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오랜만에 조용한 곰과 장인인 푸른 안개가 함께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이에 외교적으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내심 긴장했던 정성국이었지만 푸른 안개가 궁궐에 들어와 손녀딸의 재롱을 보고 돌아가기 전에 정성국에게 인사나 하려고 집무실로 이동하다 멀리서 이동하는 조용한 곰을 보고 함께 왔다는 소리에 안도했다.
그리고 정성국은 잠시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호위대장이 들어와 새진주에서 도착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정성국은 수많은 보고서 중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김봉길이 직접 쓴 보고서를 펼쳐 빠르게 내용을 확인하고 안색을 찌푸렸다.
“흐음...”
이에 티테이블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아. 김봉길 사령관이 산 아구스틴을 방문했던 모양인데...그곳의 상황이 썩 좋지 못한 모양이야.”
“그렇습니까?”
정성국은 김봉길의 보고서를 모두 확인한 후 보고서 위에 올려두고 다시 티테이블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해적들의 습격도 있었고...에스파냐가 잠시 땅을 지켜주는 상황이다 보니 지원도 줄여서 그런지 산 아구스틴 전체가 꽤 엉망이라는군.”
정성국의 말에 커피를 마시던 푸른 안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그놈들은 참...”
그리고 조용한 곰도 에스파냐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정성국을 바라보며 요청했다.
“전하. 어차피 새진주가 개발되고 있으니 슬슬 에스파냐 놈들에게 따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에 정성국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아직 새진주를 드나드는 타국의 선박은 에스파냐의 선박 외엔 없지 않나?”
그동안 북미왕국은 유럽의 사정과 북미 동해안 지역의 상황을 모르는 척해왔다.
헌데 이제 막 새진주를 개발중인 상황에서 따지긴 이르다고 생각해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긴 하지만...저들이 항상 새진주를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저들이 우리를 속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북미왕국은 아카풀코 조약처럼 실제 에스파냐가 북미 지역에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당시 상황에서 저들이 내민 조건이 오히려 북미왕국이 원했던 조건이었기에 모른 척했을 뿐.
더불어 가까운 에스파냐와 길게 전쟁을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북미왕국이 유럽 사정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리고 다른 이득을 취하려 해도 당시엔 딱히 얻을 것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텍사스 지역과 플로리다 지역에 진출해 멕시코만과 대서양에 북미왕국이 진출한 이상 에스파냐를 압박해 얻을 것이 많았기에 이를 거론하는 조용한 곰이었다.
정성국 역시 조용한 곰의 말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했지만 당장 움직이기엔 아직 이르다는 견해였다.
해서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기야 하지. 다만 좀 두고 보세.”
“으음...”
정성국의 부정적인 반응에 조용한 곰이 안타까워하자 정성국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직 새진주는 개발이 끝나지 않았고 새진주의 개발에 에스파냐의 도움이 무척 중요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에스파냐도 중간에서 차익을 보는 만큼 크게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저들이 물자 보급을 중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차피 에스파냐가 공짜로 새진주에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진주에 보급되는 물품의 거의 2배에 해당하는 물자를 새진도에서 에스파냐에 넘겨주고 있었으니.
이는 에스파냐에 무척 이득인 거래였기에 자신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계속 물품을 보급할 거라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만...저들이 이성적으로 대응할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
“뭐 그렇긴 합니다.”
정성국의 말에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푸른 안개였고 조용한 곰 역시 동의하듯 말했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행동이 얄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에스파냐를 압박하려면 새진주가 어느 정도 개발되고 2함대의 규모가 조금 더 커져야 해.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더 많이 뜯어낼 수 있을 테지.”
정성국은 오히려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을 속이려 들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는 것 외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저들이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면 북미왕국은 저들이 주장하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고 이를 명분 삼아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압박할 생각이었고.
하지만 저들은 북미왕국이 유럽 사정에 무지할 거라는 생각과 당장의 위기를 넘겨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생각에 북미왕국을 속이려 들었고 덕분에 이를 빌미로 다시 에스파냐를 압박해 또 다른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보통 이런 협상에선 속아 넘어간 쪽이 잘못이고 만약 북미왕국의 국력이 미약해서 에스파냐에 따지기 어렵다면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겠지만, 아무리 북미왕국의 규모가 에스파냐에 비해 작다고 한들 명분이 확실한 상황에서 에스파냐를 압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특히 2함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북미왕국의 해군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깨달은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정성국의 말속에는 결코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을 속인 것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기에 조용한 곰은 그나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고 옆에서 푸른 안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제가 나서서 확실하게 우리를 기만한 대가를 받아오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장인어른을 바라보았다.
“아니...장인어른. 또 어딜 가시려고...”
정성국의 걱정에 푸른 안개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있는데 제가 위험을 감수하겠습니까. 어차피 가까운 새진도에서 협상을 하면 되잖습니까.”
“끙...”
그러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장인어른을 말려보라는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 푸른 안개였고 그동안 에스파냐와 협상을 도맡은 인사도 바로 푸른 안개였기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눈길을 피해 커피잔을 들었다.
이에 정성국은 허망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고 그때 마침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정성국은 정신을 차렸다.
