모두 떠났나?”

김봉길의 물음에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3일 전 에스파냐의 선박이 이곳에 도착했다던데...화포를 비롯한 가져갈 만한 물자는 싹 다 배에 실어두고 북미왕국의 배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린 모양입니다.”

그런 외무청 관리의 대답에 김봉길이 혀를 찼다.

“화포까지? 쯧쯧. 만약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해적이라도 나타났다면 그냥 튀었겠군.”

“하하하. 아마 그랬을 겁니다. 뭐 요새도 영 엉망이라 그곳에서 항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리는 김봉길이었다.

“에잉. 에스파냐 놈들은 영 맘에 안 들어. 그래. 알아봤나?”

김봉길의 물음에 외무청 관리가 씩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지휘관을 꽉 붙잡고 어떻게든 정보를 캐냈지요.”

“그래. 고생했네. 그럼 빨리 말해보게.”

김봉길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외무청 관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김봉길이 보고 있던 탁자 위에 올려진 플로리다 지역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이곳 주변의 원주민들을 뭉뚱그려 티무쿠아 족이라고 부르더군요.”

외무청 관리가 산 아구스틴이 포함된 플로리다반도 북쪽을 가리키자 김봉길이 지도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티무쿠아 족이라...”

“이 티무쿠아 족은 이 주변에 분포한 여러 소부족을 총칭해 그렇게 부르는데 인구는 약 5만 정도로 추산된답니다. 에스파냐인들이 이곳에 정착할 때만 해도 훨씬 많았는데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꽤 많은 원주민이 사망했다더군요.”

외무청 관리의 말에 김봉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래? 그건...”

외무청 관리는 원주민 출신이었기에 감정이 이입된 건지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아마 에스파냐 놈들과 프랑스 놈들이 옮긴 전염병 때문이겠지요.”

이에 김봉길이 기겁했다.

이곳에 오면서 정성국에게 여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곳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으니.

정성국이 이야기하기론 프랑스의 식민지는 북미 지역에선 저 북쪽에만 있다고 들었다.

그 외에는 서인도 제도의 몇몇 섬에 식민지를 건설 중이라고 들었고.

그 때문에 김봉길은 다급한 표정으로 외무청 관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응? 프랑스? 프랑스가 갑자기 왜 나오나? 설마 이곳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존재하는 건가?”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외무청 관리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지도에서 산 아구스틴 바로 위쪽을 찍었다.

“아. 지금은 없고...예전에 이곳에 프랑스가 정착지를 건설했나 봅니다. 뭐 말로는 프랑스 해적이 이곳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려 해서 자신들이 물리쳤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냐는 표정을 하는 외무청 관리의 얼굴을 보고 김봉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이라면 산 아구스틴과 가까운 곳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마 예전에 프랑스가 식민지를 건설하려 들었고 그것을 에스파냐가 방해한 듯싶었다.

“아...이해했네. 흠...그럼 지금은 없다 이거지?”

“예. 아주 예전에 물리쳤고 다시는 이곳을 넘보지 못했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러면서 에스파냐 놈들에 불만을 터트리는 외무청 관리를 보고 슬쩍 웃은 김봉길이 적당히 들어주다 탁자를 두드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리고?”

“아...이곳의 원주민은 애팔라치 족이라고...티무쿠아 족과는 문화가 다르다더군요. 그리고 이곳은 대략 2만 내외로 짐작한답니다.”

외무청 관리가 가리킨 곳은 티무쿠아 족의 영역 서쪽이었다.

이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김봉길은 남아있는 플로리다반도 남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흐음...그럼 이곳은?”

“에...그곳은 꽤 여러 부족이 존재한다더군요. 아이스 족, 카루사 족, 제아가 족, 마야이미 족, 테케스타 족, 토코바가 족 등이 분포해 있으며 추정 인구는 대략 5만 정도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부족이 존재했기에 살짝 당황했던 김봉길은 외무청 관리의 말이 끝나자 되물었다.

“그 부족들을 다 합쳐서 5만이라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외무청 관리의 대답에 김봉길은 플로리다 지역이 그려진 지도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12만이라...뭐 그래도 텍사스보단 낫군. 그 넓은 땅에 원주민이라곤 고작 5만에 불과했으니.”

김봉길의 말에 원주민 출신인 외무청 관리가 남 일 같지 않은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그곳이나 이곳이나 서양인들과 접촉해 전염병으로 상당수가 죽은 후니까요.”

김봉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외무청 관리의 어깨를 탁탁 치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뭐...아쉽지만 어쩌겠나. 남은 원주민들이라도 잘 설득해 북미왕국에 합류시키고 이들을 잘 보살펴서 더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최대한 막아봐야지.”

김봉길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투덜거렸다.

“그렇지요. 그 때문에 좀 답답하긴 합니다. 새나주에서 새진주까지 철도만 연결되어있다면 넘쳐나는 식량을 이용해 원주민들을 빠르게 북미왕국에 합류시킬 수 있을 텐데 이곳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아아. 일부 물자가 계속 보내지긴 하지만 대부분 물자는 에스파냐를 통해 들어오다 보니 넉넉하진 않지. 그나마 텍사스 지역은 아코키사 족의 식인 문제 때문에 군사를 동원해 일이 수월하게 풀리긴 했는데...”

그나마 텍사스 지역의 경우 갑자기 붉어진 식인 풍습으로 인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탐사대를 동원해 북미왕국의 힘을 원주민에게 보여주었고, 이 때문에 다른 부족들도 북미왕국의 힘을 목격하고 합류했지만, 이곳은 사정이 달랐다.

‘탐사대는 북미왕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만큼 당분간은 텍사스 지역에서 움직일 수 없어. 거기에 사정이 나아진다 해도 저들을 배로 이곳까지 운송하기도 쉽지 않고 육지로 이동하자니 분명 수많은 부족의 영역을 지나가야 하는지라 쉽지 않고. 당분간은 우호적으로 접근해 교류를 지속해나가다가...상황을 봐서 어떤 식으로 저들을 설득할지 결정해야겠군.’

그렇게 김봉길이 생각에 잠겼을 때 외무청 관리가 입을 열었다.

“이곳 마을이 엉망이 된 후론 원주민들과의 교류가 거의 끊어졌다고 했으니 일단 주변 원주민들과 접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도록 하게. 다만 혹시 모르니 항상 경비대를 대동하도록 하게.”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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