“들어오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연구청장이 숨을 헐떡이며 급히 들어오다가 집무실 안에 조용한 곰과 푸른 안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순간 멈칫했다.
“전하! 어라?”
정성국은 연구청장을 티테이블로 불러 커피를 권하며 물었다.
“앉게. 자네는 또 무슨 일이길래 숨이 가쁘게 달려온 건가?”
연구청장은 정성국이 직접 따라준 커피를 황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기뻐하십시오. 전하. 드디어 원유정제공방의 건설이 완료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오! 그래?”
새나주에서 원유를 발견하고 연구 끝에 원유 정제 기술을 손에 넣은 후 곧바로 대규모로 원유를 정제하는 원유정제공방을 새나주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짓는 원유정제공방이었고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꼼꼼하게 점검하며 건설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마침내 공방의 건설이 완료된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급히 연구청장에게 물었다.
“석유를 운송할 기차는 만들어 두었지?”
석유를 운송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바로 송유관을 이용하는 방식이지만 당장 송유관을 설치할 기술도 인력도 부족했기에 차선으로 철도를 이용하는 유조화차의 개발을 명했던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의 물음에 연구청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철도와 연결된 새한성 외곽에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거대한 저장소를 만들어 두었고요.”
연구청장의 대답에 만족한 정성국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좋아. 그럼 곧바로 정제된 석유를 이곳으로 운송하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아. 그리고 아스팔트를 이용해 포장도로를 건설하는 새로운 공법의 개발은 아직인가?”
새한성이야 수도인 만큼 구운 벽돌을 이용해 포장도로를 깔고 있지만,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는 포장도로가 아니었다.
포장된 도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원유 정제에 성공한 이후 부산물 중의 하나인 아스팔트를 이용하는 새로운 공법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고.
이제 원유정제공방을 통해 아스팔트를 대규모로 얻을 수 있으니 슬슬 제대로 된 포장도로를 건설할 생각에 이를 묻자 연구청장은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미 새로운 공법의 개발은 완료되었습니다.”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얼굴을 보고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헌데 왜...”
“다만 이 새로운 공법으로 건설된 포장도로가 무척 튼튼하고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기는 한데...도로를 까는데 생각보다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지라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 훗날 북미왕국 전역에 포장도로를 깔 것을 생각하면 현재로선 극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연구원들의 공통적인 지적입니다.”
“그거야...”
애초에 조선은 제대로 된 도로가 거의 없었기에 연구원들이 아스팔트를 이용하는 새로운 공법을 연구하는 데 참고하라고 로마 가도를 건설하는 방식과 근대에 개발된 새로운 포장도로 공법인 머케덤 공법을 기억나는 데로 알려주었던 정성국이었다.
그러니 연구청에서 개발한 새로운 포장공법 역시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노면에서 1m가량을 파서 여러 층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대공사가 될 수밖에 없긴 했다.
이를 짐작한 정성국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청장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해서 현재는 트랙터를 변형해 조금이나마 일손을 줄이고 빠르게 도로를 까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허어...”
연구청장의 말에 몹시 감격한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이 따로 언질을 주지 않더라도 인력이 아닌 기계의 힘을 이용할 발상을 하고 이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무척 대단했던 것이다.
‘확실히...개척촌이 생기기 전부터 죽어라 가르친 보람이 있네. 트랙터를 변형한다라...나중에 박기동을 불러 슬쩍 포크레인과 도로를 다지는데 유용한 롤러에 대한 언질을 줘야겠네. 20마력의 트랙터로 가능할까 싶기는 한데...뭐 기동이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이내 눈앞의 연구청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기다려야겠군.”
“그렇습니다. 전하. 개발청 역시 당장은 새나주와 새진주 사이에 교량을 건설하는 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어차피 당장 포장도로를 까는 것은 어렵다고 하는지라...오히려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연구청장의 말에 현재 개발청의 상황을 떠올린 정성국이 수긍하며 문득 생각이 나서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하긴...그렇긴 하지. 알겠네. 아. 그리고 새나주보다 작은 규모의 원유정제공방을 설계해보도록 하게.”
정성국의 명령에 연구청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또 어디에 건설하시려고...”
이에 정성국은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개발청과 군사청에게 명령해 새진주 인근에 원유가 묻혀있는지 조사해보도록 명령을 내릴걸세. 만약 새진주에 원유가 묻혀있다면...그곳에 일단 작은 규모의 원유정제공방을 세우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그러네.”
텍사스는 각종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고 이곳에서 석탄을 캐 증기기관의 연료로 사용하면 되긴 했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석유의 사용이 늘어날 테니 이곳에도 원유정제공방을 건설해야 하긴 했다.
그렇다면 일단 작은 규모로나마 원유정제공방을 세우고 이곳에서 나오는 경유와 중유를 증기기관을 가동하는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 나아 보였기에 이런 명령을 내리는 정성국이었다.
“아...알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새진주에 원유가 있긴 할까요?”
살짝 의구심을 표하는 연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씩 웃었다.
“글세...하지만 북미 땅은 각종 자원이 넘쳐나는 축복받은 땅이니 있지 않을까 싶네.”